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포 장릉 [세계유산 조선왕릉]
◎ 여행장소 : 경기도 김포시 장릉로 79 [풍무동 산141-1]
◎ 여행일자 : 2012년 07월 15일 [월요일]


○ 추존왕 원종[元宗] 장릉[章陵]
♧ 생몰년도 : 1580년 ~ 1619년 생애 이야기
원종은 1580년(선조 13) 6월 22일 경복궁 별전에서 선조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1590년(선조 23) 11세에 가례를 올렸다. 어릴 때부터 용모가 남다르고 태도가
신중하였으며,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가 남달랐다고 한다.
임진왜란으로 피난길에 올라 험난한 시기를 겪고 1595년(선조 28) 겨울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1608년에는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로부터 7년 후 원종의 셋째 아들 능창군을
황해도 수안군수 신경희가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무고로 인하여 커다란 옥사가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능창군은 강화도로 유배당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원종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그 후 원종은 몸져누워 1619년(광해군 11)
12월 29일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일화
원종은 임진왜란 때 부왕 선조를 모시면서 험난한 일을 겪었으나, 나이가 아직
어렸음에도 의연한 태도로 이에 대처하여 모두가 그를 기특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 중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전란의 한가운데에 선조는 의주로 피난을 떠나게 되었다. 이 때 신하들에게 명하여
정원군(원종)을 영변으로 데려가 왜적을 피하도록 하였다. 그 때 정원군이 영변에
이르러 울면서 말하기를, “이곳에 온 것은 내가 살기 위해 온 것이 아니고, 임금님의
명령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왜적의 형세가 날로 성하고 임금의 행차는 날로 멀어지니,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된다면 임금과 신하가 죽음과 삶을 같이 하지 못할 것인데,
이 몸이 간들 어디로 가겠습니까? 죽더라도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선조는 이를 전해듣고 가상히 여겨 정원군을 다시 불러왔으며, 그 뒤로 정원군은 선조
곁을 떠나지 않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를 옆에서 모셨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종결되고
서울에 돌아오자, 1604년(선조 37)에 선조를 호종한 공으로 호성공신에 봉해졌다.
○ 인헌왕후(仁獻王后) 구씨
♧ 생몰년도 : 1578년 ~ 1626년 생애 이야기
인헌왕후는 능안부원군 구사맹의 딸로 1578년(선조 11) 4월 17일 태어났다.
1590년(선조 23) 정원군(훗날 원종)과 가례를 올리고 연주군부인에 봉해졌다.
첫째 아들인 능양군이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르자, 1623년(인조 1)에
연주부부인으로 진봉되었다.
그러나 셋째 아들 능창군이 역모에 휘말려 유배 후 스스로 목숨을 끊고,
이에 충격을 받은 남편이 일찍 세상을 뜨는 등 불행한 일이 잇달아 일어나자,
1626년(인조 4) 1월 14일 경희궁 회상전에서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훗날 이조판서 이귀의 주청으로 부군인 정원군이 원종으로 추존됨에 따라
인헌왕후로 추봉되었다.
※ 출처 : 문화재청 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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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릉 숲속길을 걷다보면 릉침 부근에 소나무숲속이 나오는대 이곳에는 약수터 만들어져 있었으며
휴식 공간도 만들어 놓아 찾는 사람들의안식을 주는것 같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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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오늘 날이라 이미 작은계곡에도 수량이 많이 늘었으며
얼마 안떨어진 연지로흘러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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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역에 조성된 산책로는 녹음이 우거지고 새소리가 들리는등 자연을 한껏 느끼게 한다..
또한 오늘 산책길에 천연기념물인 "오색 딱다구리" 날아 가는것도 보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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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전 계시글에서 보았던 산책길과 만나게 되는 산책길 소나무길이 인상에 많이남는 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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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침 공간에 도착하였으며 보이기 시작 하는 장릉 모습입니다..
홍살문 앞에는 웬 흙더미...모래같은 마사토..보수를 위한것 같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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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살문 앞에 섰습니다..
어늘 왕릉에나 있는 참도.배위터. 이곳도 변함없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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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위터를 한번더 사진에 담아 봅니다.
다른 왕릉에 들렀을때 와는 달리 깨끗한 모습 잘 관리되어 보였으며
입구에서는 특이 하게도 능침에 올라가는것을 막더군요.. 그러니 더욱더 궁금해 지는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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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개와 더불어 능침을 바라 본다...
그런대 능침에는 흰고깍을 쓰고 있다.. 무엇때문일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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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형에 따라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참도와 정자각, 수복방과 더불어 왕릉의 위용을 함께 하는듯해 보인다.
또한 잘 관리되어진 잔듸 갈끔한 건물들 모두가 깨끗해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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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듸밭에 영양소 공금을해 주는 물건 같아 보인다..,
봄부터 가뭄에 시달린 잔듸들을 위함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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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릉은 재실과 멀리 더어져 있지만 수복방이 잘복원되 있어 관람의 가치성을 한결더 하는듯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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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자각, 웅장함과 함게 왕릉의 가치성 또한 깔끔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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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자각 올라 재향공간의 신도문을 바라보며 능침을 바라본다..
능침엔 흰고깔.. 잘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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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복방을 바라 봅니다.. 이왕이면 문좀 열어 놓았으면 한다....외부만 신경을 서놓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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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가 모셔진 비각과 함께 근간에 발굴된 비좌 설명 안내판과 함께 전시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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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도와 신도.. 생김새는 모든 왕릉은 같아 보이나 그웅장함을 이곳부터가 다르다.
그러나 이곳은 추존왕릉 이라 좀 조촐해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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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국 원종대왕 장릉 인헌왕후 부좌
[朝鮮國 元宗大王 章陵 仁獻王后 附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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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종왕[左]과 인헌왕후[右] 능이다.
원종[元宗 1580~1619]은 제14대 선조의 다섯째 아들로 추존되기 전의 군호응 정원군이며.
첫째 아들인 능양군[인조]이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르자 대원군에 봉해졌고 1632년[인조10]왕으로 추존됐다.
어렸을때 부터 용모가 빼어나고 태도가신중했으며 효성과 우애가 남달라 아버지 선조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피난길에 올라 선조를 호종한 공으로 1604년[선조37] 호성공신에 봉해졌다.
인허왕후[仁獻王后 1578~1626]는 능안부원군 구사맹의 딸로 1590년[선조23] 정원군과 가례를 올리고 연주군부인에 봉해졌다.
1632년 정원군이 원종으로 추존됨에 다라 인헌왕후로 추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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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릉에 능침공간은 넒은 공간으로 원래는 육경원[毓慶園]으로 인헌왕후를 모시는 가운대
이듬해에 양주 곡창리에 있는 정원군의묘 "흥경원[興慶園]"에 있던 묘지를 이곳에 합장하여
장릉이라고 칭 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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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자각 주변을 살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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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자각 뒷면 신도가 보이며 신도는 재향을 올릴때 정자각으로 신께서 내려왔다
다시 능침으로 돌아가는 길로써 신 만이 다니는 길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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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도를 담아 보았습니다..
예전에는 이러하듯 신을 신성시 여기며 모든 배려로 잘 모신다는 의미로 각별히 다루어 진듯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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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자각 재향당시 임금께서 하사 하신 축문등을 제사를 마친후 불로 태우기 위해
먕료위로 가는길 서쪽 계단이며.... 이곳은 참도 처럼 어도와 신도는 없으나 제주가 오르내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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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자각 내부의 모습에 제향을 지내기 위해 제수용품들을 차려 놓는상이며
제상[祭床] => 제사 때 제물을 차려 놓는상
축상[祝床] => 제향 때 축문을 올려 놓는상
향상[香床] => 제향 때 향로와 향합을 올려 놓는상
관세상[盥洗床] => 제향 때 제관이 손을 씻을 물을 올려 놓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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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자각에서 바라본 홍살문있는 참도를 바라본 사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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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자각 내부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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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도로 어도와 신도가 함께 있는 동쪽에 있는 계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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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각과 육경원[毓慶園] 비석의 비좌를 바라봅니다..
관람후 이쪽으로 하능 할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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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정리와 복원된 수복방 이곳에서 능을 지키던 수복장들이 묵었던곳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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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원군의 묘를 양주 곡촌리에 장사지내며 묘[墓]를 원[園]으로 올려 "흥경원[興慶園]"이라 하였고,
인조4년[1626년]에 계운궁 구씨가 사망하자 김포에 장사를 지내어 원호를 "육경원[毓慶園]"이라 하였습니다.
이듬해 인조5년[1627년]에 흥경원을 이곳으로 천장하여 쌍릉을 만들고 원호를 흥경원으로 합하여 이르게 됩니다.
인조10년[1632년]에 들어 정원대원군을 왕으로 추존하여 묘호를 "원종[元宗]"으로 하였고
구씨도 왕후로 추존되어 인헌왕후라 하였으며 능호를 "장릉[章陵]"이라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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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자각 동쪽 방향입니다..
정자각을 바라보면 이장면에서 정자각 앞면 지붕이 조금 올라간 느김이 들지요..
그것은 지으면서 기본적으로 설계 되듯해 보인다..
어느 왕릉이던 가보면 이런 형식으로 지어져 있었기에 나름대로 이해 하자면
정면이라 앞이 잘 보이고 들어오는 의미가 있는것 같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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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 가지만 개방 되있어 능침 공간 까지는 올라 가지는 못하였으나
왜냐면 관리소 입구 정문부터 카메라 들고 들어가니 능침에 올라 갈려면 관리소에 신고 하시고
올라 가야 한다면 강조 하더군요.. 그래서 승인을 받아볼 요량으로 관리소 들러 보았지만 왕고히 반대 하였으며
사진을 담는다 하여도 불러그 올려놓는것 조차 사용료를 내야 한다는 이야기로 학술적인 관계외에는
일채 승락을 할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방법은 없을것 이라고 하내요 ....??
얼른 이해는 않되지만 관리 하기위함은 박수를 보낼것 이지만 조금은 이상 것을 볼수 있었습니다..
벌쩍뒤면서 입장 불가 이야기 하였으며 능침을 하얀 곶갈을 쒸워 놓은것...?? 의문이 들더군요.. 무슨일이 있었나...?
이후 안내하시는분에게 여주어 보니 이번 장마에 문어 질까봐... 덮어 놓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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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번 원종대왕능 ②번 인헌왕후능
들어 갈수 없으니 자료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능침에 있는 석조물들중에 보면
작명등은 팔각모양 구조물, 망주석, 문인석, 무인석, 석호, 석양, 석마, 혼유석,등
그외 능상에는 능받침돌만 있을뿐 지대석, 난간석, 병풍석,등이 보이지 않았 추존왕 이라 그런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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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경원[毓慶園] 비석 받침돌 [2007년 9월18일 출토]안내판을 읽어 봅니다..
추존된 원종의 비 인헌왕후 구씨가 인조 4년 1월14일[成年] 승하전 인조 즉위년에 연주군부인에서
종실대군의 처에 해당하는 연주부부인[연珠府夫人]으로 올리고 궁호[宮號]를 계운궁[啓運宮]으로
받은 후4년만에 49세로 승하하여 동년 3월15일[成年] 원호[園號]를 육경원이라 정하였다.
앞면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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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종의 묘지 "흥경원[興慶園]"에서 합장 하며 실존 되었던것으로 보여지는
"육경원[毓慶園]"묘비 비좌를 2007년에 출토 되었다는 비좌 입니다...
뒷면입니다...
이것을 자새히 보면 앞면과 뒷변에 있는 그림이 다른것을 알수있다.
왜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무슨뜻이 있을것도 같다...궁금해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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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자각, 수복방, 비각, 능침공간등을 한번에 바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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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앞에 있는 나무는 뽕나무로 보여지며 이렇게 큰뽕나무는 처음 보는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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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릉 관람 하면서 늠침공간은 올라 가지 못하여 사진은 담지 못하였으나.
비오는 날이라서 인듯 인적이 드물어 한층더 조용함과 함께 편안함을 주는것이 침소에서는 안식이 될것으로 보여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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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 구간을 한바퀴 돌아 내려와 금천교로 보이는곳에서 마지막 사진을 담고는 돌아 섭니다..
다른 왕릉과는 달리 나무의 수종들이 다양함을 느꼈으며 소나무 숲속에서는 새소리와 물소리.가 느껴지는 공간이였음을 잘 보았습니다.
또한 보전을 위해 완고히 입장을 막고서는 관리인들 그 분들의 노력이 있기에 지금까지도
아름다운 문화재들을 보호 하지 않았을까 생각을 하게되기도 하였습니다.. 감사 합니다..
다음으로는 장릉 연지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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