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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5】등록문화재 제90호 홍파동에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바이올리니스트 홍난파 가옥을 찾아 본다.

◈ Travelog/⊙ 고찰 문화재

by 순도리(칠이) 2015. 3. 2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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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문화재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홍난파 가옥



 

    ○ 홍파동 난파 홍영후 가옥 1920년 조선인 최초로 독주회를 열어 발표한 곡이 애수인데 이 작품이 바로 그를 유명하게 만든 봉선화의 원곡이다. 1929년 창작동요 100곡을 묶은 조선동요백곡집을 간행 1931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의 셔우드 음악학교에서 2년간 유학한다. 미국 유학 중에 흥사단과 인연을 맺어 흥사단원이 되었고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늑골을 다치게 된다. 1933년 2월 귀국하여 머문 곳이 바로 지금의 홍파동 홍난파 가옥이다. 작품으로는 23세 때 작곡한 봉선화와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고향의봄, 고향 생각 등 10여곡의 가곡을 남겼고 이 중 봉선화와 사공의 노래를 제외한 대부분의 가곡은 이은상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곡이다. 후세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친숙한 오빠생각, 나뭇잎, 개구리를 비롯하여 111개의 동요와 애수, 로망스 등 8개의 기악곡을 발표하였으며 여러곡의 영화 음악을 작곡하는 천재적 재능을 발휘하였다. 저서에는 세계의 음악, 조선 가요백곡집과 단편 소설집 처녀의 혼, 향일초, 폭풍우가 지난 후 등이 있다. 홍난파[1898~1941]는 일제강점기 널리 애창되던 가곡 <봉선화>와 <고향의 봄> <사공의 노래>와 동요 <오빠생각> <퐁당퐁당> 등을 작곡하였다 본명은 홍영후이고 경기도 수원에서 남양 홍씨 홍준의 8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홍준은 국악에 조예가 깊어서 집안 식구들이 거문고나 퉁소 등 전통 악기를 연주했는데 홍난파는 그 중 앙금을 연주했다고 한다. 1899년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한 후 교회를 다니게 되면서 서양 음악을 접하였고 그 영향으로 그의 사촌 형 및 조카들이 모두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었다. 1965년 10월 25일 대한민국 정부는 홍난파에게 문화 훈장을 추서하였다. 1968년 수원 팔달산에 노래비가 세워졌고, 1969년 8월 30일 홍난파의 추모일을 맞아 예총 경기도지회가 ‘난파음악제’를 연 이래 해마다 계속되고 있다. 그가 살던 집은 2004년 9월 4일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홍난파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집 앞에는 그의 흉상이 서 있다 1914년 16세의 나이로 김상운과 결혼하였고 조선 정악전습소를 졸업한 후 서양학부 교사로 활동하였다. 1918년 부인이 사망하자 깊은 좌절을 겪은 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동경 우에노 음악학교에서 음악공부를 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귀국하여 대한매일신보 기자로 활동했다.

 

. 여기는 어디...?

종로구 송월동 2-15번지 월암근린공원 경희궁 옆에 있는 공원으로써

최근에 돈의문 뉴타운 건설로 인한 문화재 손상에 대한 여론이 많이 나오던 곳으로

인근에월암동[月巖洞]이라는 암각문 손상으로 떠들썩 했었던 곳으로 또한 주변에 “홍난파 가옥을 찾아 갑니다.

 

 

 

 

 

. 홍난파 가옥은 서울 둘레길에 포함 되있으며

서울시 종로구 홍파동 2-16 위치하고 있는 홍난파 가옥을 찾아 갑니다.. 

 

 

 

 

 

월암근린공원에 함께 위치 하고 있는 야외 무대 설치 되어있으면서

가끔은 난파 동심 음악회도 이곳에서 열린다고 합니다.. 

 

 

 

 

 

. 홍파동 홍난파 가옥 [등록 문화재 제90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파동 2번지 16호, 시대 : 1930년대

 

“이 집은 지하 1층 지상 1층의 붉은 벽돌조 건물로 독일계통 선교사의 주택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근처 송월동에 독일 영사관이 있었기 때문에 이 일대에 독일인 주거지가 형성되었는데,

주변의 건물들은 다 헐리고 이 집만 남아 있다.

특히 이 집은 <고향의 봄>을 작곡한 홍난파가 6년간[1935~1941년까지] 지내면서 말년을 보냈는데

이 때문에 “홍난파 가옥”이라 부르고 있다.

홍난파는 이집에서 지내면서 그의 대표작 가운데 많은 작품을 작곡했다.

서쪽 길에서 대문을 통하여 마당 안으로 들어서면 계단을 따라 현관에 이르게 된다.

이 집의 지붕은 다른 서양 선교사 집보다 경사가 가파르며 거실에는 벽난로가 있다.

남쪽에 있는 현관과 이어지는 복도로 서쪽에 거실, 동쪽에 침실을 두었다.

이 집은 가파른 경사대지를 활용하여 북서쪽에 지하실을 두어 공간을 알뜰하게 활용하는 1930년대 서양인 주택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1층 동쪽에 있는 두 개의 침실은 황난파 기념관의 전시실로 사용하기 위하여 벽을 터 버림으로써 원래 모습을 잃어버렸다.”

 

라는 안내문이 설치 되어있어 인용해 봅니다.

 

 

 

 

 

. 열마전 까지만해도 홍난파 선생의

큰 따님께서 소유하고 있으면서 큰 따님의 아드님께서 이곳에서 해설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최근에 서울시에서 매입하여 관리하는 듯해 보이더군요... 

 

 

 

 

 

. 주변으로는 돈의문 뉴타운 개발로

혼잡하였으며 문화재가 손상이 될까 우려 스럽기도 합니다.

옛날 건물 치고는 고풍스런 유럽풍으로 지금도 아름답기만 한 건물이며 약80여년전 건물임을 알수 있을까요..?

보수 유지 덕에 이런 모습을 하고 있겠지만요... 본인도 좋아 하는 스타일입니다.. 

 

 

 

 

 

. 난파 홍영후 선생의 동상이 잇습니다..

 

홍난파상

 

“봉숭아를 비롯한 많은 가곡과 동요 100곡을 남기신 난파 홍영후[1898.4.10~1941.8.30] 

선생은 우리나라 맨처음 바이얼리니스트로 1936년에는 경성 방송 관현 악단을 창설하여 지휘하신 방송 음악의 선구자 이시다.

난파를 기리는 이들이 정성을 모아 그 모습을 새겨 여기 세우니 과연 인생은 짧아도 조국과 예술과 우정은 길구나.”

 

라고 세겨져 있습니다..

 

 

 

 

 

. 등록문화재 제90호 홍파동 홍난파 가옥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 서울시 교육감 지정 평생학습 협력기관으로써

 

“홍난파의 집”개관은

하절기 [4월 ~ 10월} 11시 ~ 17시 까지

동절기 [11월 ~ 3월] 11시 ~ 16시 까지

[주말 및 공휴일은 휴관]

☏ : 070 - 8112 - 7900[사무실], 010 - 3728 - 7419[운영자]

 

 

 

 

 

. 너무 늦은 시간에 방문하여 실내로 들어갈수 없었으며

내부를 관람하기 위해선 공휴일을 피해서 방문하여야 할것 같습니다..

저 또한 궁금하기도 합니다..

 

이곳은 한양도성 성곽길을 걷다보니 홍난파 선생의 가옥도 즐거움을 주는 관람지로써

많은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모든 불친님들에게 깊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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