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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04】조선 제9대 성종왕의 원비 공혜왕후의 능 순릉[順陵]

◈ Travelog/⊙ 고찰 문화재

by 순도리(칠이) 2012. 6. 5.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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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주 삼릉[세계유산 조선왕릉]



 

 



      ◎ 여행장소 :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삼릉로 89. ◎ 여행일자 : 2012년 05월 28일 [월요일]

    ○ 공혜왕후[恭惠王后] 1456년[세조 2]∼1474년[성종 5]. 조선 성종의 비. 본관은 청주[淸州]. 영의정 상당부원군 한명회[韓明澮]의 딸이며 공릉에 장순왕후와 자매 사이다. 1467년[세조 13] 12세의 나이로 자울산군[성종]과 가례를 올려 천안군 부인이 되었다. 1469년[예종1] 성종이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으나 1474년[성종5]에 자녀없이 19세의 나이로 승하 하였다. 1474년 소생이 없이 죽자 ‘공혜(恭惠)’라는 시호가 추증되었고, 그뒤 1498년[연산군 4] ‘휘의신숙[徽懿愼肅]’ 이라는 휘호가 올려졌다. 능호는 순릉[順陵]이며 파주에 있다. 종묘에 봉안되었다. ※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삼릉은 숲이 울창하여 이꽃왜에도 다른 꽃들이 만개 하여 관람은 물론이고

산책의 줄거움을 더해 주는듯 하였습니다...

 


 

. 순릉은 공혜왕후 능이다.

 

○ 지정번호 : 사적 제205호   

○ 조성시기 : 1474년[성종 5]

 

순릉은 조선 9대 성종의 원비 공혜왕후의 단릉이다.

전체적인 상설제도는 공릉과 같지만 순릉은 왕비의 능이므로 공릉에 비해서는 석물이 많이 있다.

순릉의 장명등은 공릉의 것과는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어 세부적인 모습은 조금 다르지만

조선 전기 장명등의 전반적인 모습을 잘 드러내주고 있는 점에서 비슷하다.

 

문무석인은 좌우 1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순릉의 무석인은 머리에 투구를 쓰고

양손으로는 칼을 잡고 무관의 갑옷을 입고 목을 움츠린 모습이다.

갑옷의 선은 뚜렷하지만 얼굴은 다소 경색된 표정을 하고 있다.

 

정자각의 오른쪽에 있는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공혜왕후의 비가 있다.

비에는 전서(篆書)로 「조선국 공혜왕후 순릉(朝鮮國 恭惠王后 順陵)」이라고 쓰여 있고,

1817년(순조 17)에 제작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순릉의 금천교가 원형을 잘 보전하고 있으며 현재의 진입 모습은 변형된 것이다.

 


 

. 홍살문.배위터. 참도. 정자각을 비리보니 왕릉으로 갖추어야할 모습은

왕릉의 모습에서 빠짐이 없어 보였습니다....[펜스는 발굴작업중]

 


 

. 다른곳과 달리 보이는 정자각 마당이 있는듯해 보인다..

마당없이 바로 참도로 이어져 정자각 우축으로 신도와 어도를 오르게 되있지만 마당이 크게 만들어져있다.

 


 

. 순릉을 방문 하였을때 지금은 없었지만 수복방. 수라간.

바굴 작업을 진행중이라 조심 스럽게 관람 하였습니다.

 


 

. 발굴 작업하며 나온 흙들과 작은 기와 조각들을 한쪽에 모아 놓았더군요...

 


 

. 정자각 우축으로 돌아가 신도와 어도를 [동계]를 봅니다.. 별 다름은 없어 보입니다..

 


 

. 순릉[順陵]

 

조선 제9대 임근 성종[成宗 1457~1494, 재위 1469~1494]의 첫번째 왕비 공혜왕후 한씨[恭惠王后 韓氏 1456~1474]의 능이다.

공혜왕후 역시 영의정이자 상당부원군인 한명회[韓明澮]의 딸로 예종의 비인 장순왕후[章順王后]와는 자매 사이이다.

12세에 혼인하여 14세에 왕비가 되었으나 자손 없이 19세인 1474년[성종5]에 세상을 떠났다.

같은해 6월에 자매인 장순왕후가 안장된 공릉의 왼쪽 언덕에 모셔졌다.

시호는 공혜[恭惠]이며 능 이름은 순릉[順陵]이다.

능침은 파주삼릉중에서 유일하게 조성 당시부터 왕릉으로 만들어졌으며 본분 주위에 난간석이 둘러져 있다.

성종왕 능은 선릉역 있는 부근에 선릉에 있다.

 


 

. 비석 입니다..

 

조선국[朝鮮國]

공혜왕후순릉[恭惠王后順陵]

 


 

. 이곳과 가까운곳에 있는 서오릉.서삼릉. 등등에

왕릉과도 같아 보이는  정자각 뒤면에 신도 같아 보인다.

 


 

. 공혜왕후 일화로써는

 

한명회에게는 슬하에 아들이 1명, 딸이 4명 있었는데, 그 중 넷째 딸이 공혜왕후이며,

공혜왕후가 잠들어 있는 순릉 바로 옆의 공릉에 잠든 장순왕후가 바로 셋째 딸이다.

두 사람은 자매간이었지만 왕실에서는 언니와 동생 사이가 아닌 시숙모와 조카며느리의 사이가 된 것이다.

자매가 나란히 왕비에 오른 예는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 전무후무한 일으로서, 한명회의 권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 정자각 내부의 모습 제실입니다..

 


 

. 정면에서 바라봉 내부와 뒤로는 신도가 일직선 입니다.

 


 

. 공혜왕후 한씨[恭惠王后 韓氏1456년 ~ 1474년]

 

공혜왕후는 1456년(세조 2) 10월 11일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막내딸로 연화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공릉에 묻힌 장순왕후와는 친자매 사이였다.

1467년(세조 13) 1월 12일 12세의 나이로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자울산군과 가례를 올려 천안군부인이 되었다.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왔으나 예의 바르고 효성이 지극해 세조비 정희왕후, 덕종비 소혜왕후,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의 귀여움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왕비의 자리에 오른 지 5년 만인 1474년(성종 5) 4월 1일 열아홉의 나이로 소생 없이 창덕궁 구현전에서 승하하였다.

“죽고 사는 데는 천명이 있으니, 세 왕후를 모시고 끝내 효도를 다하지 못하여 부모에게 근심을 끼치는 것을 한탄할 뿐이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전한다. 순릉의 지석에는 공혜왕후에 대한 다음과 같은 평가가 전한다.

왕후는 나면서부터 남달리 총명하였으며, 조금 커서는 온화하고 의순하며 숙경하였다.

 

1467년 세조가 성종을 잘산군으로 봉하고 배필을 가릴 때 뜻에 맞는 사람이 없었는데,

왕후가 덕 있는 용모를 지녔음을 알고 불러 보고서 혼인을 정하였다. ......

왕후를 들여와 뵈이니 언동이 예에 맞으므로 세조와 대왕대비가 매우 사랑하였다.

그 때 왕후는 나이가 어렸으나 노성한 사람처럼 엄전했으며,

늘 가까이 모시되 경근하기가 갈수록 지극하니 이 때문에 권우가 날로 더해갔다.

 


 

. 발굴작업중에 나온 기와 조각들 빗살문양까지 선명한것이

심상치 않아 보인다.. 발굴과 함께 복원도 한다는 안내문도 있더군요..

 


 

. 왕릉묘로써 가춰야 할것들중에 없어 보이던 수복방과. 수라간이 복원이 된다면

왕릉의 변묘를 갖추므로써 위멍을 볼수있을것 같았습니다..

 


 

. 능의 역사는

 

공혜왕후는 1474년(성종 5) 4월 15일 승하하여,

시호를 공혜, 능호를 순릉이라 하고 같은 해 6월 7일 현재의 위치에 안장하였다.

 

또한 파주 삼릉 중에 왕비로써 죽움을 맞이하여 처음부터 왕릉격에 맞는 능을 만들었으며

지대석. 난간석. 무의서. 문인석. 망주석. 장명등.등등 왕릉에 있는것들 모두 설치되있다..

그러나 저는 능침까지 올라가지 못하여 멀리서 담았으며 지금은 공사중[발굴작업] 때문입니다..

 


 

. 정자각앞에서 홍살문을 바라본다

참도는 다른곳은 신도와 어도 분리되있지만 그런것을 볼수가 없다...

 


 

. 꽃들도 제철을 맞으며 활짝 얼굴을 내밀어 봅니다.

 


 

. 순릉도 관람을 마치고 뒤돌아섭니다...

울창한 숲길이 더욱더 아름다웠던 순릉이렇게 보아도 왕릉으로서 보습이 아름답다... 

 


 

. 금천교를 돌아 나갑니다..공사 진행중이라 능침 공강에 올라가지 못한 아쉬움에

다시 찾아 보아야 할것으로 첵크해 놓았습니다. 

다음으로는 영릉을 향할것입니다...

 

=◑===다음은 영릉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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