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심속에 비밀정원 백사실 계곡 △. 앞전 포스팅에 이어 백사실 계곡을 찾아가 봅니다. 이곳 이정표 있는 곳은 부암동에서 내려와 능금마을 방향으로 올라가면 백사실 게곡 상류지점이며 별서터 방향으로 오늘 포스팅 됩니다.. △. 이정표 있는 곳의 길을 함께 담아 봅니다. 부암동은 군부대 있던 방향으로 G-HOUSE 있던 곳으로 우리가 들어온 방향입니다. △. 지금 부터는 가깝게 자리하고 있는 벌서터 방향으로 조금 내려 섭니다. △. 이재 보이기 시작하는 별서터 백사실 계곡이라는 이름 조차가 이 터를 기준으로 이름을 붙여진것 이라고 합니다. △. 별서터 만나면서 솟대는 손님 맞이 합니다. 솟대의 의미와 변천사에 관한 이야기들 한번 읽어 봅니다. △. 계곡에 흐르는 물이 적어 느낌을 받을수 없었지만 울창한 숲속에 이런 자리 하고 있는것을 보면 “백사 이항복선생”의 일대기를 가늠하게 되기도 합니다. △. 백사[白沙] 이항복 [李恒福] 1556[명종 11] ~ 1618[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임진왜란 때 병조판서를 지내면서 많은 공적을 세웠으며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본관은 경주[慶州]. 일명 오성대감[鰲城大監]. 자는 자상[子常], 호는 필운[弼雲], 백사[白沙], 동강[東岡], △. 백사[白沙] 이항복 [李恒福] 초년은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참찬 몽량[夢亮]이고, 권율[權慄]의 사위이다. 9세에 아버지를, 16세에는 어머니를 여의었다. 1574년[선조 7]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1580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1583년 대제학 이이[李珥]의 천거로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그뒤 정자, 저작, 박사, 봉교, 수찬, 이조좌랑 등을 역임했다. 선조의 신임을 받아 직제학, 우승지를 거쳐 1590년 호조참의가 되었고,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처리한 공로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 좌승지로 재직중 정철[鄭澈]의 죄를 처리하는 데 태만했다 하여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으나 곧 복직되어 도승지에 발탁되었다. △. 백사[白沙] 이항복 [李恒福]의 임진왜란 이후 활동영역을 보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승지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위해 오성군[鰲城君]에 봉해졌으며, 두 왕자를 평양까지 호위해 형조판서에 특진했고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했다. 조정에서 왕에게 함흥으로 피난하기를 청했을 때 함흥은 명나라와 교통할 수 없으므로 영변으로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또한 이덕형과 더불어 명나라에 속히 구원을 청하기를 주청했고 윤승훈[尹承勳]을 해로로 호남지방에 보내어 근왕병[勤王兵]을 일으키게 했다. 명나라에서는 조선이 왜병을 끌어들여 명나라를 침공하려 한다는 의혹을 가지고 있었으나, 병부상서 석성[石星]의 조사 후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고 군대를 파견했다. 1593년 세자[뒤의 광해군]가 남쪽에 분조[分朝]를 설치하고 경상도와 전라도의 군무를 맡아볼 때 대사마[大司馬]로 세자를 보필했다. 다음해 봄 전라도에서 송유진[宋儒眞]의 반란이 일어나자 여러 관료들이 세자와 함께 환도를 주장했으나 이에 반대하고 반란을 진압했다. 이후 5차례에 걸쳐 병조판서를 지내면서 군을 정비했다. 그뒤 문홍도[文弘道]가 유성룡[柳成龍]이 휴전을 주장했다고 하면서 탄핵하자 자신도 휴전에 동조했다며 사의를 표명했으나 도원수 겸 체찰사에 임명되어 남도 각지를 돌며 민심을 선무했다. 1600년 영의정에 오르고 다음해 호종공신[扈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1602년 정인홍[鄭仁弘], 문경호(文景虎] 등이 성혼[成渾]이 최영경[崔永慶]을 모함하고 살해하려 했다고 하며 성혼을 공격하자 성혼의 무죄를 변호하다가 정철의 당이라는 혐의를 받아 자진하여 영의정에서 사퇴했다. 1608년 다시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광해군 즉위 후 정권을 잡은 북인이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臨海君]을 살해하려 하자, 이에 반대함으로써 정인홍 일당의 공격을 받고 사퇴의사를 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뒤에도 북인이 선조의 장인 김제남[金悌男] 일가를 역모혐의로 멸산시키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하는 등 정권 강화작업을 벌이자 적극 반대했다. 1613년[광해군 5] 다시 북인의 공격으로 물러났으나 광해군의 선처로 좌의정에서 중추부로 자리만 옮겼다. 1617년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1618년 관직이 삭탈되고 함경도 북청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그해 관작이 환급되고 포천에 예장되었다. 저서로는 <사례훈몽 四禮訓蒙>, <주소계의 奏疏啓議>, <노사영언 魯史零言>, <백사집>, <북천일록 北遷日錄> 등이 있다. 포천 화산서원[花山書院], 북청 노덕서원[老德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 이곳이 바로 “백사 이항복의 여름별장터”로 알려진 별서터입니다. 그러나 이항복의 별장터인지는 확증이 없다고 합니다. 다만 자신의 호를 백사[白沙]라고 지을 만큼 좋아했다다는 것만 알려져 있다고 한다. △. 지금 남아있는 곳중에 이곳은 울탈 부분으로 모여지는 돌담과 안채, 사랑채, 연못, 있으며 연못에는 정자의 주춧돌이 남아잇다. △. 울타리 넘어에서 사랑채 부분을 인증해 본다.. 울창한 숲이 너무 마음에 쏠린다. 우축으로는 안채 있었을 것을 추축해 보면서.... △. 바로 앞에는 안채가 있었던 곳으로 보여지나.. 어디까지 추축일뿐 정확하지는 않타 또한 이곳은 최근들어 뉴스를 살펴 보면 이곳도 백사 이항복 선생의 별장지라고 말할수 있는 증거들은 없으며 추사 김정희 선생께서 구입하여 건축하였다는 증거가 나왔다고 하더군요,, 어떤것이 맞는것 이든 이런곳에 별서터가 있다는 조차도 멋진곳이라 생각하며 정확한 정보가 앞으로 문화재청의 발표를 기대해 봅니다. △. 지금은 물이 메말라 보잘것 없는 게곡이지만 수량이 많은 시점에는 울창한 숲과 어울어진 계곡 물소리 멋진 화음이 될거란 상상해 보기도 합니다. △. 육각형 정자 주춧돌만 남아있는 연못터, 정면으로 높은 곳에 건물터가 보인다. 연못 위 높은 단에 남아있는 건물터. 돌출부분은 누마루였던 것으로 보이며 제법 큰 규모의 건물로 보여진다. △. 이처럼 경치 좋은 곳에 사대부들이 심신 수양과 휴식, 학문 등을 위해 지어놓은 정자나 별장을 별서명승[別墅名勝]이라고 한다. 부암동에는 이 밖에도 대원군의 별장 석파정, 안평대군의 무계정사 터, 반계 윤웅렬 별서, 세검정, 창의문[자하문], 탕춘대 터 등 왕족과 사대부의 별장과 정자가 곳곳에 있다. △. 축조 당시 암반을 자르기 위해 구멍을 뚤렀것으로 보여지는 커다란 바위를 바라보며 이잰 아래로 내려가 봅니다. △. 신영동[세검정] 방향으로 내려 갑니다. 능금마을은 부암동 방향에 있습니다. △. 별서터를 둘러보고 계속 계곡을 따라 신영동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중간에 현통사라는 작은 절을 만납니다. 현통사 앞 너럭바위 위를 흐르는 계곡물이 멋집니다. 현통사 안의 제월당[齋月堂]이라 적힌 현판의 달 월[月]자가 옆으로 누워있는 것이 특이합니다. △. 현등사 일주문 앞에서 백사폭포를 담아본다, 다리는 백사실 계곡으로 올라가는 다리로 그아래로는 게곡이 이어진다. 잠시 현통사를 관람해 봅니다. △. 불교문화 철학자인 일붕 서경보 스님이 묵었었다는 현통사 작은 사찰로 보여지지만 갖출것은 모두 갖춘것 같습니다. 돌계단 위, 정면으로는 대웅보전[大雄寶殿]이 먼져 보인다. △. 대웅보전 앞 마당에는 인왕산 방향으로 [서쪽방향] 좌우로 부도탑으로 보여지는 탑이 양쪽으로 자리 하고 있습니다. △. 여기는 제월당 앞으로 있는 삼층석탑이 있으며 뒤로는 범종각이 보인다. △. 작은 공간에 모든것 들이 자리하여 있습니다. △. 현통사에는 각 건축물에 주련이 걸려 있으며 특이하게 제월당[齊月堂]에는 월[月]자가 누워 있는것을 볼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기도중인 주지 스님을 기다려 여쭈어 보기로 합니다 현판 하시던 스님께서 재미로 월자를 누워 있게 쓰셨으며 아무런 의미는 없다고 하시더군요... 그러시면서 지나는 사람들이 들어와 자주 여쭌다고 합니다. △. 칠성각[七聖閣]도 바로옆에 자리하고, 뒤로는 삼신을 보셔놓은 삼신각[三神閣]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 대웅보전 앞으로 들어가 봅니다. 기도중인 스님 여쭙기위해 잠시 기다립니다... △. 대웅보전 내부에 보셔진 부처님들 인증 남겨 봅니다. △. 대웅보전 앞에서 바라본 인왕산 즐기 좌축으로 능선을 올르면 인왕산 정상에 도달 하게 된다. △. 이재서야 눈치챈 집사 견보살[犬寶薩]이라고 하더군요.. 저를 보고는 마구 짙어 대더군요.. △. 이재는 현통사를 빠져 나왔습니다. 삼각산 현통사[三角山 玄通寺] 일주문 옆으로는 사진에 잘 않나와 올리지는 못 하였으나 일봉 서경보 스님의 애국시가 쓰여져 있더군요, △. 일붕 애국시[一鵬愛國詩] 백석청류동[白石淸流洞] = 백석의 맑은 물은 마을에 흘러들고, 간화청조성[看花聽鳥聲] = 꽃을 바라보는데 새들의 노래 소리가 들려오내, 이렇게 아름다웠을 백사실 계곡이 지금은 어찌된것일까. 민가가 가까이 까지 올라와 있내요. 도심 발전으로 생겨난 현상 이겠죠..? △. 백사폭포[白沙爆布] 도심속에 흔치않은 자연폭포 작지만 멋드러진 하얀 반석[盤石]이 일품으로 보여지며 일붕 서경보 스님이 머물렀다는 원통사 앞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 급하게 흘러가는 백사골 하류폭포는 주택들 사이를 흐르며 보잘것 없어 보이지만 주택들이 없었던 옛날을 생각해 본다면 백악산에서 발원한 백사골이 오랜세월을 두고 빚어낸 대작품으로 백사폭포와 더불어 기림같은 풍경을 자아내며 별천지를 꿈꾸며 찾았을 옛날 선비와 양반들은 그마음이 더했을 지도 모른다. △. 백사골 주택가 에는 야생화들을 가꾸고 있더군요.. 보라색이 더 아름다운 비비추꽃도 이슬비 맞으며 반기고 있으면서 백사실을 찾는 손님들을 맞이한다. △. 계곡 중간에서 멀리 인왕산을 조망해 보기도 하면서 백사실 계곡을 계속해 탐방해본다. △. 흰색이 줄줄이 피어오른 꽃범의 꼬리꽃 야생화도 아름답구요... 청춘, 젊은날의 회상 이라는 꽃말을 지니고 있다. △. “물옥잠화”도 이렇게 꽃을 피웠습니다. 꽃잎에 물방울 머금은 모습이 단아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 신부 머리에 꼭은 쪽두리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 “쪽두리꽃” 쪽두리꽃은 다양하게 많은것 같내요.. △. 이렇게 약100M쯤 이어지다 다리밑으로 들어가 소진되어 다시 홍재천으로 흘러 한강물로 합류 하게 된다. △. 하류 지점으로 홍재천 가까이 나오면 만나게 되는 불암[佛岩]석 일붕 서경보[一鵬 徐京保] 스님의 일봉선원 입구에는 불암[佛岩]이라 씌여진 표석이다. 향간전설[鄕間傳說]에 이 돌은 부처바위라고 전[傳]해왔다. 오래동안 땅속에 매몰되 왔다. 이재 동민 유지들이 다시 일의켜 세웠다. 다시 시로써 영원히 기록을 남긴다.
△. 이렇게 백사실 계곡을 빠져 나왔습니다.. 사진상 우축으로는 홍재천 입니다. △. 신영교 앞 편이점 우축으로 가면 백사실 계곡으로 가는 입구 나온다. △. 신영교 를 보면서 평창동 방향으로 담은 사진 입죠. 홍재천도 함께 담았습니다. △. 신영교 건너편으로는 버스 정류장이 팔각정 앞에 마을버스 정류장이다. 세검정로 세검정 초등학교 앞 정류장입니다.. △. 팔각정 앞에 잇는 안내표지를 담아 봅니다. 오늘은 이곳의 사진을 마지막 사진으로 백사실 계곡 포스팅을 정리 합니다.. 마지막으로 일붕 서경보 스님을 알아 보기로 합니다. 일봉 서경보[一鵬 徐京保 1914.10.10~1996.6.25] 스님 1932년 고향인 제주도에서 출가하여 승려다 되었다.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의 템플 대학교에서 비교종교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학교를 비롯하여 여러대학의 교수를 역임했고, 불국사 주지고 거쳤다. 감사합니다. 백사실 계곡은 도신속의 비밀정원으로 청정무구 생태지역으로 잘보전 되었으면 합니다. 다음번 기회 돤다면 신영동. 평창동 일대를 찾아 다녀 보고 싶어지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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