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라 천년고도 경주 불국사

○ 경주 불국사 [慶州 佛國寺]
◈ 창건
5천년 장구한 세월동안 발전해온 우리 민족문화의 정수로 천년세월 너머 현대의
무지한 중생들에게 불국토의 장엄함과 사모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불국사.
창건에 관한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는
서기 528년(신라 법흥왕 15)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의 발원(發願)으로
불국사를 창건하여 574년 진흥왕(眞興王)의 어머니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 절을
크게 중건하면서 비로자나부처님(毘盧遮那佛)과 아미타부처님(阿彌陀佛)을 주조해
봉안했고, 670년(문무왕 10)에는 무설전(無說殿)을 새로 지어 《화엄경(華嚴經)》을
강설(講說)하였으며, 그 후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金大城)에 의하여 크게
개수되면서 탑과 석교 등도 만들었다고 하였다.
다른 기록인,
《불국사 사적(事蹟)》에는 이보다 앞선 눌지왕(訥祗王)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고 경덕왕 때 재상(宰相) 김대성에 의하여 크게 3창(祠)되었다 했다.
처음에는 소규모로 창립되었던 불국사가 경덕왕 때의 재상 김대성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 [대성효 2세부모(大城孝二世父母)]조에는 경덕왕 10년
김대성이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을,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으며, 김대성이 이 공사를 착공하여 완공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국가에 의하여 완성을 보았으니 3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당시의 건물들은
대웅전 25칸, 다보탑 ·석가탑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 극락전 12칸,
무설전(無說殿) 32칸, 비로전(毘盧殿) 18칸 등을 비롯하여 무려 80여 종의
건물(약 2,000칸)이 있었던 장대한 가람의 모습이었다고 전한다.
◈ 중건
① 중수와 보수
전해오는 가장 오래된 기록인 고금창기(불국사 창건에 관한 최고의 기록)는 문헌적인
근거가 약해 불국사가 일정 기간에 창건되기 보다는 긴 세월동안 여러세력들에 의해
점차적으로 완성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오늘날의 일반적 견해이다. 이러한 불국사의
거대 가람 으로서의 위용은 1593년 5월 의병과 승군의 활동으로 많은 피해를 입고
복수심에 사로잡힌 왜군의 방화와 파괴등으로 큰 피해를 입어 2,000여 칸의 대가람이
전소되는 고난을 겪게 되었다. 이후 전란의 피해가 복구되면서 불국사도 국가의
지원 및 스님과 신도들의 노력에 의해 1604년(선조 37)경부터 복구와 중건이 시작되어
1805년(순조 5)까지 40여 차례에 걸쳐 부분적인 중수(重修)가 이루어졌으며 1805년
비로전 중수를 끝으로 중수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이후 조선 후기 국운(國運)의 쇠퇴와
더불어 사운(寺運)도 쇠퇴하여 많은 건물이 파손되고 도난당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 1910년 당시 불국사 전경
②근세 복원
일제강점기인 1924년 대규모의 개수공사를 실시하여 다보탑의 해체보수,
법당의 중수 등을 실시하였는데 이때 다보탑 속에 있던 사리장치(舍利藏置)가
행방불명되었고 공사와중에 유물의 완벽한 복원과 보존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일제의 문화정책의 전시물로서 수난을 겪었다.
8 ·15광복 후인 1966년 석가탑의 해체복원 등 부분적 보수가 있었다가
1969년 불국사 복원위원회가 구성되고 1970년 2월 공사에 착수,
1973년 6월 대역사(大役事)를 끝마쳤다. 이 공사로 주춧돌과 빈터만 남아 있던
무설전, 관음전, 비로전, 경루(經樓), 회랑(廻廊) 등이 복원되었고, 대웅전, 극락전,
범영루(泛影樓), 자하문(紫霞門) 등이 새롭게 단장되었다.

▲ 1910년 당시 범영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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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전에서 극락전으로 삼도계단을 통해 내려오면 극락전 뒷마당으로
연결된다. 사진상 앞에 보이는 범영루와 회랑이 석축을 기단삼아 불교문화의 아름다운 운치를 더한다...
극락전은 다음으로 뒷문을 통해 먼저 나한전을 다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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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한전 올르가는 계단앞에 법화전지 주춧돌만이 덩그런이 놓여있는 터를 지나면서 게단을 오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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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나한전에서 높고 낙은 지형을 이용하여 법당을 지어놓은 것을 보기위해 사진을 먼저 담아본다
계단을보면 그곳으로 올라 비로전을 볼수있으며 그 위로는 관음전이 있다는것을 알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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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불국사 나한전[慶州 佛國寺 羅漢殿]
나한이란 부처님의 제자들중 소승의 계위인 아라한과[阿羅漢果]에 오르신 성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나한전은 아라한을 모신 곳을 말하며 이 곳은 최근에 새로 지어진 것이다.
불국사 나한전에는 부처님 당시의 16분의 수행을 잘하셨던 제자분들을 모셨다.
가운데 모신 불상은 석가모니부처님이고 양쪽에 제화갈라보살님과 미륵보살님을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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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국사 나한전에서 비로전 올라가는 게단이다.
나한전은 1970년도에 중수된 건물로서 문화재로서 가치성이 떨어진다 하여...
문화재 등록에서도 빠지고, 전각 배치도에도 없는것으로 보여지며 제가 일부러 그러넣기 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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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한전 옆에는 작은 소탑지.. 너무 많은 탑들이 이미 자리하여
지금은 찾아오는 관람객들의 소원을 담아보는 터러 알려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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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한전 울타리에 기와장 위에도 ....!!
공간이 있는곳이라면.. 어느곳이던 소탑들이 자리하여 찾는 사람들이 엄숙함 까지 주는곳 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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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씩 둘러보면 본인이 들고 들어와 다른 사람들이 쌓아 놓은
탑위에 올려 놓은것 같기도 하며......정성어린 흔적들이 .........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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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변에서는 사진 담기에 바분 사람들과 상반되게 하나라도 더놓이 쌓고자..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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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작이로 쌓아진것 처럼보이나 무질서하다는 느낌보단 부처님의 설법이 나올만한 곳으로 보여지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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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나 나한전은 석가모니 주불[主佛]로 하여 좌우에 제자 아라한를 모신곳이라
아마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모두가 부처님에게 복을 받고자 하는 희망에 이곳에 작은 돌탑을 쌓으면서
기도를 하지 않았나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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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분의 시작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것인지.
아니면 어떻게 유래된것인지는 알수없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것 처럼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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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는 나한전도 나왔습니다..
나한전 바로 앞마당에 자리 하고 있는 "법화전지"
법화전터은 아직 복원이 되지 않은 곳으로 경전을 보관하던 서적보관소의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극락전 뒤쪽은 복원되지 않았으나 법화전터로 알려진 건물터가 남아 창건당시의 불국사와 현재
의 불국사의 규모에는 큰차이가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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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한전에서 법화전지터로 내려가 보겠습니다..
임진왜란 때 왜구들은 불국사에 병장기가 있자 수 천여칸에 이르는 건물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그 후 다시 복구하기는 하였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사라진 것도 많고 이 법화전터 같이 복구가 되지
않은 것도 있다. 극락전 뒤편의 법화전터는 미륵불이 하생할 용화세계를 의미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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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려가는길에 모여있는 분들을 오늘 함께 이동하게 되어 귀기울여 보니
이분들은 중국 광관객들이 였습니다.. 우리 나라의 역사에 많은 관심이 있어 보이더 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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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화전지터
불국사의 중심영역인 대웅전이 있는 마당에서, 극락전으로 연결 되는 문을 나오면 복원 되지 않는 건물터가 있다.
이곳은 경전을 보관하던 서적보관소의 역할을 했다고 한다. 지금은 발굴 당시의 주춧돌이 잘 정비 되어있다.
이재는 경내에 마지막인 극락전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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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불국사 극락전[慶州 佛國寺 極樂殿]
국보 제27호 금동아미타여래좌상[金銅毘盧舍那佛坐像]이 모셔진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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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락전에서 바라본 대웅전 올라가는 삼도계단은 불교의 의궤를 상징한 신라의 해석이라 한다.
경내는 크게 대웅전, 극락전, 비로전 세 영역으로 나뉘어 있으며, 세 분의 부처님이 계신 곳을 말한다.
각 영역은 입구가 되는 계단과 문, 그리고 중심 건물과 이를 둘러싼 회랑으로 구성되었다.
대웅전 영역은 석가여래불의 사바세계, 극락전은 아미타불의 극락세계, 비로전은 비로자나불의 연화장 세계를 나타낸다. 석축 위에 자리한 이들 세 영역이 부처의 세계라면, 석축 아래는 인간의 세계이다.
영역으로 계단. 문. 건물. 회랑 피안의세계로는
이후 대대적인 복원공사로 무설적, 관음전, 비로전, 경루, 회랑 등이 다시 세워져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각 영역은 계단, 문, 중심 건물, 회랑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웅전 영역은 석가여래, 극락전은 아미타여래, 비로전은 비로자나불의 세계를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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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불국사 극락전[慶州 佛國寺 極樂殿]
경주시 토함산 기슭에 자리잡은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대성은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 석굴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은 불국사 극락전에 모셔진 높이 1.66m의 불상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기교있게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다.
원만하고 자비스러운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있으며, 눈썹은 반원형이고 콧날은 오똑하다.
신체 표현은 장중하여 건장한 남성의 체구를 연상시키며, 두 무릎은 넓게 퍼져서 매우 안정된 느낌을 준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에는 거침없는 주름이 새겨져 있는데,
특히 옷깃 안쪽에서 밖으로 늘어지는 옷 접힘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어깨 높이로 들어 약간 오므린 왼손은 손바닥을 보이고 있으며, 오른손은 무릎에 올려 놓고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약간 구부리고 있다.
떡 벌어진 어깨, 양감있는 당당한 가슴, 잘록한 허리 등에서 사실적이면서 세련된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26호],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제28호]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
불국사 극락전[極樂殿]에 주존불[主尊佛]로 봉안되어 있는 불상이다.
높이 166㎝로 이 상[像]은 전체적으로 장중한 모습이며 신체나 옷주름도 비교적 사실적[寫實的]으로 표현하였다.
상호[相好]는 근엄한 인상이 뚜렷하여 통일신라시대 후반기의 불상과 비교되며, 짧은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법의[法衣]는 우견편단[右肩偏袒] 양식이며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두 무릎은 매우 안정된 모습이다.
수인[手印]은 아미타[阿彌陀]의 9품인[九品印] 중에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보이며,
양손의 위치에 있어서 좌우가 서로 바뀌어진 것은 국보 제26호 비로자나불좌상에서도 보이는 공통된 점이다.
이 불상은 조성연대가 국보 제26호와 거의 비슷한 800년을 전후한 시기로 추정된다.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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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동아미타여래좌상[金銅毘盧舍那佛坐像]
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法]을 설하시는 부처님.
아미타란 명칭은 산스크리트의 아미타유스[무한한 수명을 가진 것]
또는 아미타브하[무한한 광명을 가진 것]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한문으로 아미타[阿彌陀]라고 음역하였고, 무량수[無量壽],무량광[無量光] 등이라
의역하였다.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에서는,
아미타불은 과거에 법장[法藏]이라는 구도자[보살]였는데,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願]을 세우고 오랫동안 수행한 결과 그 원을 성취하여 지금부터 10겁[劫] 전에 부처님가 되어 현재 극락세계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국보 제27호 금동아미타여래좌상 아미타부처님은 자신이 세운 서원[誓願]으로 하여
무수한 중생들을 제도하는데, 그 원을 아미타부처님이 되기 이전인
법장보살 때에 처음 세운 원이라고 하여 본원[本願]이라고 한다.
모두 48원[願]인데, 이 48원의 하나하나는 한결같이 남을 위하는
자비심에 가득한 이타행[利他行]으로 되어 있어 대승보살도[大乘菩薩道]를
이룩하고 있는 이 부처님의 특징을 말해주고 있다.
그 가운데 13번째의 광명무량원[光明無量願]과 15번째의 수명무량원[壽命無量願]은
아미타부처님의 본질을 잘 드러내 주고 있으며,
18번째의 염불왕생원[念佛往生願]은 "불국토[佛國土]에 태어나려는 자는
지극한 마음으로 내 이름을 염[念]하면 왕생[往生]하게 될것" 이라고 하여,
중생들에게 염불[念佛]을 통한 정토왕생의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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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락전[極樂殿] 복[福]돼지가 현판뒤에 숨어있다. 안내문을 옮겨본다.
극락전은 아미타부처님을 모신곳으로 극락정토의 주불로서 중생의 고난과 고토을
살피고 구제하는 부처님이며 아미타불의 48대원은 48가지의 큰 원으로
중생제도의 서원을 담고 있습니다.
아미타부처님의 24대원에 "모든것에 만족 하기를 원합니다." 하는 원이 있습니다.
만족한 삶은 의식주의 구족과 더불어 욕심의 끝을 알아 스스로 절제하라는
경계의 뜻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부의 끝은 스스로 만적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600년에 한번 돌아온다는 황금돼지해라고 하여 세간에서 돼지를 제불과 의식의
퐁족함을 상징하며 복을 가져다 주는 길한동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행복과 즐거움이 가득하다는 극락정토의 복돼지는 부와 귀의 상징인
동시에 지해로움으로 그 부귀를 잘 다스려야한다는 의미일것입니다.
부와 귀가 함께하는곳에 "착한 지혜의 근본" 이 있더면 그곳에 극락정토일 것입니다.
동시에 극락전 복돼지는 우리 국민 모두의 상징적인 복돼지가 될 것입니다.
출처 : 안내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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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은 사람들이 모여있는곳은 복돼지를 만들어 놓은곳에서
인증 사진에 시간이 없어 이렇게만 담아본다.
경주 불국사 극락전[慶州 佛國寺 極樂殿]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모신 법당 국보 제27호인 금동아미타여래좌상[金銅阿彌陀如來坐像]
8세기 중엽의 작품이 모셔져 있으며. 751년에 건립 되었으나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영조 26년[1750]에 당시의 기단[基壇]과 초석[礁石]위에 중건하였다
건축양식은 조선 후기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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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양문에서 범영루와 청운교를 바라 본다. 차후 다음 계시글에 게시 될것입니다.
파란색으로 보이는 부분이 아직 발굴되지 않은 연지라 합니다.
다음게시글에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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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잰 극락전을 끝으로 경내는 전부다 돌아 보았습니다..
극락전 서쪽 축대의 모습 지형을 이용한 흔적 지대가 낮은 부분을 축대를 쌓아 안쪽을 평단 하게 만들어
경전을 지었다는 불국사 축대도 다른곳과는 달리 쌓았다는 흔적도 볼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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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종각[梵鍾閣]
범종을 달아놓은 종각을 말 한다..
당호는 절에 따라 법종루, 종각, 종루라고 하는대 일만적으로 단층일때는 "각" 중층일대는 "루" 라고 한다.
범종에는 비천상이 새겨져 있는데, 조각 수법이 뛰어나 신라종의 특색중 하나라고 한다.
한국 종의 특징은 무엇보다 우아하고 안정된 외형으로 소리도 매우 은은하다고 맑다고 한다.
경내를 빠져 나오며 불국사 서쪽에 위치한 범종각를 바라 보지만 가을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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