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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25】세계문화유산 사적 502호 신라의 높은 품격을 느낄수있는 경주 불국사를 찾아서..

◈ Travelog/⊙ 고찰 문화재

by 순도리(칠이) 2012. 12. 7.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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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천년고도 경주 불국사



 

 



    ○ 경주 불국사慶州 佛國寺] 사적 제502호 토함산[吐含山] 서남쪽에 자리잡은 이 불국사는 신라 경덕왕[景德王] 10년[751]에 당시 재상 김대성[宰相 金大城]에 의해 기공되고 혜공왕[惠恭王] 10년[774]에 이르러 80여 동의 목조건물[木造建物]이 들어선 대가람[大伽藍]으로 완성되어 신라 호국불교[護國佛敎]의 도량[道場]으로서 법등[法燈]을 이어왔다. 조선 선조 26년[1593] 왜병의 침입 방화로 650여 년간 이어져오던 불국사의 건물이 모두 불타 버렸다. 그 후 대웅전[大雄殿] 등 일부의 건물이 다시 세워져 그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불국사가 문화유산으로 보존 전승되고 나라를 사랑하는 호국정신[護國精神]을 기르는 도량으로서의 옛 모습을 되찾게 하고자 1969년에서 1973년에 걸쳐 창건당시의 건물터를 발굴 조사하고 그 자리에 다시 세움으로써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경내에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다보탑[多寶塔], 석가탑[釋迦塔]으로 불리는 3층석탑[三層石塔], 자하문[紫霞門]으로 오르는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 극락전[極樂殿]으로 오르는 연화교[蓮華橋], 칠보교[七寶橋]가 국보로 보존되어 당시신라사람들의 돌을 이용한 예술품의 훌륭한 솜씨를 역력히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비로전[毘盧殿]에 모셔져 있는 금동비로자나불좌상[金銅毘盧舍那佛坐像], 극락전[極樂殿]에 모셔져 있는 금동아미타여래좌상[金銅阿彌陀如來坐像] 등을 비롯한 수다한 문화유산들도 당시의 찬란했던 불교문화를 되새기게 한다. 1995년 12월에 석굴암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출처 : 문화재청

 

 


 

. 불국사 입구인 일주문 옆에는 매표소 있으며 입장료 4000원으로 입장하여 오르다 보면

사찰의 중문에 해당하는 또 하나의 문인 사천왕문을 만나게 된다.

무심코 들어서다 보면 깜짝 놀라게 되는데. 네명의 험상궂은 모습의 장수가 문을 지키고

출입자들을 아래로 내려다 보고있다. 이들이 사천왕으로 그래서 사천왕문이라고 한다.

동쪽은 지국천왕[持國天王], 남쪽의 증장천왕[增長天王], 서쪽의 광목천왕[廣目天王], 북쪽의 다문천왕[多聞天王]을 말한다.

 



 

. 해탈교[解脫橋]

해탈의 경게에 드는것을 다리[橋]를 건너는것에 비유하였다.

해탈이란 번뇌의 얽매임에서 풀리고 미혹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본디 열반과 같은 불교의 궁극적인 실천 목적이다.

 



 

. 해탈교 밑을 흐르는 계곡의 경계에는 이미 가을을 보내고 있었는대.

번뇌를 벗어던지고 불국사를 맞이해 볼렵니다.

워낙의 이름난 명소로써 어떻게 소개를 하여볼까.? 망설임 끝에 많이 흩어진 이야기를 정리해 볼려 합니다.

 



 

. 경주 불국사 석조 [慶州 佛國寺 石槽]

 

경주 불국사 석조는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수조의 형상이 원형인 백제시대의 석조와 달리

통일신라시대 이후의 형상인 직사각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내·외면에 조각이 있는 점과

다른 직사각형의 석조와는 달리 모서리를 둥글게 한 것이 특이하다.

특히 내부 바닥면의 화려한 연화문 조각은 통일신라시대 불교미술의 뛰어난 조형의식과

높은 예술수준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역사적, 예술적 가치가 인정된다.

 

 

불국사 석조 도면

 



 

. 경주 불국사 석조 [慶州 佛國寺 石槽] 보물 제1523호 비석입니다.

 



 

. 에전에는 "토함산 옥로수"로 물을 받아 식수로 사용되었으나.

최근에 불국사 종무소에서는 석조를 영구 보존을 하고자 옮길 계획중에 있으며 사용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 석조물 있는곳을 돌아 이곳으로 대웅전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직도 남아있는 가을풍경 사찰과의 모습이 더욱더 아름답게 보여 집니다...

 



 

. 경주 불국사 다보탑 [慶州 佛國寺 多寶塔] 국보 제20호

 

불국사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석탑이다. 불국사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마당에

동서를 마주보며 동쪽엔 다보탑, 서쪽에는 석가탑이 나란히 세워져있다.

두 탑을 나란히 세운 까닭은 "현재부처인 석가모니불이 설법을 펴자 과거부처인 다보불이 옆에서 옳다고 증명했다"

법화경의 내용에 따라 탑으로 구현했기 때문이다. 건립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된다.

 

이 탑은 1925년쯤에 일본인들에 의해 해체 수리되었는데,

이 때의 관련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고 탑 속에 있던 사리와 사리함 등 유물들도 모두 사라져버렸다.

기단 돌계단 위에 놓여있는 4마리의 돌사자도 한 마리만 남기고 모두 일제에 의해 약탈되어 지금까지도 행방을 알 수 없다.

탑의 구조를 보면 1층은 사각, 2층은 팔각이며, 3층은 원으로 변화를 주었다.

사면으로 계단을 놓은 기단 위에 추녀가 힘차게 올라간 사각 기와집 형식이며,

그 위에 연꽃잎 모양으로 창문을 낸 팔각정이 세워진 모습이다.

복잡한 목조건축의 구조를 산만하지 않으면서도 유려하게 표현하였는데,

8세기 통일신라 불교미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석탑으로 우리나라 탑 가운데 가장 개성적이고 아름다운 탑으로 평가된다.

출처 : 문화재청

 



 

.경주 불국사 다보탑 [慶州 佛國寺 多寶塔] 국보 제20호

 



 

 



 

. 지금은 다보탑 옆에 있는 불국사 삼층석탑[佛國寺 三層石塔] 국보 제21호는 문화재청에서 심각한 균열이 보여

수리 보수중이라 볼수 없었지만 과정을 볼수있도록 유리관을 설치 하여 내부에서 철거 작업중임을 알수 있었습니다..

 



 

. 대웅전 앞에 있는 석등은 건축당시의 것으로 지금도 석등 구멍으로

대웅전 부처님의 얼굴을 볼수있어 그곳으로 향해 지도를 드리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있어 혼잡함이 많았습니다....

 



 

. 경주 불국사 대웅전[慶州 佛國寺 大雄殿]

 

경주 불국사는 신라의 동악[東岳]인 토함산[土含山] 서측 기슭에 위치하며,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불국사의 지형은 북측이 높고 남측이 낮은 북고남저[北高南低]와 동측이 높고 서측이 낮은 동고서저[東高西低]으로

지형에 따라 석축을 가구식으로 조화롭게 쌓았으며, 동측 사역에는 자하문, 대웅전, 무설전을 남북 축선에 배치하면서

회랑을 둘러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대웅전의 동·서측면에는 익랑[翼廊]이 놓여 동·서 회랑과 연결되고 남회랑의 동측 모서리에는 좌경루[左經樓]가 있고,

서측 모서리에는 범영루[泛影樓]가 배치되어 있다. 자하문 남측에는 청운교와 백운교의 석계를 마련하여

대웅전으로 진·출입 할 수 있도록 꾸몄다.

출처 : 문화재청

또한 대웅전 내부 천장부분을 자세히 보시면 동물들이 들이 기등을 받들어 놓은 형상들을 하고 있었다.

내부 사진 촬영금지 구역이라 촬영은 못하였으나 관람을 쉽게 볼수 있었습니다.

본 기둥 위 천장 사이에 여러 마리의 동물들이 왼쪽으로는 흰 코끼리[돼지?]와 용이 보이며

앞쪽 기둥에 좌우로 붙어있는 사자도 뚜렸하게 보인다.

 궁금하여 대웅전을 지키는 한 보살님에게 여쭈어 본다..그랬더니 하시는 말씀이...

 

"코끼리는 보현보살이고 사자는 문수보살이에요.

불단에 불상을 더 세울 수 없으니까 문수 보현을 그렇게 나타내 부처님을 모시는 거라고요.

그런데 조각한 목수가 코끼리를 못 보던 시대 사람이라 저렇게 돼지같이 만들어 놓은 거지요" 라고

설명하여 주셨습니다..그외 밖으로도 많은 동물상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 경주 불국사 대웅전[慶州 佛國寺 大雄殿] 연혁을 보면

 

불국사에 대한 문헌은 삼국유사와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 대웅전중창단확기[大雄殿重創丹確記] 등이 있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경덕왕 10년[751,辛卯]에 처음으로 불국사을 창건하기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甲寅]

12월 2일 대성이 죽자 나라에서 공사를 마쳤다

[...景德王代 大相大城以天寶十年辛卯始創佛國寺,歷惠恭世,以大歷九年甲寅十二月二日大城卒,國家及畢成...]’는

기록이 있어 경덕왕 때[751]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은 불국사고금창기에 의하면 조선 세종 18년[1436]에 중수하였으며, 성종 21년[1490]과 명종 19년[1564]에 중수가 있었으나,

선조 26년[1593]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었다. 그 후 효종 10년[1659]에 중창된 후 숙종 3년[1677] 번와 보수,

숙종 34년[1708] 서쪽 기둥 교체, 영조 5년과 영조 6년[1730], 영조 7년에 개와[蓋瓦]를 보수하였다.

조선 영조 41년[1765, 乙酉]에는 대웅전을 중창하고, 영조 41년[1767] 단청이 완료되었으며,

이후 대웅전의 삼존불과 후불탱[後佛幀]을 영조 45년[1769]에 완성하였다.

 

그 후 퇴락된 것을 일제 강점기인 1918년부터 1925년까지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개수한바 있으며,

이어 1934년부터 1936년 사이에도 개수되었다. 그 뒤 또 다시 심하게 퇴락되어 가던 것을

1970년대에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의 지시로 중창되었다.

출처: 문화재청 

 



 

. 경주 불국사 대웅전[慶州 佛國寺 大雄殿] 특칭을 보면

 

불국사 대웅전 전면의 동측에는 다보탑이 배치되어 있고, 서측에는 석가탑이 배치되어 있다.

또, 대웅전 전면에는 팔각을 기본으로 한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등이 배치되어 있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5칸의 동서가 약간 긴 장방형의 평면으로 단층 팔작 기와지붕이며,

조선 후기의 다포계 형식을 가지고 있다. 대웅전의 외관은 중앙의 어칸을 협칸[8.7尺]이나 퇴칸[8.2尺]보다 배이상 넓은

주칸[17.7尺]으로 꾸며졌다. 공포는 다포로 어칸에 3구의 공간포가 배치되었고, 협칸과 퇴칸에는 1구의 공간포가 배치되어 있다.

살미첨차에는 초화문양[草花文樣]과 봉황[鳳凰] 머리를 조각하였고,

평방에서 돌출된 용머리 조각 등은 매우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대웅전 정면의 어칸은 사분합꽃살문이고,

협칸과 퇴칸은 쌍분합교살문이며, 양측면의 문은 삼분합띠살문으로 꾸며졌으며, 후면의 어칸은 사분합정자살문이며,

협칸은 벽체로 막았고 퇴칸은 분합정자살문으로 20칸중 10칸은 문을 설치하여 개방 했다.

기단은 면석에 우주[隅柱]와 탱주[幀柱]가 설치되어 있고, 상부에 갑석[甲石]을 덮은 통일신라시대의

가구식 기단[架構基壇]이다. 기단의 사면 중앙부에는 계단이 놓여 있고,

계단 양측의 소맷돌은 측면을 삼각형 문양으로 가공하였다. 천정은 우물 천정인데 층단식으로 중앙이 높게 꾸며졌다.

출처 : 문화재청 

 



 

. 경주 불국사 대웅전[慶州 佛國寺 大雄殿] 가치성

 

불국사 대웅전은 창건당시 기단과 석등 등의 석조물이 보존되어 있으며,

창건 당시의 유구 위에 영조 41년[1765]에 중창된 건물로 중창기록과 단청에 대한 기록이 함께 보존되어 있는

매우 중요한 건축물이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5칸의 다포계 건물로 기둥을 생략한 내부 공간 구성 및

살미첨차의 초화문양[草花文樣]과 봉황[鳳凰] 머리 조각, 평방에서 돌출된 용머리 조각 등

내·외부를 매우 화려하게 장식한 우수한 불전으로 그 가치가 크다.

출처 : 문화재청

대웅전의 가치는 어떤 말로 표현 할수없을 정도 였으며 우리나라의 불교문화의 산증거임을 알수 있을것입니다.

 



 

. 경주 불국사 대웅전[慶州 佛國寺 大雄殿]보물 제 1744호 뒷편 모습입니다.

 



 

. 경주 불국사 무설전[慶州 佛國寺 無說殿]

 

불국사[佛國寺] 대웅전 뒤편에 있는 건물로, 불경을 강의하는 강당이다.

진리의 본질과 불교의 깊은 뜻은 언어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경지에 있음을 표현하기

위하여 무설전[無說殿]이라고 명명하였다.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따르면

불국사 내 건물 중 가장 먼저 건립되었으며, 670년경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이곳에서 최초로 설법을 하였다고 전하는데,

당시 규모가 32칸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708년[숙종 34] 중창되었고,

몇 차례의 중수를 거쳐 1973년 현재의 건물을 복원하였다. 정면 8칸 측면 4칸의 주심포식 맞배지붕 목조 건물로,

전면 4곳과 양쪽 측면, 후면에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2009년 5월 태국 왕실이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의미로 만든 석가모니불 좌상이 이곳에 봉안되었다.

출처 : 지식백과

 



 

. 경주 불국사 무설전[慶州 佛國寺 無說殿] 현판이다..

 



 

. 대웅전 과 무설전 사이를 두고 있으면서 옛날에는 이곳가지 많은 사람들이

설법을 듣기위해 모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 무설전[無說殿]에는 지장보살 김교각 스님에 관한 이야기가 있엇습니다..

 

김교각스님은 서기 697년 신라 제33대 성덕대왕의 아들로 테어나 24세에 출가하여 바다건너 당나라에서 처음에

중국 각지를 유행하시다가 구화산에서 수려한 풍광에 매료되어 초당[草堂]을 짓고 수행을 하였다.

구화산 주인임 토호인 민양호의 아들이 길을 잃고 사경을 해매다 스님의 도움으로 귀가 할수 있었다.

그 보답으로 절을 짓기위해 김교각스님이 민양호에게 시주를 해달라고 하여 내어주어 구화산에 최초로 '화성사"라는 절을 창건하여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모든 사람에게 추앙되었다.

스님은 서기 794년 수행 자세로 입적하여 세납 99세로 시신이 3년이 지나도록 얼굴과 살갖이 살아있는듯하여

구화산 등신불로 모시고 법당을 지으니 "육신보전[肉身普殿]"이라 하였다.

오늘날 김교각스님은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전해지며 생전에 고국에 언재 돌아가시냐고 물었더니 "1,300년후 돌아갈것이다" 하여

1997년 스님 탄신1.300주년에 구화산 으로부터 기증받아 등상[等像]을 무설전에 모시게 되었다 한다. 

 



 

. 다시 돌아 보게 되는 대웅전 뒷모습 역사 신라의 천년고도의 산 증거였습니다.

 



 

. 문밖으로 보이는 "법화전지" 그곳은 다음에 들러 볼것이며

그냥 지나갑니다..

 



 

. 무설전 뒤로 보이는 게단으로 올라가 비로전[毘盧殿]으로 향합니다..

 



 

. 경주 불국사 사리탑 [慶州 佛國寺 舍利塔] 보물  제61호 

비로전[毘盧殿]에 들어와 왼쪽편으로 조그마한 전각이 있어 그자리가 보니 사리탑도 일본인 들이 자져간 것을

다시 찾아와 1933년에 이자리에 다시 모시게 되었다 한다...

 



 

. 경주 불국사 사리탑 [慶州 佛國寺 舍利塔] 

 

불국사 강당 뒤쪽의 보호각에 보존되어 있는 사리탑으로, 「불국사사적기(佛國寺事蹟記)」에서 말하는

'광학부도[光學浮屠]'가 곧 이 사리탑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여래의 사리탑인지 승려의 사리탑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겉모습이 석등과 비슷하게 생긴 사리탑으로,

사리를 모시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아래는 받침이 되는 기단[基壇]을 두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두었다.

 

기단은 연꽃잎을 새긴 반원모양의 돌을 위,아래에 두고, 그 사이를 북[鼓]모양의 기둥으로 연결하고 있는데

기둥에 새겨진 구름무늬에서 강한 생동감이 묻어난다. 탑신[塔身]은 가운데가 불룩한 원통형으로,

네 곳마다 꽃으로 장식된 기둥모양을 새겨두었다. 기둥에 의해 나뉘어진 4면에는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안쪽으로 움푹 파놓은 후, 그 안에 여래상[如來像]과 보살상[菩薩像]을 돋을새김하여 모셔놓았다.

 

지붕돌은 추녀끝에서 12각을 이루다가 정상으로 올라가면서 6각으로 줄어든다. 경사면은 완만하며,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일부만 남아있다. 평면이 8각인 기본형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화려한 조형과 섬세한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1905년 일본인에 의해 동경의 우에노[上野]공원으로 불법 반출되었다가 1933년에 반환된 것으로,

일제시대 당시 모진 수난을 당한 우리 문화재의 아픈 역사를 잘 말해주고 있다.

출처 : 문화재청   

 



 

. 사리탑 안내문 이였습니다.

아마도 이곳은 일본인들도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 오고 하던대 안내문을 읽어 보고는 어떤 생각을 할까 많은 생각을 히게한다..

 



 

.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 [慶州 佛國寺 金銅毘盧遮那佛坐像] 국보 제26호 모셔진 비로전 [毘盧殿]

 

경주시 토함산 기슭에 자리잡은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대성은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 석굴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불국사 비로전에 모셔져 있는 높이 1.77m의 이 불상은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의미를 지닌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이다.

머리에는 머리칼을 작은 소라 모양으로 표현하였으며, 얼굴은 위엄이 있으면서도 자비로운 인상을 풍기고 있다.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은 매우 얇게 표현되어 있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는 옷주름의 표현은 매우 사실적이다.

손모양은 오른손 검지를 왼손으로 감싸고 있어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과는 반대로 표현되었다.

 

이 불상은 양감과 적절한 신체비례 등에서 이상적이면서 세련된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제28호]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

불국사 비로전[毘盧殿]에 주존불[主尊佛]로 봉안되어 있는 불상이다. 높이 177㎝,

이 상[像]은 불국사 극락전 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 백률사 약사여래입상[국보 제 28호]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의 하나이다.

대좌[臺座]나 광배[光背]는 없어지고 불신[佛身]만 남아 있지만, 육계[肉계]나 나발[螺髮]의 머리카락은 기교있게 만들었다.

 

상호[相好 : 부처님의 얼굴]는 반달눈썹에 눈은 아래로 내려다보는 듯 반개[半開]하였고,

인중을 뚜렷이 두드러지게 새겨 전체적으로 장중한 인상을 풍긴다. 대의[大衣]는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얇게 밀착되어

몸의 굴곡이 자연스럽게 드러나 보이는 당당한 체구의 결가부좌상[結跏趺坐像]이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이 아래,

왼손이 위로 올라간 지권인[智拳印]으로서 일반적인 지권인과는 반대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예는 증심사 비로사나불좌상[보물 제131호]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불상은 8세기 중엽경의 작품인 석굴암본존불[국보 제24호]의 특징과는 다른

9세기 불상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출처 : 문화재청

 



 

. 경주 불국사 비로전[慶州 佛國寺 毘盧殿] 

 

불국사 복원 시에 중창된 건물로 불국사 대웅전 일곽의 뒤쪽에 자리하고 있다.

이 건물터를 발굴할 때 이 건물터가 불국사의 건물 중 가장 오래된 형식의 유구였음이 확인되었다.

 

건물 안에는 비로자나불은 안치하였으며 건물의 양식은 고려 시대 양식으로 하였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인데 측면의 중앙 칸이 비교적 넓어 건물평면은 정방형에 가까운 장방형이다.

건축의 공포는 주심포식으로 팔작집형식을 취하였고 내부의 가구구조를 특이하게 한 일례라 할 수 있다.

설계는 불국사복원위원회 설계팀이 하고 도편수는 이광규, 신응수 양씨가 담당하였으며 단청은 한석성 씨가 맡았다.

출처 : 지식백과

 



 

. 불국사 비로전[佛國寺 毘盧殿]은 동고서저[東高西低]로 사진상으로 보이는

계단이 불국사에서 제일 높은곳인 관음전[觀音殿] 올라가는 계단이며,

비로전[毘盧殿]보다 서쪽으로 낮은곳에있는 나한전[羅漢殿] 사이에 있다.

 

 

 

. 비로전[毘盧殿]에는 연화장세계[蓮華裝世界 :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연꽃으로 장엄된 세계]

교주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본존불로 모신 전각이다.

 

 

금동비로자나불좌상 국보 제26호

 



 

. 비로전[毘盧殿] 안내문에는

 

비로자나불 [毘盧遮那佛]을 모신 법당. 국보 제26호인 금동비로자나불상[金銅毘盧遮那佛坐像, 8세기 중엽의 작품]이

모셔져 있다. 751년에 건립되었다. 그 후, 여러 차례의 중수, 중건을 거쳐 1973년. 창건 당시의 기단과 초석 위에

중건 하였다 건축양식은 조선후기에 속한다. 

 



 

. 비로전 뒷 뜰에는 아직도 남아있는 가을색.. 파란 소나무와 함께 자리하여

그나마 여행객들의 눈길을 끌어 준다..

 



 

. 관음전 오름계단으로 올라왔습니다.. 사진상 비로전 뒤로는 나한전이 보인다..

지금부터는 관음전 → 무실전 → 대웅전 → 다보탑 → 극락전 → 나한전으로 걸음길로 이어 집니다..

 



 

. 경주 불국사 관음전[慶州 佛國寺 觀音殿]

 



 

. 중생을 구제하는 자비의 보살인 관세음보살을 모신 법당이다.

 



 

. 관음전[觀音殿]

 

불국사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관음전입니다.

불국사의 중심 영역인 대웅전과 강당인 무설전 뒷편 언덕에 위치한 불전으로 경사가 상당한 계단을 걸어서 올라가야만 합니다.

건물의 크기는 별로 크지 않고 특징적인 면은 보이지 않는 곳입니다만 신앙의 대상으로서는 중요시 되는 것 같습니다.

관음전 건물은 70년대에 새로 중수한 건물로 내부에 있는 후불탱화 천수관음도가 유명합니다. 

 



 

. 관음전[觀音殿] 앞에 있는 안내문에는

관세음보살을 모신 법당. 751년에 세워졌다. 여러차례의 보수[補修]와 중건[重建]을 거쳐 1973년.

불국사 복원[復元]때 다시 세웠다. 조선초기[1400년경]의 건축양식이다.

 



 

. 관음전[觀音殿]

 

자비의 보살인 관세음보살을 본존으로 모신 관음전은 대웅전 영역 뒤편 불국사에서 가장 높은 대지에 위치한 중심 전각이다.

조선시대에 여러 차례에 걸쳐 중창한 건물로 평면은 도리통 3간, 양통 3간이다.

내부에는 4개의 기둥을 세워 전체 평면을 내외진으로 구성하였다.

이러한 평면 구성은 이미 신라 때 만들어진 것이나

조선시대에 와 옛 건물터의 기단과 초석을 그대로 이용하였기 때문에 기둥 배열은 옛것과 같으나

공간의 이용은 조선시대 후기의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내부 기둥 중 후면의 기둥에 의지해 불단을 만들고 후불탱과 관음보살상을 봉안하였다.

 

 

관음보살상

 

후불탱과 관음보살상은 1973년에 조성한 것이다. 높이 약 170cm, 너비 약 60cm의 크기이다.

내부 좌측에는 1970년에 조성된 작은 동종 하나가 있다.

원래 이곳에는 신라 경명왕 6년[922년]에 경명왕비가 낙지공[樂支公]에게 명하여

전단향목으로 만든 관음보살상이 모셔졌었고 조선시대 현종, 숙종 때 전부 세 차례에 걸쳐 개금되었다고 하나 현재 행방을 알 수 없다.

 


 

 

. 韓國二十三 觀音聖地[한국이십삼 관광성지]

第二十三號 佛國寺[제이십삼호 불국사]

韓國觀光公社. 韓國佛敎文化事業團[한국관광공사. 한국불교문화사업단]에서..

지정하여 관광지로 많은 사람들이 잊지않고 찾는것 같기도 하였고.

문창살 무늬 섬세하며 꼼꼼해 보이는 흰 연꽃하고 붉은 연꽃으로 만들어 놓있다....

 



 

. 불국사 뒤편에 있는 동고서저[東高西低]의 형태로 자연적인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동쪽 높은곳은 관음전[觀音殿], 중간에는 비로전[毘盧殿], 서쪽 낮은곳은 나한전[羅漢殿]이 있으면서

계단방식으로 지어졌으며 북고남저[北高南低]로 관음전[觀音殿]이 불국사[佛國寺]에서 제일 높은곳에 있는 전각이다.

불국사 창건당시 토함산의 지형을 잘 이용하여 만들어진것을 알수 있었다. 

 



 

. 무실전과 대웅전을 향해 불국사 에서 제일높다는 계단을 내려갑니다..

 



 

. 무실전을 다시 돌아 보기위해 관음전을 앞에 보이는 계단을 내려선다.

불국사 관음전 출입문입니다. 뒷쪽에 있는 관음전, 비로전, 나한전은 회랑이 없고 불전만 가운데 있는형태로 되있었다..

이렇게 1부를 정리해 봅니다. 이어서 게시될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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