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양 송강누리길 송강정철 시비공원
△. 이곳은 너멍골 주유소 아래 원신동 동사무소 입구에 있는 정류소 이정표 입니다. 요상하다. 원신동,,? 신원동..? 누가 틀린걸까요.?
△. 원신동 동사무소 앞에서 송강정철시비 공원 방향으로 내려와 뒤돌아본 사진입니다.
△. 이쪽 방향은 시비 공원 방향으로 진행 방향이 된다. 그런대 감나무집 간판만이 보인다. 주차된 부분이 송강 마을 입구이벼 그 앞으로가 송강정철 시비 공원이다.
△. 이렇게 보면 쉽겠죠.. 이곳이 송강마을 입구 이변서 송강 문학관 들어가는 입구가 된다. 먼져 송강 문학관을 들어갑니다. 도착과 먼져 안내문을 읽어 봅니다. 늘 관광지 도착 하면 우선적으로 안내문부터 읽어보면 많은 도움이 된다.
△. 가사문학의 거장 정철 선생 조선시대에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 가사문학의 거장 송강 정철선생을 아시죠..? 정철선생은 서울 장위동에서 출생했지만, 고양땅 신원동에 부모님의 묘소가 있어 10여년을 머물면서 풍류를 읊으며 많은 작품을 남겼답니다. 지금은 덕양구 신원동 송강마을엔 그의 자취를 기념하는 송강 문학관과 시비가 있고 공릉천엔 송강보 등 많은 자취가 남아 있습니다. 고양시에서는 2003년 부터 매년 “송강 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답니다.
△. 송강 문학관 관장님 “이은만[73]”선생님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듣습니다. 고양시 향토사학자로도 계시면서 고향땅인 고양에서 서울 유학 당시 성동고 2학년때 주어진 과제 찾아 동내 뒤산에 고려의 마지막왕인“공양왕릉”을 찾아 과제 수행하던중 잘려나간 비석의 윗부분을 찾으면서 과제물을 보고 역사 선생님의 총명을 받으면서 그길로 사학계로 진출하여 고양 향토사학자로 남아 현재는 “문봉서원”복원사업에 여념이 없으며, 고양시를 빛낸“자랑스런 고양 100인선 광복후”편를 출간하였다. 1988년 고양문화원장, 1989년 고양신문 9년간 발간, 1991년 고양시 향토문화연구소 설립하고, 송포 호미걸이, 정발산 도당굿, 공양왕릉, 고릉제 봉행, 송강문화제 등 우리 전통문화를 되살려 새 생명을 부여하는 일들을 해왔다.
△. 송강 문학관 마당에는 이미 가을을 맞이하고 있내요. 저를 반기듯 코스모스가 손을 흔들고 있습니다..금년에는 유난히 코스모스가 아름다운것 같내요..
△. 건물을 사비로 지으셨으며 한컨에는 서재로써 문학관련 서재를 정리중이라고 하시던군요. 현재는 두분 사모님과 함께 살고 계시는 건물을 문학관으로 사용 하고 있습니다. 또한 원장님께서는 최근에 종양 수술을 하시고는 건강 관리중이라 하시더군요. 완쾌되시길 정중히 인사 올립니다..
△. 송강 문학관 옆으로는 송강고개 뒷편에는 매봉 매봉산에는 송강의 부모묘, 형재묘 등이 있으나 특이 한것은 “강아묘”가 있다. 강아라 ~ 눈군가..? 송강이 전라관찰사로 재임할 때 그를 사랑한 남원의 어린 기생 자미가 있었다 한다 송강이 자미를 사랑하자 사람들은 송강의 강자를 따서 강아라 불렀다는데 송강의 사랑스러운 첩이라고 할까. 송강이 임금님을 모시는 도승지로 떠나면서 지어주었다는 시를 보자
자미화를 노래함
봄빛 가득한 동산에 자미화 곱게 펴, 예쁜 얼굴 옥비녀보다 곱구나, 망루에 올라 장안을 바라보지 마라, 거리에 가득한 사람들, 모두 다 네 모습 사랑하리니,
시를 보니 다른 남자들이 노릴까봐, 질투하였나 보다,
그뒤 강아는 어떠하였을까, 정철을 찾아 강계로 찾아갔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장 소서행장을 유혹, 주요 정보를 빼내어, 평양성을 탈환했다는데 미인계를 썼다..... 믿거나 말거나
그후 머리깎고 스님이 되었다가 정철이 죽자 정철의 묘소곁에서 일생을 보냈다 한다 박종화 선생이 연재한 조선일보의 “자고가는 저 구름아”에 나온단다
△. 사진으로 송강고개를 남기면서 우축 마당은 송강문학관의 마당입니다. 언재 또 시간이 허락 한다면 송강 가족묘지와 월산대군 묘지도 함게 찾아 볼것을 약속 드리며, 다음목적지 송강 정철 시비 있는 곳으로 돌아 갑니다..
△. 송강마을 중앙로 좌축으로는 갈비마당 음식점이 자리가고 있습니다.. 이 골목길을 들어가는 입구에 시비가 있는 곳이다.
△. 송강 시비공원에 도착 하였습니다.
△. 공원이라기 보다 시비 전시장...? 이곳이 송강 마을 입구 이기도 하며 구도로와 신도로 사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 석주시비 건립 위원회 막강해 보이는 문인들이 함께 모여 건립하였군요.. 전면에는 <과송강묘[過松江墓]> 석주 권필의 시가 쓰여 있으며, 후면에는 송강과 석주의 인연이 적혀있다.
△. 過松江墓有感[과송강묘유감] 정 송강 유택을 찾아서, [석주 권필]
空山木落雨蕭蕭[공산목락우소소] 낙엽 진 텅 빈 산 빗소리 스산 한데, 相國風流此寂寥[상국풍류차적요] 풍류 대상 말없이 여기 누의셨구나, 惆悵一杯難更進[추창일배난갱진] 슬퍼라 한 잔 술 권해 오릴 수 없음이여, 昔年歌曲卽今朝[석년가곡즉금조] 지난 날 장진주사 인 날을 이름이 셨구려,
라고 읊은시가 있다. 정철이 문인으로 알려진 정철의 묘소를 지나면서 권필이 읊은시를 이곳에 시비를 건립해 놓았습니다.
△. 송강[松江]과 석주[石州, 1569~1612]의 인연 천하의 영제를 얻어 가르치는 것을 군자삼락[君子三樂]의 하나라고 한다지만 천하의 스승을 만나 섬길 수 있는 것은 천하의 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 못지않은 기쁜이리라 송강과 석주는 서로에게 즐거움이 되는 그런 사이였다. 여기 앞에 새긴 과송강묘[過松江墓]는 석주가 이 마을에 있던 송강묘소를 찾아와 지은 추모시[追暮詩]로 조선시대 한문학사에서는 길이 남을 명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석주의 묘소도 여기서 그리 멀지않은 고양시 성석동[城石洞] 상감천에 있다. 여기 길이 남을 명작 한 수를 돌에 새겨 지나는 길손에게 보인다. 라고 쓰여 있습니다.
△. 송강시비 건립 위원회 막강한 인물들이 하셨군요..
△. 송강[松江] 정철[鄭澈] 작품비 내용을 읽어본다.. 송강은 관동별곡 등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가사와 훈민가 등 시조를 남겼으며, 시풍은 호탕하고 비장하며 가사와 단가에서는 한문투를 벗어나 자유자재로 우리말을 구사하여 한글을 가장 아름답고 쉽게 펼친 시가문학의 대가다 송강은 시묘살이를 이곳에서 하면서 왕성한 작품구상도 하였다 충효사상과 공선후사의 공복정신을 기리고 우리 시가문학의 창의성과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자 훈민가 시비를 세워 만세의 귀감으로 한답니다.
△. 훈민가[訓民歌] 송강 정철 아바님 날 나흐시고 어마님 날 기르시니 두 곳 아니면 이 몸이 사라시랴 하늘갓튼 가업슨 은덕[恩德]을 어데 다혀 갑사오리. 어버이 사라신 제 셤길 일란 다하여라. 디나간 후면 애닯다 엇디하리 평생[平生]애 곳텨 못할 일이 잇뿐인가 하노라. 마을 사람들아 올한 일 하쟈스라 사람이 되어나셔 올치옷 못하면 마쇼를 갓 곳갈 씌워 밥머기가 다르랴. 남으로 삼긴 듕의 벗갓티 유신[有信]하야. 내의 왼 일을 다 닐오려 하노매라. 이 몸이 벗님 곳 아니면 사람되미 쉬울까.
부생모육[父生母育], 자효[子孝] 부모님에 대한 효도를 권유함, 향려유례[鄕閭有禮]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할 것을 강조함, 봉우유신[朋友有信] 벗과의 바른 관계[나의 잘못을 바로잡아줌]를 강조함
△. 송강 정철선생의 훈민가[訓民歌]는 총 각16수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4수 많이 소개 되어 있습니다.. 선영회 시비 설립 취지와 목적
△. 송강 마을도 이렇게 소개 되어 있으나 그냥 시비 한켄에 나둥굴고 있내요 아쉬운 부분으로 저의 개인 생각에는 마을분들의 불충으로 보여지내요.
△. 후면에는 송강 문학관 관장님 송강 시비를 만들면서.. 송강정철 선생의 약력과 함께 취지를 설명되어 있습니다.
△. 정철 선생의 훈민가 중에 한 대목이 쓰여 있내요. 세원 원주 되어 시비[詩扉]를 고쳐 닫고, 유수[流水] 청산[靑山]을 벗 삼아 던졌노라, 아해야 벽제[碧蹄]에 손이라거든 나 나갔다 하구려, 1997년 5월 송강시조 문영오 쓰다. 라고 쓰여있다.
△. 송강 정철 시비 공원의 전경입니다 이잰 이어 송강 누리길을 따라 갑니다. 이어서 보여주는 송강보에 관한 이야기 기대 됩니다.
△. 이곳은 공장터가 있는 곳이지만 송강 문학관에 있는 설명 대로라면 여기가“송강안”마을쯤 되는 곳이다..
△. 실개천을 따라 가다보면 이런 막다른 길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곳에도 이정표 있으면서 도로 바닥에고 송강 누리길임을 표시해 놓았습니다.
△. 이정표 포시와 도로 바닥표시 따라 진행 하면 됩니다..
△. 이정표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송강정철시비 있던곳에서 0.21km되는 지점이다.
△. 실개천 소하천이라고 하면서 이름은 능골천이라고 한다. 아마도 능골마을에서 발원하는 개천이기 대문일것이다. 앞전 포스팅에서 월산대군 사당 있는 마을을 말한다.
△. 능골 하천을 뒤돌아 담아 본다. 이장면애서 우축으로 보이는 작은 막사있는 곳은송강문학관 설명 지도에 나온대로 라면 “두암”이라는 곳이다. 물론 그 우축으로는 옛날부터 송강 낚시터가 최근 까지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낚시 좋아 하시던분 들은 이곳을 잘 알것이다.
△. 능골천 끝나는 부분으로 철길이 잇으면서 밑으로는 자동차 지나다 보니 높이 제한 막을 설치해 놓았군요, 이곳을 지나면서 부터는 다시 공릉천 길을 따라 진행 합니다.
△. 이잰 철길 밑으로 통과 합니다. 그런대 간판이 눈길을 끄내요. [풀렌테이션] 크게 안내해 놓은것을 보면 예상치 않습니다...
△. 송강보 앞에 있는 송강의 시가 한구절 있내요. 송강 정철[松江 鄭澈] 내 마음 베어내어 저 달을 만들고저 구만리[九灣里] 장천長天]에 훤하게 걸여[려]있어 고운 임[님] 계신 곳에 비추어나 보리라,
아래에는 송강 정철 선샌의 약력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 “어도 이야기” 이것은 송강보 복원하면서 어도를 만들게 되어 설명해 놓은것 같습니다..
△. 이렇게 세워져 있습니다..주의를 살피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문을 하나 보게 될것입니다. 바로 그곳이 풀렌테이션 켐핑장이더군요.. 예전에 힐링켐프 기성용편을 촬영한 곳이라고 하더군요.. 지나면서 들여다 보겠습니다.
△. 바로 이곳이 송강 정철은 송강마을에서 살면서 풍류를 즐기며 낚시를 즐겨다는 공릉천 “송강보[松江潽]”입니다. 지금은 복원하여 농사용 농수로 사용하는듯합니다.
△. 이곳에는 안내판이 하나 있내요.. 살펴봅니다. 읽어보니 송강보 이야기는 한구절도 없내요, 송강보 이야기는 문학관 관장님에게 이야기 들은 내용이거든요... 그럼 이곳이 맛는지는 윗 사진을 살펴 보시면 송강정철 시귀와 어도 이야기 있는 갈림길 안내판 서있는곳 중에 2개 사이로 작은 안내판이 바로 송강보 공사개요라는 간판에도 송강보가 나와있습니다.. 그래서 송강보 이야기를 아무리 찾아 보았지만 자료가 너무 부족함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였습니다..
△. 헐..! 요즘도 수영을.. 많이 추울터인대 하긴 낮기온은 여름 날씨라서,, 어린이들은 춥지도않은것 같내요.. 이 다음엔 저 어린이들은 송강보 이야기를 나누겠죠..?
△. 오늘 포스팅은 송강보의 아쉬움을 뒤로 하기위해 한장더 담았습니다. 저 철길로 서울 교외선으로 2004년까지 운행 되었었지만 이후로는 화물선만 간간히 운행 되는 철로로써 이렇게 남아 있는것만 으로도 옛날의 흔적을 상상해 보게 되는것 같습니다.. 오늘 코스중에 제일 중요한 부분을 감상하며, 송강 정철 선생의 흔적은 전남 담양에 있는 식영정과 가사문학 박물관에서 처음 접했지만 이렇게 가까운곳에서 흔적을 찾을수 있었다는것 으로도 즐거운 하루된듯 합니다. 다음에는 송강 정철 선생의 가족묘 등을 다시 찾아가 볼것을 약속 드리며 마무리 합니다. 다음 포스팅은 송강보에서 필리핀 참전비 까지 이어 집니다.. 요즘 환절기로 건강 조심들 하셔요...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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