【2015.03.15】11-3 독림운동가 들의 영혼을 느낄수 있는 남산구간과 아품을 안고있는 숭려문을 지나면서....
▣ 서울 한양도성 성곽길 남산 구간 ② △. 국립극장 지나면서 버스 정류장이 있었으며 그 길을 딸아 올라오면 남산 남쪽의 성벽길을 걸어 올라가야 하는 장소에 도착 하였습니다.. △. 남산 순환로 우축으로 나무 게단이 설치 되어있으면서 그길을 따라 오르게 되있지만 이길은 성벽길이며 오르면서 이곳은 유난히 축성당시의 성벽의 모습과 성벽돌에 잘 모르는 글씨들을 발견 하게 된다. △. 성벽길 사이로 멀리 지나온 호텔 반얀 트리클럽도 뒤돌아 보면서 잠시 휴식 계단길은 좀 깔딱고개로 단숨에 오르기 힘든 구간이다. △. 남산 동쪽 나무 계단길 태조 시기의 성벽은 축성된 지 이미 600여 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초축 당시의 모습을 유지한 성벽이 상당 부분 남아 있다. 특히 남산의 동쪽 능선을 따라 조성된 나무계단길 옆에 태조 때 성벽이 길게 이어져 있다. △. 언재쯤 설치 해놓았는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나름대로는 성벽으 관리하기 위한 조사를 위해 설치 된것들 이것은 과연 무었일까..? 계측 설치 물들이였지요. 즉 갈라지거나 튀어나오는 부분에 두게의 계측 부분을 설치하여 구분지어 놓았다가 다시 시간이 흐른뒤에 다시 측정하기 위한 측정지점 설치해 놓은 것이다. △. 산나무 계단길을 오르다가 잠시 휴식하며 뒤돌아본 게단길이다. 이곳을 올라가야 하는데 약간은 힘든 구간이다. △. 성벽길에서 발견하게 된 글씨들 자세히 읽어보고 알아 보았지만 알길은 없으며 아마도 축성당시의 표시 지점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 게단길 상부 지점에 도달해 갈쯤에 성벽이 눈에 들어와 담아 봅니다. 옛모습 그대로 남아 잇는것 같더군요.. △. 멀오르면서 성벽넘어로 멀리 아래로 국립극장이 보인다. 1973년 장충동에 건립된 국립 공연, 예술 종합극장이다. 1974년 광복절 경축식 행사 도중 육영수 여사가 저격당한 장소이기도 하다. 해오름극장[대극장], 달오름극장[소극장], 별오름극장, 하늘극장[원형 야외무대] 등이 있다. △. 정상 가까이 오면서 다시 성벽내길로 넘어가게 되어있어 넘어가며 성벽을 담아 봅니다. △. 성내 성곽길에서 멀리 보이는 N서울 타워 말로만 듣던곳 얼마만에 찾게 된것인지 기역속에는 30년 된듯하기도 합니다.. △. 이쯤에서 잠시휴식 장소에는 의자 설치 되어있으면서 가까이 다가온 자리기에 준비해온 간식을 이곳에서 빵을 한개식 음료수와 함게 보충 합니다. △. 이곳은 도로와 산책길 성곽길에서 올라온길과 만나는 지점 뒤돌아본 사진입니다. 사진상 뒤로 올라가면 남산타워로 가는길이며 이잰 다 올라왔습니다. △. 정상 부근의 버스 정류장에 도착 하니 순환버스들은 천영가스 버스와 전기자동차 보스가 있는데 도착과 함게 휴식을 하면서 바로 충전을 하더군요. 이런 모습도 처음 보는 장면으로 자동차 관련 일을 하면서 관심 분야 이기도 합니다. △. 이지점은 “서울 중심점”지점에서 조망 하였습죠. 발강색 건물 빌딩은 신라호텔 건물로 그뒤로 성곽길이기에 지나온 곳이다. △. 아래로는 남산골 한옥마을도 보이내요. 자주 눈길을 끄는것은 쌍둥이 빌딩 두개가 똑같은 모습의 빌딩이 궁금해 진다. 시내 전경을 바라보니 새롭개들 느껴진다. △. 약간 줌이하여 인증 사진 남깁니다. 남산골 한옥마을을...... 저 뒤로 세운상가도 보이내요... △. 중심점 지나면서 이런곳을 지나게 되는 군요. “N서울타워” 남산 정상에 우뚝 솟은 전망 탑으로 해발 480m 높이에서 360도 회전하면서 서울시 전역을 조망할 수 있는 명소이다. 1969년 수도권에 TV와 라디오 전파를 송출하는 종합 전파탑으로 세워졌다가 1980년부터 일반에 공개됐다. 이후 대대적인 보수를 거쳐 2005년 복합문화공간인 N서울타워로 재탄생하였다. 2층에서는 한양도성에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 N서울타워 전망대 이용시간 : 월요일~금요일. 일요일 10:00~23:00, 토요일 10:00~24:00 ※ N서울타워 전망대 2층[T2]에서 서울 한양도성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 성곽길을 따라 도로가 만들어져 있내요. 남산 타워가 생기면서 만들어진 도로가 아닐까 싶다. △. 오르던중 화장실도 있구요. 여기서 한마디 하겠습니다. 남산은 약속의 장소라고하여 열쇠로 사랑을 약속하기도 하며 기원하기도 하는 장소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지만 화장실 표지에도 글을 남겨 놓았내요. 남산은 이곳뿐이 아니 더군요. 글을 쓸수 있는 곳이라면 낙서금지 ㅍ시와 함게 사랑의 약속을 지리는 글씨들 쓸때가 없을 정도 였습니다. 보기 좋게는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 남산 팔각정과 국사당 터 남산 팔각정 자리는 조선시대 국사당[國師堂]이 있던 자리이다. 조선 태조는 남산을 목멱대왕으로 삼고 이 산에서는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는 국가 제사만 지낼 수 있게 하였다. 1925년 일제가 남산에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인왕산 기슭에 옮겨졌다. 제1공화국 때에 원 국사당 자리에 탑골공원 팔각정과 같은 모양의 정자를 짓고 이승만 대통령의 호를 따 “우남정”이라고 하였는데, 4.19 혁명 이후 팔각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 열쇠 꾸럼이 이렇게 표현해 봅니다. 직원분께서 넘어롷있는 열쇠들을 회수하고있더군요 그래서 넘어로 바라보았더니 걸을때 없어서 그냥 던져 놓은곳도 엄청 나더군요. 그러면서 혹시나 떨어질까 의심스런 열쇠들은 회수하고 있더군요, 요즘은 특히나 외국분들이 많이 걸어 놓는다고 하더군요.. 분명한 것은 남산의 또 다른 명소 였습니다. △. 넘어로 지나온곳을 담아 봅니다. 앞전에 잠시 휴식하던 운동기구 설치 된곳도 아래로 보인다. △. 타워도 한번 올라보고 싶지만 많이 기다려야 하기에 생각 조차 해보지도 못하고 그냥 지나야 한다. △. 목멱산 봉수대 터 <기념물 제13호> 목멱산 봉수대는 조선시대 전국팔도에서 올리는 봉수[烽燧]의 종착점이었다. 봉수란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변방의 정세를 알리는 시각[視覺] 신호를 말한다. 평시에는 1개의 봉수를 올렸으며, 변란이 생기면 위급한 정도에 따라 2개부터 5개까지 올렸다. 목멱산 봉수대는 세종 5년[1423]에 설치되어 1895년까지 500여 년 간 존속하였다. 현재의 봉수대는 1993년에 추정 복원한 것이다. ※ 목멱산 = 남산을 옛날에 불리던 지명이다. △. 봉수대 뒤로 남산 케이불카 상류지점으로 지붕에도 열쇠 트리 설치 되어잇지만 열마 가지 않아 염청나게 열릴거 같내요... △. 혹시나 하여 열쇠 판매 하시는분에게 이야기를 해보았더니 타워 밑부분과 이곳주변의 열쇠들이 언재부터 걸렸는지는 모르겠으나 금액으로 따진다면 약10억을 이야기 하더군요. 현재 판매 금액은 평균으로 개당 5.000원 하더군요. 그렇다면 엄청난 숫자의 열쇠 뭉치들.....? 하산길에 가로등에도 걸려 있더군요. △. 성곽길을 두고 그 옆으로 계단길을 따라 잠시후면 잠두봉에 도착하게 된다. △. 연실 오르내리는 케이불카 만석이 되어 오르내리 더군요. 특히나 외국인들이 많이 눈에 뜨이더군요. △. 여기는 잠두봉 전망대 남대문 상가 지역이 바로 아래로 보이는 곳이다. 아치 아래로는 이렇게 쓰여있내요. “잠두봉 포토아일렌드” 남산 서쪽 봉우리는 누에머리를 닮았다하여 예부터 잠두봉이라 불렸다. 이곳 전망대에 오르면 내사산으로 둘러싸인 도심의 빌딩숲이 한눈에 들어온다. △. 남산 케이불 하류지점 승강장이 보인다. 또한 남대문 상가, 시장도 바라 아래로.....한국은행 건물도 살짝 보이내요. △. 잠두봉 전망대에서도 멀리 북한산이 아름답게 보이죠.. 인왕산, 북악산을 앞으로 뒤로는 북한산.. 이후로 게단길을 걸어내려 갑니다. 그길 옆으로는 발굴조사 중이며 그 장소가 일재강점기 당시에 신궁을 만들면서 회손된 부분을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 지금은 완료 되었자는 문구와 북원준비 중이라는 문구가 보인다. 복원후 모습도 상상해 보면서 안중근 의사 동상 앞에 도착 합니다. △. 안중근[安重根, 1879. 9. 2~1910. 3. 26] 안중군 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순흥, 아명은 응칠[應七]이며, 천주교 세례명은 토마스[도마]이다. 의사의 집안은 대대로 해주에서 세거한 전형적인 향반[鄕班] 지주였다. 고려 말 대유학자 안향의 후예로 조부 안인수는 진해현감, 부친 안태훈은 소과에 합격한 진사로 수천 석 지기의 대지주였던 것이다. 특히 부친인 안태훈은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문명을 날리고 있었는데, 의사는 바로 이 안진사와 그 부인 조[趙]씨 사이에 태어난 3남 1녀 가운데 장남이었다. 의사의 부친은 진사였으나 전통적인 유학에 머물러 있던 보수 유림은 아니었다. 그는 근대적 신문물의 수용의 필요성을 인식한 개화적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1884년 박영효등 개화세력이 근대 문물의 수용과 개혁 정책의 실행을 위해 도일 유학생을 선발할 때 그에 뽑히기도 하였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 해 12월 발생한 갑신정변의 실패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향하고 말았다. △. 남산 안중근 의사 동상 옆으로 기념관이 있다. 주변에는 1925년 일제가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성곽을 훼손했던 곳이다. 서울시는 2013년 한양도성 보존 관리 사업의 일환으로 이 일대를 발굴했는데, 발굴 결과 땅 속에 묻혀 있던 성곽의 기저부가 매우 양호한 상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발굴 유구는 조선시대 축성 기법과 석재[石材]의 변천 과정을 알려주는 소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 발굴지[조선신궁 터]는 사진을 담지 않았으며 지금은 발굴 완료하여 복원 계획중으로 현수막으로 가려져 있더군요.. 여기서 “조선신궁”에 관한 이야기를 알아 도록 하겠습니다. 조선신궁은 일본의 종교시설로 일제가 1918년 한양도성터에 건립하기 시작하여 1925년 완공했다. 조선신궁에는 일본 건국 신화의 주역인 아마테라스 오미가미와 1912년에 죽은 메이지 일왕을 안치해 한국인에게 참배를 강요했던 장소이며, 조선신궁은 1945년 9월 철거되었다. 이후 동,식물원, 도서관, 분수대가 설치 되었던 것이다. 지금은 분수대 철거와 함께 발굴 조사중이며 곳 한양도성을 복원할 것으로 보여진다. 실질적으로 틈사이로 들여다 보니 엄청난 건물터가 보이더군요. △. 이재는 “호현당[好賢堂]”이 자리하고 있는 백범 김구 광장으로 이동 합니다. 호현당에는 남산 성곽로의 축성과정, 역사, 안내도, 사진등으로 자세하게 불수 있는 전시장으로 창밖을 통해 서울 전경을 볼수 있는 곳으로 변모하여 한옥으로 역사관을 지어 관리소와 함게 자리하고 있다. △. 아래에 둥근지붕을 한 장소는 서울시 과학전시관이며, 윗쪽의 빌딩은 서울시 교육연구 정보원건물이 지금도 이렇게 자리 하고 있습니다. △. 예전 것들은 보이지 않는“백범 광장”이라고 불리는 장소 남산 야외 음악당과 아레로는 어린이 놀이터 있었던 장소였을 것으로 보여지는 장소가 이렇게 변모 하였답니다. 앞으로 보이는 호텔은 힐튼 호텔 입니다. △. 이곳은 “好賢堂”으로 자리 옮겨봅니다. 마당에는 산수유 나무 봄을 알리기 위한 꽃망우리가 한참 물올라 부워 있내요, 곧 터질것으로 보여주고 있더군요. △. 호현당 앞마당에서 남산 N타워를 바라보면 사진 남겨 봅니다. 이렇게 보면 호현당 자리가 예전에 과학 전시관 건물 바로 앞에 주차장 자리로 보이는 장소내요.. 이잰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였던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 앞으로 옮겨 봅니다. △. 백범 김구 광장 일대 남산의 백범광장 주변에는 백범 김구 선생 동상, 성재 이시영 선생 동상, 안중근 의사 기념관과 동상 등 항일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기념물이 많다.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신궁이 있던 곳으로, 일제 식민지배의 상징을 항일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대체한 것이다. 백범광장 일대의 한양도성은 일제강점기 조선신궁을 지을 때 모두 철거되거나 흙 속에 묻혔다가 최근 다시 쌓았다. 다만 지형 훼손이 심해 원형을 살릴 수 없는 구간에는 성벽이 지나던 자리임을 알 수 있도록 바닥에 흔적을 표시해두었다. 앞쪽으로 바라보면 일부 복원 부분도 보이고 있다. △. 저는 이번에 남산을 찾은것을 거슬러 생각해보게 하는 장소 입니다. 예전에는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 동상 하나가 보여 접근해 안내문을 살펴 보게 되었지요. 그러나 읽어보고 나서야 멀리 숙여 엄숙히 제를 표하게 되었지요. 이분이 바로 독림운동가 이며 “제1대 초대 부통령 이시영”동상 입니다. 조국에 목숨 바친 형제들 생각하며 광복의 날 뜨거운 눈물 흘리던 이시영[李始榮, 1869.12.3~1953.4.17]선생은 경주 이씨로 서울 저동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자는 성옹[聖翁]이요, 호는 성재[省齋] 혹은 시림산인[始林山人]이었다. 선생은 명재상으로 이름 높았던 백사 이항복의 10대손이니, 서울에서도 대표적인 명가 출신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게다가 부친은 우찬성․이조판서 유승[裕承]이며, 어머니는 동래 정씨[東萊鄭氏]로 이조판서 순조[順朝]의 딸이었으니 당대에도 명성을 고스란히 간직한 집안에서 태어난 것이다. 건영[健榮], 석영[石榮], 철영[哲榮], 회영[會榮], 시영, 소영[韶榮], 호영[頀榮] 등 7형제 가운데 다섯 째로 태어난 선생은 첫 부인으로 영의정 김홍집[金弘集]의 딸을 맞았으나 사별하고, 반남 박씨를 둘째 부인으로 맞았다. 선생은 일찍부터 관직생활을 시작하였고, 소용돌이치는 한말 정국 속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만 16세 되던 1885년[고종 22]에 진사가 되고 동몽교관에 임명된 뒤, 18세에 형조좌랑를 역임하였다. 이시영 부통령께서 발의한 기초 10개조 안의 법안 ※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 제2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야 차[此]를 통치함 ※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귀천과 빈부의 계급이 무[無]하고 일체 평등임 ※ 제4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신교,언론,저작,출판,결사,집회,신서[信書],주소,이전,신체와 소유의 자유를 향유함 ※ 제5조 대한민국의 인민으로 공민자격이 유한 자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유함 ※ 제6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교육 납세와 병역의 의무가 유함[하략] - 선생이 조소앙 등과 기초한 10개조의 <대한민국 임시헌장> 중에서 △. 역사적인 독림운동가 초대 임시정부 주석과 부통령에 대한 엄숙함을 느끼며 다시 설곽길을 내려 서게 되었답니다. 이자리는 남산 성곽 입구인 힐튼 호텔 주변으로 내려와 사진을 남겨 봅니다. 우축으로는 복원된지 얼마 안된것으로 보여주는 성곽을 보면서 아리 합니다. 또한 이자리 한켄에서 잠시 휴식을 하였지요. △. 이곳은 다시 횡단보도 앞에 서서 뒤돌아본 남산 입구 우축으로 성벽이 보인다. 횡단보도 건너면 흴튼 호텔 뒷편으로 남대문으로 내려 갑니다. △. 수난을 격으며 우여곡절 끝에 자리하게 된 숭례문[崇禮門] <국보 제1호> 한양도성의 남대문이자 정문이다. 1395년에 짓기 시작하여 1398년 완공하였고, 1448년에 개축하였다. 1907년 교통에 불편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좌우 성벽이 헐린 뒤에는 문화재로만 남았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었으나 2008년 2월 화재로 목조인 1층 약 10%, 2층 문루 약 90%가 소실되었다가 2013년 5월 복구되었다. 이때 숭례문 서쪽 16m, 동쪽 53m의 성벽을 연결하였다. ※ 숭례문 현판 : 현판의 글씨를 세로로 내려 쓴 이유는 숭례문을 마주하는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한 방책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달리 숭례문의 예[禮]가 사람을 바로 세우는 덕목이라서 그랬다는 설도 있다. △. 화재후에 복원 하면서 좌,우측으로 성곽을 복원하면서 신,구의 조합을 이루는 곳을 보니 마음 한켄에는 쓸쓸함을 느끼게 합니다. △. 이렇게 바라 보게되니 안스러움을 느끼게 하지만 죄스러움을 느끼 지기에 한참을 바라 보면서 구멍이 나있는 성벽돌을 보게 됩니다. 얼마나 수난을 격었는지를 느끼게 하면서 구멍이 날정도를 가늠해 보기도 합니다. 총을 맞은 흔적이라고들 하지만 구멍이 날정도를 생각해 보면 아마도 포탄을 맞았을 것으로 보여지면서 그럼 포탄을 사용하던 시기를 생각해 보면 6.25전쟁이 아닐까 싶내요.. 참으로 비극적인 동족간의 혈투로 역사를 그대로 앉고잇는 문화제 보전에 많은 관심이 필요한것 같기도 합니다.. 지금부터는 성벽길을 따를수 없게 되는군요. 지금부터는 약간의 성곽길을 글로써 설명드리죠. 먼져 숭례문 에서 북쪽방향으로 간너편 한국정보 통신 빌딩 옆길로 들어서면 지금은 담장을 성벽으로 그나마 남아있으며 울리브 타워 빌딩 까지는 남아있으며 그 이후로는 볼수 없습니다. 그러니 흔적이 남아있는 중앙일보사 사옥으로 돌아가면 보이는 건물터 앞으로 이동 합니다. △. 중앙일보 사욱 앞에 있는 소의문 터 [昭義門] 사소문 중 하나로 도성의 서남쪽에 있는 문이다. 1396년 도성과 함께 축조되었으며 처음 이름은 소덕문[昭德門]이었다. 영조 20년[1744] 문루를 개축하면서 소의문으로 이름을 바꿨다. 광희문과 함께 성 밖으로 상여를 내보내던 문이었다. 1914년 일제의 시구개수사업 과정에서 헐려 지금은 소의문 터였음을 알리는 표석만 남아 있다. ※ 소의문은 공포의 문이었다..? : 소의문은 광희문과 함께 도성 밖으로 상여를 내보내던 문이었다. 소의문은 사형수를 처형장으로 끌고 나갈 때에도 사용되었다. 소의문 밖 넓은 마당은 조선시대 사형 집행장이었다. 천주교 순교자들 다수도 이 문 밖에서 처형당했기 때문에 외국인들 사이에서는 순교자의 문으로도 불렸다. 현재 서소문역사공원 안에 있는 순교자 현양탑은 이와 관련한 기념물이다. △. 소의문터 옆으로 또 있는 임금을 호위 부대 있던 “시위 병영터[侍衛 兵營址]” 시위 병영터는 조선 후기에 임금의 호위를 위하여 조직된 시위대의 보병 제1연대 제1대대가 주든하던 곳이다. 시위대는 대한민국 선포 이후 전투부대로서의 명모를 갖추었으나 1907년 8월 일제의 강요에 의해 해산 되었다. 시위대의 해산은 군인들의 항일시위 투쟁이 벌어진 계기가 되었다. 라고 안내문이 되어 있더군요, 이런것들을 보면서 문화제를 회손 시킨 일본 사람들의 횡포를 아쉬움으로 남겨 본다. △. 중앙일보 사옥 앞에서 지나온길을 뒤돌아 담아 봅니다. 멀리는서소문 고가차도 있는 곳으로 보여진다. 이잰 이곳부터는 다음으로 포스팅 준비 됩니다 그러나 횡단보도 넘어 고려 삼계탕 음식점 골목으로 지나 배재학당 방향으로이동하여 덕수궁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은 다음 포스팅과 함게 알아보며 시간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성곽길을 서울시에서 얼마전 부터 완주자들에게 기념 뺏찌를 수여 하고 있더군요. 완주 과정을 각 지역마다 인증 스템프 설치 하여 트레킹 과정에 도장을 스스로 찍어 서울시에 제출하면 기념 뺏찌 주소지로 배달 되는것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과정을 준비 하지는 않았지만 다음에 하시고자 하는분들 인솔 하면서 함께 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러면서 저도 뺏찌를 하나 받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신 모든 분들에게 깊은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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