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2012.09.09】사과나무와 정호다완 도요지가 있는 당포리 마을 [고주골]

◈ Travelog/⊙ 출사 여행지

by 순도리(칠이) 2012. 9. 20. 09:07

본문



▣ 당포리 마을



 

 




    ○ 문경읍 당포리[唐浦里] ▣ 고주골[高主谷] , 화지리[花枝里] 고려시대[고증은 되어 있지 않으나] 고주[高州]부사[府使]가 있었던 곳이라고 하여 고주(줏)골이라 하였으며 조선시대 권수암 선생의 조카인 옥소[玉所]선생이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의 뒷산인 성주봉을 바라보니 마치 매화가 활짝 핀 것 같다 하여 고주골을 화지리로 개칭하였다 하나 현재는 화지리로 부르는 사람은 없고 고주골로 부르고 있다. 1920년 갈평[葛坪]으로 이전되기 전까지는 신북면[身北面]사무소가 이곳에 있었다. ▣ 숲마을 지금으로부터 100여년간 고주골에서 이주해 온 안동권씨들이 개척한 마을로서 마을 주위에 500년이상의 고목과 느티나무숲이 울창하다 하여 숲마을이라 불려졌으며 현재 당포리 중심마을로 발전되었다. ▣ 문경요[聞慶窯] 문경요는 성주봉 아래 당포1리 마을회관에서 200여m 위에 있다. 전통 장작 가마인 "오름가마"에 불을 치펴 다완을 주로 빚어내고 있다. 문경요를 지키며 외길 인생을 걸어온 도천 천한봉(1933년생)선생은 도자기 분야에 명장으로 인정받아 국내는 물론 특히 일본에 더 잘 알려져 있다.

 

 


 

. 당포리[唐浦里]는 본래 신북면[身北面]의 화지리[花枝里]와 산문리[山門里] 지역이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2개동을 병합하여 당포리[唐浦里]라 하였다고 하나,

두개의 한자음[漢字音]으로 보아야 하겠다.

 

화지리[花枝里]는 당포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꽃집[상여집]이 있어 고주골이라 하였다고 하며,

조선시대의 동명인 화지리[花枝里]도 꽃가지에서 땄으며, 변음되어 고지골, 고주골이 된 것으로 보인다.

 


 

. 1932년에 문경면[읍]에 편입되었으며 1980년경 주변에 있던 장자, 단봉, 석봉 등

광산경기 호황으로 번성하였으나 광산 폐광이후 외래인의 퇴거로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였다.

 

혹은 말하기를 고려시대에 고주부사[高主府使]가 있던 곳이라 고주골[高主谷]이라 한다고 하나,

고려사지리지[高麗史地理志]에는 고주부[高主府]란 지명 또는 관직이 없다.

 

살무이는 갈평으로 가는 개울 서쪽에 있는 마을이며, 우리말 살무이를 옛 조선시대 영조[英祖]때의

문경현지에는 시문리[矢門里], 정조[正祖]본에는 생문리[生門里], 고종[高宗]본에는 산문리[山門里]로

기록되었음을 볼 때, 우리말 '살무이'를 한자화 하는 과정에서 여러가지로 기재하였다고 추측된다.

 

일설에는 동리 뒷편 시루봉 위에 우뚝한 바위 세개를 옥삼[玉三]이라는 선비가 삼문[三門]이라 하였는데,

당시의 고주부사[高主府使]가 살뫼라 하여 이후로 살뫼, 살무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억지로 부합시킬 필요없이 산 좋고 물 좋은 곳이라 살기좋은 마을에서 유래되었다고 봄이 타당하겠다.

 


 

. 옥소영각[玉所影閣] 안동권씨 사당에 모셔진 영정

 

옥소[玉昭]권섭[權燮] 1671 ~ 1759

영조[35년] 조선후기의 문인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화천군파, 자는 조원[調元], 호는 옥소[玉昭],

또는 백취옹[百趣翁], 무명옹[無名翁], 천남거사[泉南居士]이다.

사헌부 집의를 지낸 육유당[六有堂] 권격[權格]의 손자로이조판사 증직된 상명[尙明]의 아들로 서울 삼청동 외가집에서 테어나

어머니는 좌의정을 지낸 용인이씨 우사[虞沙] 이세백[李世白]의 딸로 권섭에게 많은 영야을 미쳤으나 부친 권상명이 33세로

요절하니 옥소의 나이 14세에 작은아버지 권상유의 보살핌을 받아 외숙 영의정 이의현[李宜顯]과 면학하며 자랐다.

어려서 재능이 뛰어나 숙종15년 시사에 관심을 가지고 기사환국때 상소를 올리기 하였다.

그러나 분당정치 소용돌이 속에 남인과 서인의 청남과 탁남으로 분당되고 노론과 소론의 분쟁속에 원자책봉 문재로

백부인 수암권상하, 송시열, 김수항, 등 사약을 받고 주변인물들이 유배의 참극을 격으면서

이곳인 경북 문경현[聞慶縣] 신북면[身北面] 화지동[花枝洞]에 은거하여 시화에 열중 하였다한다.  

 


 

. 한올자연식품 [054-572-1900] 예사롭지않은 항아리들

많이도 있었으며 무엇을 하는곳일까..?? 된장. 간장. 고추장.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 당포1리 마을 전경이다.

바로앞에 높이 솟은 나무 앞이 당포2리 마을회관이 있는곳이다.

 


 

. 당포2리 전경이다.

조금은 이상히 여길수있는 마을 큰도로가에 있는곳이 2리 산속으로 들어가 있는곳이 1리

좀 이상해 보여도 옛날에는 이곳에 광산이 활성화 시절에는 "신북면[身北面]" 사무소가 이곳에 있었다 한다.  

 


 

. 성주봉 능선길에서 바라본 당포리마을 전경입니다.

산세좋고 물좋은곳으로 예전에 "KBS 황금사과" 촬영지 였으며 장수마을로도 보여진다.

 


 

. 멀리는 문경읍내와 조령산 백두대간 능선이 보인다.

 


 

. 이곳은 고주골 법장터 암자터로 이어지는 길로 옛날에는 광산도 있었다고 한다.

 


 

. 우축으로 보이는길은 조항령으로 오르는 임도길 넘어가면 김용리로 넘아 갈수도 있는것 같다.

이곳에 있었던 암자 어떤 이유로 능선 넘어로 이사를간 절이 김용리에 있는 김용사라고도 전해진다.. 

 


 

. 아늑하게 고주골 골짜기 안으로 들어선 사과밭들 성주봉 능선이 앉고 있어

사과의 결실이 잘되어 사과 고정으로도 이름이 알려진듯해 보인다.

 


 

. 도예명장 도천[陶泉] 천한봉[80] 선생의 문경요[聞慶窯]

 

경상북도 문경에는 대한민국 도예계의 거목 도천[陶泉] 천한봉 선생님이 「문경요」를 지켜오고 계십니다.

[현재는 따님이신 천경희 님이 대표로 문경요를 운영하고 있으며 반죽실에서 반죽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외 모든것들 사진 촬영 금지구역 입니다.

천한봉 선생님은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으로 도자기 문화가 단절되고 값싸고 편리한 스텐레스와 플라스틱

그릇에 사기 그릇이 밀려나는 어려움 속에서도 전통을 지켜나가기 위해 애쓰셨던 분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도공들과 함께 건너가 일본의 국보로 지정된 조선시대 막사발을 완벽히 재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요.

천한봉 선생님의 사발들은 국내에서 보다 오히려 일본에서 더욱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데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국내 도자기 문화가 많이 위축되고 단절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어 아쉽기도 합니다.

 

이런 천한봉 선생님의 찻사발 일본의 국보로 지정된 조선시대 그릇인 정호다완[井戶茶宛] 처음으로 재현한것을

문경시 문경읍 당포리 문경요 도천 도자미술관에서 만날수 있었다.

 


 

. 망뎅이 가마

간다히 설명한것은 망뎅이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 이라고는 하는대 궁금증은 더해만 간다.

 


 

. 도천 천한봉의 역정과 도천도자미술관

 

도예명장이자 경북도 무형문화재 보유자인 천한봉(80). 호는 도천[陶泉]이다.

도천도자미술관은 248㎡ 규모로 건립되었다. 8억원의 사재를 털어 만든 이

미술관에는 도천이 66년간 만든 작품과 문경지역 도자기 20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한국 전통도예의 脈 문경요[聞慶窯]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도요지는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다.

그 원인은 풍부한 양질의 태토와 장작 등 도자기를 만드는 원료를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근대 산업화 과정에서 전통 도자기는 서구의 실용주의 문화에 밀려 대부분 사라졌고,

서민생활자기를 주로 만들었던 문경 지역에서 집단적으로 전통망뎅이 장작가마를 사용한 전통도예촌이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문경을 대표하는 문경요는 아시아 최고의 문화인물로 선정된 도천 천한봉 명장이 서민적 예술혼을 실현하기 위해서 설립했다.

천한봉 명장은 20세기 초 당대 최고의 도공으로 불렸던 故 김교수 선생 등 명망있는 조선 도공들로부터 사사받았으며,

외국에서는 "조선의 마지막 도공"으로 불리우고 있다. 경상북도 무형문화재인 도천 천한봉 명장은 14세에 도예에 입문한 이후

지금까지 70여년 동안 사라져간 전통 도예기법을 되살리고, 후진 양성에 힘을 쏟는 등, 전통 도예문화에 평생을 바쳐왔다.

 

"문경전통찻사발축제"의 시원이 된 도천 천한봉 명장의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이념과 전통 도예기법은

현재 문경요 대표인 2대도천 천경희 도예가에게 전수되어 내려오고 있다.

천경희 도예가의 작품은 고전과 현대의 조화 속에 소박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특징이다.

 

옛 도공들의 혼과 기술을 토대로 실용적인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 2대도천 천경희 도예가는 전통도예의 보편화에 열정을 쏟고 있다.

전통은 단순히 흘러간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고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마당에 있었는대 사진은 담지 못하였다. 검색 하시면 더 좋은 설명이 있을것입니다.

 


 

. 사진상으로 보이는 봉우리를 산행 하며 찾게된 당포리 마을

어느마을에 견주어 보아도 이같은 조상들의 얼이며 문화제 가치를 지닌 도천 천한봉 선생님의 혼이 담겨져있는 마을이

아름답게만 만드는것 같았으며 물좋고 산세좋은곳으로 장수마을로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 마을길 한켠에서는 범꼬리 꽃의 활짝피어 찾는이를 반갑게 하고있으면서.

 


 

. 또한 자귀나무 열매 익어가고 있었으며....

자귀나무는 이른봄에 꽃을피우는대 그 자테 또한 아름다운 나무입니다.

 


 

. 코스모스와 함께 굴뚝도 신세대의 물결을 이기지 못한듯해 보인다.

 


 

. 해바라기꽃으로 당포리의 햇빛을 바라고 있으면서 옛 고장의 향기가 물신풍기고 있었던곳..

 


 

. 너울너울 춤추는 모습으로 오늘을 반기고 있으면서 마을 주민들의 건강해지는것 같았다.

 


 

. 종지봉과 함께 어께를 견주면서 빨리 햇볕을 맞이할려 두팔벌려 너울너울 하늘로 올라 갈려한다.

 


 

. 정겹게만 느껴지던 마을 해저물어 갈때쯤은 엉낙없이 소독차 지나간다.

당포리 유일한 휴계소 연탄은 않팔아도 구멍가개로 마을주민들의 정거장 역활을 하고 있었다.

 


 

. 당포리 휴계소 주소 당포길 106호 랍니다.

어떤분의 아이디어인지 문화의 마을답게 솜씨있는 배치로 보잘것없어 보이는 화분으로 아름답게도 만들어 놓았군요..

 


 

. 당포리 마을은 종지봉과 성주봉의 정기를 받아 옛날 선비들도 그냥 지날수 없었다고 한다.

 


 

. 아직도 피어 오르는 소독차 뿌연 연기 그모습은 고향의 분위기로

느티나무숲으로 편안함을 함께 더해준다.

 


 

. 마을 입구지만 느티나무숲으로 향기로움을 풍기는 고향길 같아 보인다.

 


 

. 사랑방의 향기를 풍기는 느티나무숲 제일 나이먹은 나무 앞에는 보호수란 안내표지가 붙여져 있었다.

정자는 마을 주민들의 숨터로도 이용되는것 같았지만 지금은 관리가 않된것 처럼보인다.

 


 

. 문경사과의 고장처럼 당포리에도 많은 사과밭과 좀 이른듯한 사과들 아름다운 색으로 포장돠고 있었다.

 


 

. 한적하고 아늑한 마을 당포리마을 느티나무숲이 있으면서

옛전  KBS "황금사과" 드라마도 이곳에서 촬영되어 마을이 새상에 알려지기도 하였다.

 


 

. 어린시절 고향길 같은느낌 저곳으로 올라가면 당포1리 이곳또한 정취를 느낄수 있었습니다..

 


 

. 마을길 한편으로는 자동차 지나고 옛이야기 나누며 걸음을 걷고 싶어만 진다.

 


 

. 무엇인가 생각하게 하고... 무엇인가 얻을수있어 보이며....

 


 

. 나는 그냥 마냥 걷고만 싶어진다.

황금사과로 유명한 고장 드라마로 알려진 마을 당포리 언재곤 다시 찾아 보고싶어 진다.

 


 

. 언재 황금사과로 변했을대 다시 찾아올거란 생각으로 오늘을 마무리 하고만다.

당포리의 전설과 당포리의 고귀한 유산인 고주골의 전설과 도요지의 맥락으로 명장이 있는 마을 당포리 잊지못할것이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