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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0】향기로운 자연 청정한 천년고찰 양주 오봉산 석굴암

◈ Travelog/⊙ 고찰 문화재

by 순도리(칠이) 2013. 1. 25.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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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주 오봉산 석굴암



 

 

. 오봉산 석굴암


    수도 서울에 위치한 북한산과 도봉산은 세계에서도 찾아보기 드문 아름다운 국립공원으로 이름나 있으며, 그 중에서도 산세가 가장 뛰어난 도봉산의 서쪽 다섯 봉우리가 그 위엄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오봉[五峰]의 서남쪽에 있는 관음봉[觀音峰)] 중턱에 자리잡은 석굴암[石窟庵]은, 위로는 도봉이 치닫고 아래로는 삼각산이 모여서 마치 여러 별이 모여 북극성을 떠받들고 있는 것 같아 그 산세가 크고 뛰어나며, 물 또한 맑고 골이 깊어 수행하는 사람이 살기에는 더없이 좋은 사찰입니다. 도봉산은 주봉인 자운봉[紫雲峰]에서 남쪽으로 만장봉[萬丈峰]. 선인봉[仙人峰]이 있고, 서쪽으로 오봉산 석굴암[五峰山 石窟庵]이 있으며, 우이령을 경계로 북한산을 접하고 있습니다. 도봉[道峰]은 풍수지리상으로 왕관[王冠]의 형상을 하고 있으니, 서쪽의 오봉[五峰]은 주봉을 호위하는 장군기마상[將軍騎馬像]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봉산 석굴암의 현 주지이신 오봉도일 스님은 1954년 초안 큰스님으로 부터 시작된 복원불사를 지극정성으로 이루어 현 가람의 모습을 만들어 내셨고 또한 요사체 겸 수련장을 85평 건축과 5백평 대지조성 하였습니다. 앞으로도 석굴법당 보수불사, 동암 대선사 사리탑과 초안큰스님의 사리탑 조성, 경내 조경 정비와 초안 장학재단 설립 등을 추진중에 있습니다. 인연있는 모든 불자님들께서 불사에 많은동참 하여주기 바랍니다.

 

. 우이령길에서 유격장 있는 마당 넒은곳에서 오봉 있는 곳을 바라보면

석굴암 으로 올라가는 길이 보입니다.. 그길을 다라 올라 가면 설굴암이 나온다.

 

 

 

. 입구 중간부분에는 현판이 보이는대 그곳에는 천년고찰이라는 글씨가 또렸하게 보이며

조금 올라오게 되면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일주문 이렇게 보니 천년고찰 인듯해 보이긴 하다...

 

 

 

. 중창주 초안스님의 세수 28세 1954년 6월 5일 석굴암에 오셨을 때에는 대지 한평도 없었고,

법당은 완전 전소되고,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석굴안에는 전화로 인해 아미타불, 지장보살, 나한님과 수구다라니 목판만 남아 나뒹굴고 파손되어 있었다.

 

 

 

. 오봉산 석굴암 중창주 이신 초안당 유성 대선사는 본관이 려산 송[宋]씨요, 속명은 만석[萬錫]으로,

1926년 6월 15일 강원도 평강군 남면 천마리에서 엄부[嚴父] 송요현님과 자모[慈母] 조병길[삼매심]님의 3남으로 태어나셨습니다.

13세때인 1938년 금강산 건봉사로 출가득도하셨으며, 1940년 도봉산 망월사에서 박동암 대선사를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하고

1943년 해인사에서 하동산 대선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하셨습니다.

 

이후 봉선사 강원 대교과를 졸업한 후 금강산 유점사, 통도사, 월정사, 마곡사, 선학원 등

제방선원에서 안거하며 선수행에 정진하신 바 있습니다. 그러던 중 6.25를 맞아 참전하시어 격전중 총상을 입으시고

1954년 5월 26일 의병 제대한 선사는 은사이신 박동암 대선사께서 당신이 수행 득도한 오봉산 석굴암이라는

좋은 나한기도 도량이 전화로 소실됐으니 가서 복원하라고 말씀하심에 따라

모친 조삼매심 보살[1977년 87세로 별세]과 함께

1954년 4월 5일 석굴암에 첫발을 디딘 이래 지난 45년간 일념으로 중창불사에 매진해 오셨습니다.

 

 

 

. 석굴암은 당시 모든 전각이 폭격으로 파괴되고 남은 것은 단지 한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정도의

석굴과 폐허 속에서 수습한 지장보살님과 나한님 석상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후 40여 년간 군부대안에 위치해 통행이 자유롭지 못한 열악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낮에는 백리 길을 마다 않고 탁발을 다니시고, 밤에는 축대를 쌓으며 불사에 매진하셨습니다.

 

차량이 올라다닐수 없어 10리 산길을 기와 한장, 나무 한 사이도 일일이 져 날라야 하는 악조건 속에서도

선사의 청정한 수행원력과 뼈를 깎는 헌신에 힘입어 72년 범종각, 74년 쌍사자 석등,

79년 요사채 증축, 81년 전기 가설, 82년 삼성각 증축, 85년 봉향각 신축 등의

차례로 불사가 하나 둘씩 이루어져 현재와 같이 손색 없는 가람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선사는 또한 어려운 중창 불사의 경황중에도 육군 30사단 92연대 법당 건립을 포함,

인근 부대의 군법당을 건립하시고 법회활동을 지원하는 등 군포교 후원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여 오셨습니다.

그리고 열반에 얼마 남기지 않으시고는 봉선사 스님들을 위해 써달라며 거액의 장학기금을 보시하셨으며,

복지사업에 큰 관심을 가지시어 어려운 재정속에서도 각종 사회복지 사업에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 석굴암 창건에 대해선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께서 창건했으며,

고려 공민왕 당시 왕사[王師]였던 나옹화상께서 3년간 수행정진 하셨다고 한다..

초안스님의 은사이신 동암선사께서는 조국광복을 위해 끊임없이 상해 김구선생의 임시정부를 도와

광복 운동을 하시면서 틈틈이 석굴암에 오셔서 수행정진 하셨고,

조국은 해방이 되었지만 1950년 6·25사변으로 인하여 석굴암의 전각이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 대웅전

우봉[又峰]한상갑 선생 의 현판 글씨와 주련을 쓰셨습니다...

대웅전 전각 내부에는 아래와 같이 경기도 문화재 자료 제161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으면서.

발원문이나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18세기에 제작된것으로 추정하고 있더군요..

대한불교조계종 나한기도 영험도량의 사찰인듯 하였습니다.

 

 

 

. 양주 석굴암 석조불좌상[楊州 石窟庵 石造佛座像]

경기도 문화재 자료 제161호로 지정 보존 하고 잇다는 안내문 입니다.

 

 

 

. 사찰 을 모두 담아 볼려닌 장비는 한게에 도달 하여 이렇게만 담아 봅니다.

요서체와 대웅전은 일부잘려 않나왔습니다..

중앙에 있는 용왕샘 아래 소개 하겟습니다.. 부정과의 연관이 있는 샘물이더군요..

 

 

 

. 부정을 타면 마르는 샘물


    석굴암의 석굴로 들어서 왼쪽에는 바위틈에서 나오는 자그마한 샘이 있다. 지금은 지하수를 뚫어 물을 풍족히 쓰고 있지만,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이 샘이 석굴암의 유일한 식수원이었다. 그런데 이 용왕샘은 가뜩이나 부족한 수량에도 불구하고 강우량과 상관없이 자주 말라붙곤 하였다. 특히 부정한 이들이 샘물을 마시려 하면 아무리 비가와도 샘에는 물이 고이지 않았다. 그 때도 6.25전쟁 직후라 석굴암에 움막을 짓고 살 때였다. 중병을 앓는 한 처사가 석굴암에 움막을 짓고 요양을 하게 되었다. 백일기도를 드리던 처사는 어느 날 집에를 다녀오겠다고 하였다. 주지 초안 선사는 "기도 중에 부정한 것을 접하면 안 된다"고 신신 당부해 보냈다. 그런데 처사가 돌아오자 그만 샘이 말라붙고 말았다.

 

. 쌍사자석등을 보면서 게단으로 올라가면 석굴암의 나한전이 보입니다..

나한전은 자연 바위굴을 이용하여 굴속에는 나한상이 모셔져 있으면서 석굴암의 내력에 영험한 도량을 알수 잇는곳이다.

 

 

 

. 나한전 앞에서 우축으로 대웅전을 바라봅니다.

각기 주련을 잦추고 있지만 여사롭지 않게 보이는 주련은 우봉[又峰]한상갑 선생께서 직접 쓰신 글이다.

 

 

 

. 나한전 좌측으로 바라보게 되면 범종각을 보게 됩니다..

오봉산 석굴암은 암반에 위치 하면서 좁은 공간에 모든것을 만들어 놓은듯한 공간에 뒤좁아 보이긴 하다.

 

 

 

. 범종각에서 위쪽으로 바라보면 삼성각이 있는대 모두가 가까은곳에 모두가 있었다.

 

 

 

. 나한신앙과 석굴암


    나한신앙이란 나한[羅漢]을 대상으로 하는 불교신앙의 하나로서 나한은 아라한[阿羅漢]의 준말이며 의역하면 살적[殺賊], 응공[應供], 응진[應眞]이라 한다. 살적은 수행의 적인 모든 번뇌를 항복 받아 죽였다는 뜻이고, 응공은 모든 번뇌를 끊고 도덕을 갖추었으므로 인간과 천상의 공양을 받을 만하다는 뜻이며, 응진은 '진리에 상응하는 이'라는 뜻이다. 아라한은 삼명[三明]과 육신통[六神通], 팔해탈법[八解脫法]등을 모두 갖추어서 인간과 천인들의 소원을 속히 성취시켜 주는 복전[福田]이라 하여 일찍이 신앙대상으로 존중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10대 제자를 비롯해 16나한, 5백나한을 주로 나한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특히 석굴암과 같이 홀로 모셔져 있는 나한은 독성[獨聖]이라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에 이미 나한신앙이 성하였고,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크게 성행하여 나한재[羅漢齋]가 빈번하게 열렸으며, 나한을 봉안한 전각을 사찰의 금당[金堂]으로 삼는 경우도 있었다.

 

. 나한전은 옛날의 모습과는 에전 사진과 비교해 보면 많이 다르다는 느낌을 주게 된다.

아마도 근래에 다시 지어진듯합니다..

 

 

 

. 이 모든것들을 생각해 보면 좁은 공간에 다른사찰에서는 볼수없던

항아리들도 공간이 있으면 그곳에 보과 하는것 같더군요...

나름은 고향의 향기가 물신 풍기는듯하여 좋았습니다..

 

 

 

. 삼성각에는 삼신을 모신곳으로

불교 문화에서는 먼져 국내로 전파되면서 우선 고유 민속 신앙인

산신[山神], 칠성[七星], 독성[獨聖]의 삼성[三聖]을 모신 전각이다.

 

 

 

. 잠시 사찰을 둘러 봅니다.

범종각 아래에도 항아리들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이곳 아래로는 용왕샘이 있는 곳이다.

 

 

 

. 사찰을 둘러 보는 순간 천년 고찰의 명소를 바라보게만 하는 조화에 이렇게 사진으로 담아 보지만

아쉬운점도 많이 보인다. 얼마전에 지어진 요사체 지금은 강당으로 쓰이고 있더군요..

옥상 부분에는 무대 설치 하여 음악회도 간간히 하는것으로 보여지기도 하구요..

 

 

 

. 이렇게 천년고찰을 둘러 보면서 40여년 동안 통재되어 신도 아닌사람들은 접근 하기 어려워

많은것들이 숨겨져 있었으나 지금은 부분이나마 해재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 오더군요..

이런길은 항상 개방되는것을 바라는 마음으로 이렇게 포스팅 하게 되었습니다..

부족한점이 있었으면 보충하여 주실것을 부탁 드려봅니다..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고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되시길.....

 

쌩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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