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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6】남한 산성에는 장경사라는 사찰이 있어 지켜던 것으로 느겨진다.

◈ Travelog/⊙ 고찰 문화재

by 순도리(칠이) 2014. 12. 8.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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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 장경사[南漢山 長慶寺]



 

    ○ 장경사 (長慶寺)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남한산성[南漢山城] 안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남한산성 축성 때 팔도의 역승[役僧]들의 숙식을 위하여 창건한 사찰로, 그 당시에 있던 9개 사찰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사찰이다. 축성 당시 나라에서는 각성[覺性]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삼고 전국의 승려를 번갈아 징집하여 사역[使役]을 돕게 하였는데, 각성은 1638년[인조 16]에 이 절을 창건하였다. 효종이 북벌[北伐]을 계획하였을 때에는 이 절에 총섭을 두어 승군[僧軍]을 훈련시키는 한편, 성내의 8개 사찰뿐 아니라 전국의 승군을 지휘하는 국방사찰[國防寺刹]의 소임을 담당하였다. 그 뒤 고종 때까지 250년 동안 북한산성과 함께 이 남한산성에도 전국에서 뽑은 270명의 승려들로 교체하면서 항상 번승[番僧]을 상주입번[常駐立番]하게 하였다. 이는 조선시대 승병들의 국방활동의 일면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되고 있다. 이 절의 당우로는 동향한 정면 3칸의 대웅전을 비롯하여 진남루[鎭南樓], 칠성각, 대방(大房], 요사채 등이 있다. ○ 참고문헌 『한국사찰전서[韓國寺刹全書]』[권상로 편,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문화유적총람[文化遺蹟總覽]』[문화재관리국, 1977] ※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남한산성 동문 안에서 동북쪽 약 500m 거리의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으며, 경내는 널찍한 공간이 있어 승병들의 훈련장으로 이용되었던 장소이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 15호로 지정된 장경사는 대웅전과 종무소, 산신각, 종각, 요사체 2동, 탑 등으로 구성되어 사찰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9개의 사찰 모두가 일제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적게 참화를 당한 장경사 하나만이 당사의 모습을 일부나마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절 뒤에 철쭉이 많고 노송 숲에서는 송이가 난다. 진남루 남쪽에는 망대가 있으며 올라가 보면 그윽한 경치가 여러 절 중에 으뜸이다.

 

. 장경사는 남한산성이 인조 2년[1624]에 축성이 시작되고

인조 3년[1625]에 전국팔도의 승군[僧軍]을 동원하여 사역을 돕게 하면서 승군들의 숙소을 위하여

전부터 있던 망월사[望月寺], 옥정사[玉井寺] 외에 인조 16년[1638] 개원사[開元寺], 한흥사[漢興寺],

국청사[國淸寺], 천주사[天柱寺], 동림사[東林寺], 남단사[南壇寺] 등 새로운 사찰을 창건하였는데

그때 함께 창건되어 오늘날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찰이라고 한다.

 

 

 

 

. 댜웅전 앞마당에 있는 요사체 건물“장경사[長慶寺]”라 현판 되있다.

신축년 8월 9일에 “석강[石岡]”이라는 분이 쓴것이라 한다, 신축년은 1961년을 말하는것 같다.

툇 마루에는 1915년[을묘년]생 박태준 씨가 시주 하였다는 중종[中鐘]이 걸려 있다.

또한 대웅전 서쪽에 요사체 하나더 있다, 그곳에는 “심향당[心香堂]”이라 편액 되어 있으면서

심향당 한컨에는 “무량당[無量堂]”이란 현판이 독득한 글씨체의 현판이 하나 걸려있다. 바로 그것은

원광대학교 “효봉[曉峰] 여태명[余泰明]”교수의 글씨라고 한다.

무량당은 심향당과 함게 스님들의 거쳐라 한다.    

 

 

 

 

. 무심당[無心堂]

 “청량산진남루중건상량문”에 의하면 폐허가 된 개원사의 누각를 옮겨 1909년에 장경사에 진남루[鎭南樓]를 중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장경사는 1975년 화재로 전각이 소실된 적이 있어 그때 진남루가 소실되어 새로 지은 건물인 것 같다.

경사 바로 옆 망월사 일주문에는 “淸凉山 望月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어 남한산을 청량산으로도 부르는 것 같다.

 

 

 

 

. 범종각

대운전 서쪽에 있는 범종각에는 1985년에 조성하여“호국의 종”으로 명명된 범종이 걸려있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때 침입 2달도 안되어 한양이 함락되어 인조 임금이 피난을 왔던 곳이며 결국 삼전도의 굴욕을 겪어야 했다.

장경사 역시 남한산성 축성을 위해 지은 절이니 “호국의 종”이란 별칭이 어색하지 않다.  

 

 

 

 

. 대웅전

근대에 새로 지은 건물로 내부에는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좌보처에 관세음보살, 우보처에는 지장보살을 봉안 하였다.

가장 화려하게 지어진 고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대웅전 지붕은 겹처마를 두른 팔각지붕이며

다포양식의 정면 3칸, 측변 3칸의 건물로 측변의 칸보다 약간 좁아서 건물의 전채 평면을 장방향을 이룬다. 

 

 

 

 

. 마니차[經桶] 번역하면 “경통”이다.

장경사는 조계종에 속해 있는데, 티벳 불교에서나 볼 수 있는 마니차[經桶]가 마당 한쪽에 설치돼 있었다.

경통이라고도 부르는 이걸 돌리면 빙빙 잘 돌아가는데, 구리나 놋과 같은 재질에 새기진 않고

그냥 불경을 복사해 비닐을 씌워 놓아 크게 볼품은 없었다.

그래도 다른 절에선 쉽게 보기 어려운 신기한 풍경이었는데, 한 바퀴 돌릴 때마다

불경을 한 번 읽었다거나 기원한 게 바람결에 하늘로 올라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도 사찰에 다라 이와 비슷한 개념의 윤장대[輪藏臺]가 설치 된곳이있고

특히 예천 소백산 용문사 대장전에는 보물 제684호인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윤장대[輪藏臺]가 있다. 

 

 

 

 

. 삼성각

대운전 동쪽 언덕에 위치에 삼선각이 세워져 있다.

내부에는 칠성탱화, 독성탱화, 산신탱화와 함께 독성상, 산신상을 봉안해 놓았다. 

 

 

 

 

. 고종 31년[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승군제도 폐지 될때까지

전국에 뽑힌 승군들 270여 명의 승려들이 교대로 산성을 보수하거나 경계하는 역할을 수행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옛날에는 승려들도 징집 제도가 있었다는 이야기 남한산성의 중요한 부분이였기에 징집이 되었을것이다..  

 

 

 

 

. 대웅전 앞마당에는 오래된지 않아 보이는 탑이 하나 서 있습니다.

“팔각구층석탑”1995년에 동화식품 김태호 씨가 시주로 세워진 불탑 이라고 합니다.. 

 

 

 

 

. 장경사 대웅전 편액 입니다..

언재쯤 지어졌는지 알길 없으며 아마도 1975년 재 건축 당시 지어지지 않았나 생각이 되는것 뿐이다. 

 

 

 

 

. 장경사[長慶寺]는

1983년에 제15호로 광주시에서 지정되었고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위치한다.

남한산성 동문 안에서 동북쪽 350m 거리에 있는데, 남한산성 안의 10개 사찰중에 경치가 가장 수려하다.

1624년 남한산성 수축때 승군의 숙식과 훈련을 위해 건립한 것으로 축성 후에

이곳에 승군을 주둔시키고 성을 지키는 훈련을 하던곳이다.

남한산성의 수비와 관련하여 장경사는 중요한 거점이었기 때문에 신지웅성[信地瓮城]의 수어를 담당하였으며,

포루와 암문 등이 주변에 설치 되어있다. 

 

 

 

 

. 구절초 만이 지난 세월을 대변하는듯 가을지나 초겨울에도 꽃을 피웠내요... 

 

 

 

 

. 일주문 나오던길에 뒤를 돌아보게 하는것이 있었다.

일주문 기둥을 보면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목을 그대로 이용하여 일주문을 세웠으며 일주문 현판으로는

“남한산 장경사[南漢山 長慶寺]”라고 걸어 놓았으며 일주문 입구에는 차량을 주차해 놓았지만 들어가면 주차장이 마련되있다. 

 

 

 

 

. 남한산 장경사[南漢山 長慶寺]

 

현재 장경사는 경기도 문화재 자료 15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창건당시의 모습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유물은 많지 않으며, 건물들은 모두 후대에 증수된 것들이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무심당, 범종각, 삼성각, 심향각과 요사 1채가 있으며,

그밖에 팔각구층석탑 1기가 있다.

모두 근래에 들어와 지어졌으며 장경사라 쓴 편액이 걸려 있는 요사채가 가장 오래된 건물로서 옛 모습을 전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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