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2012.06.04】추존왕 진종왕과 효순왕후의 쌍릉인 영릉[永陵]

◈ Travelog/⊙ 고찰 문화재

by 순도리(칠이) 2012. 6. 6. 14:57

본문



▣ 파주 삼릉 [세계유산 조선왕릉]



 

 



      ◎ 여행장소 :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삼릉로 89. ◎ 여행일자 : 2012년 05월 28일 [월요일]

    ○ 진종[眞宗] 진종[眞宗]은 제21대 영조1724년[영조 즉위] 경의군[敬義君]에 봉하여지고 맏아들로 1725년[영조1] 이듬해 7세의 나이로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1727년[영조3] 가례를 올렸으나 10세에 세상을 떳다. 영조는 진종[효창세자]의 이복동생 사도세자를 왕세자로 삼았으나 사도세자는 당쟁에 휩싸여 영조의 명으로 뒤주에 갇혀 죽고 영조의 아들이 정조가 왕위를 이었다. 정조가 즉위함에 따라 효창세자는 정조의 양부[養父]로서 진종으로 추존 되었다. 1719년[숙종 45]∼1728년[영조 4]. 조선시대의 추존왕[追尊王].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행[緈], 자는 성경[聖敬]. 영조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정빈 이씨[靖嬪李氏]이고,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형이며, 비는 좌의정 풍릉부원군 조문명[趙文命]의 딸 효순왕후[孝純王后]이다. 능은 영릉[永陵 , 파주]이며, 시호는 효장[孝章]이다. ○ 효순왕후[孝純王后] 효순왕후[孝純王后]에 대하여 1715년[숙종 41]∼1751년[영조 27]. 풍양조씨[豊壤趙氏]로, 조선 진종 추존왕 효창세자[眞宗 , 追尊王孝章世子]의 비[妃]. 풍양조씨[豊壤趙氏]로 좌의정 문명[文命]의 딸이다. 1727년[영조 3] 9월 27일 세자빈에 간택되어 효장세자[孝章世子]와 가례[嘉禮]를 올리고, 1735년 현빈[賢嬪]에 봉하여졌다. 소생은 없었으나 죽은 뒤 1752년 효순[孝純]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1776년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장남[뒤의 정조]을 입양받아 승통세자빈[承統世子嬪]의 호를 받았다가, 정조의 즉위로 왕비로 추존되었다. 능은 파주에 있으며, 능호는 영릉[永陵]이다. ※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파주 삼릉 관리소 안내 책자에는 "효순소황후[孝純昭皇后]"로 되어있으나 정보는 없다... 왜 일까.?? 궁금해 진다..

 

 


 

사진으로 본 산행기

 

. 망료위 제사를 마친후 축문.지방을 태우는 자리입니다...

 


 

. 올려다본 능침공간 아늑하게만 보이내요...

 


 

. 정자각 서계도 보입니다... 저곳으로 제관이 오르내리던 계단입니다..

 


 

. 정자각 내부를 정면에서 봅니다..

다른곳 정자각들과 다른것은 없어 보인다. 아마도 조선시대의 왕릉들은 모두가 같은 모양을 지니고 있다.

 


 

. 정자각 뒷면에 보이는 신도 이곳은 능에 모셔진 신께서 드나드는 길이라고 합니다. 

 


 

. 능산 앞에서 전자각을 내려다 봅니다.. 정면으로 바라보니 신이 내려다 보는 느낌이 든다.

 


 

. 영릉[永陵]

 

영릉은 추존왕인 진종[眞宗 1719~1728]과 효순왕후 조씨[孝順王后 趙氏]의 능이다.

진종은 조선 제21대 왕인 영조의 맏아들이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이북형이다.

1725년[영조1]에 왕세자가 되지만 1728년 10세의 어린나이로 돌아가셨다.

이후 효장[孝章]이라는 시호를 받아 효장세자[孝章世子]로 불리였다.

 

효순왕후[孝順王后]는 1727년[영조3]에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

1751년에 돌아가신후 먼저 세상을 떠난 만편 진종의 옆자리에 모셔졌으며 효순[孝順]이라는

시호를 받아 효순현빈[孝順賢嬪]으로 불리게 되었다.

 

효장세자와 효순현빈은 돌아가신 후 두차래에 걸쳐 추존되었다.

영조는 1762년[영조38] 사도세자를 폐위 한후, 당시 세손인 정조를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이에 따라 효장세자와 효순현빈은 정조[正祖 1752~1800. 제위 1776~1800]가 왕이 된후에

진종과 효순왕후로 추존되었으며. 무덤 이름도 영릉[永陵]으로 부르게 되었다.

 

1908년에는 대한제국 황제인 순종에 의해 황제와 황후로 다시 한번 추존 되었다.

이러한 추존 과정은 영릉에 있는 3기의 표석에 자세하게 기록되어있다.

영릉은 처음에 왕자묘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난간석과 무석인이 없다.

 


 

. 추존왕 진종[眞宗]

 

○ 지정번호 : 사적 제205호   

○ 조성시기 : 1729년[영조 5]

 

영릉(永陵)은 영조의 큰 아들 진종과 비 효순왕후의 능이다. 쌍릉으로 조영되었다.

진종은 세자의 신분으로 어린 나이에 요절하였다가 훗날 진종으로 추존되었기 때문에,

능 또한 세자묘의 예를 따라 조영되었다가 훗날 왕릉의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봉분의 병풍석과 난간석은 생략되었고, 봉분 주위에는 석호와 석양, 문석인이 한 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석인은 조선 전기의 능인 공릉에 비해 다소 마르고 작은 편이다.

관모를 쓰고 양손으로는 홀(笏)을 쥐고 있으며 얼굴에 비해 몸은 왜소한 편이다.

관복의 소매는 길게 늘어져 있고, 팔꿈치 부근에는 세 줄의 주름이 새겨져 있다.

문석인과 함께 중계(中階)에 배치된 석마 역시 조선 전기와는 다른 형태로 겸손하게 머리를 구부린 모습을 하고 있다.

 전기의 석마는 둔중한 모습이지만 영릉의 석마는 전기의 것에 비해서는 살이 약간 빠지고 날렵한 모습이다.

하계는 생략되었으며 무석인 역시 없다.

 


 

. 추존왕 진종[眞宗 1719년 ~ 1728년]

 

진종은 1719년(숙종 45) 2월 15일 한성부 북부 순화방에 있는 창의궁에서 영조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영조가 1724년 즉위하자, 그 해 11월 3일 경의군에 봉해졌다가, 그 이듬해 3월 20일 7세의 나이로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1728년(영조 4) 11월 16일 창경궁 진수당에서 숨을 거두었다. 영조는 그 해 12월 2일 효장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효장세자가 요절한 뒤 영조는 40세가 넘어 둘째 아들을 얻자 아들이 태어난 지 1년 만에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그가 바로 사도세자이다. 그러나 영조는 1762년(영조 38) 사도세자를 폐세자시키고,

그의 맏아들인 왕세손을 요절한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켜 왕통을 잇게 하였다.

1776년 왕위에 오른 정조는 선왕인 영조의 유지를 따라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존하고, 능호를 영릉이라 했다.

 

. 효순왕후 조씨[孝純王后 趙氏 1715년 ~ 1751년]

 

효순왕후는 풍릉부원군 조문명의 딸로서, 1715년(숙종 41) 12월 14일 한성부 동부 숭교방에서 태어나

1727년(영조 3) 9월 27일 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1735년(영조 11) 현빈에 봉해졌으며,

1751년(영조 27) 11월 14일 창덕궁 건극당에서 소생없이 37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영조는 그 해 11월 19일 효순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효장세자묘의 왼쪽에 안장하였다.

 


 

. 조촐해 보이기만한 능 주변들 조성 당시 세자묘라서 일것입니다...

 


 

. 망주석

망주석에있는 동물 형상이 어느 동물형상인가 했더니

다람쥐도 아니고 ..?? 무슨 동물 형상인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 무인석은 세우지 않았다.

복두공복(頭公服)을 착용한 문인석은 얼굴에 비해 몸은 왜소한 편이다.

 


 

. 파주삼릉에서는 장명등이 세롭게 생겼습니다.

다른곳은 팔각형 모양 영릉에만 사각형 모양이다..

예정에 왕릉 포스팅에 설명이 되있습니다..

 


 

. 진종은 세자의 신분으로 어린 나이에 요절해 훗날 왕으로 추존됐기 때문에

처음 그의 무덤은 세자묘의 형식을 따라 조성됐다.

그러다가 정조대에 이르러 왕릉의 형식을 갖추게 됐다.

능에 배치된 석물을 살펴보면 봉분에 두르는 병풍석과 난간석은 생략됐고,

봉분 주위로 석호와 석양이 외호(外護)하고 있으며 봉분 앞으로는 상석, 고석, 망주석, 석마, 문인석 등이 설치돼 있다.

겸손하게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석마의 다리 사이에는 꽃무늬를 정성스럽게 장식해 놓았다.

 


 

. 비각 두개가 있다는것은 잘 설명을 해놓았으니 윗부분 비석에서 보시면 알수있을것입니다.

 


 

. 처음 효장세자묘로 되었을때의 비각입니다..

아래에 있는 비각은 이후  대왕 추준당시 비와 소황제 추존당시 비가 들어 있다.

 


 

. 1752년[영조 28] 최초 완성된 [효장세자{孝章世子]"의 묘표가 있는데,

앞면의 전서[篆書]는 효순왕후의 생부[生父]인 조문명이 쓴 효장세자 능표석.

 

조선국[朝鮮國]

효장세자묘[孝章世子墓]

효순현빈부좌[孝純賢嬪부左]

 


 

. 정조가 1789년[정조9] 친히 앞면의 진서와

뒷면의 해서를 모두 써서 세운 진종대왕[眞宗大王]의 능표석.

 

조선국[朝鮮國]

진종대왕영릉[眞宗大王永陵]

효순왕후부좌[孝順王后부左]

 


 

고종에 의해 황제로 추존된후 1908년에 세워진 진종소황제[眞宗昭皇帝] 능표석.

 

대한[大韓]

진종소황제영릉[眞宗昭皇帝永陵]

효순소황후부좌[孝順昭皇后부左]

 


 

. 능이 역사는

 

1728년(영조 4) 11월 16일 어린 나이의 세자가 승하하자 영조는 그 해 12월 2일 효장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그 이듬해인 1729년[영조 5] 1월 26일 현재의 위치인 순릉 왼쪽 산줄기 언덕에 예장했다.

세자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던 효순왕후는

1751년(영조 27) 11월 14일 창덕궁 건극당에서 소생없이 37세의 나이로 승하하였으며,

이듬해인 1752년[영조 28] 1월 22일 효장세자묘 왼쪽에 안장하였다.

 이들이 세상을 떠난 후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를 효장세자의 밑으로 입적시켰다가 그가 왕위에 오르자,

즉위년인 1776년 진종과 효순왕후로 추존되었고, 능 또한 영릉으로 추봉되었다.

 


 

. 추존왕릉 이라서 인듯 수복방터 수락간 등 터로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홍살문 만히 눈에 딱들어 온다.

 


 

. 영조가 직접 지은 진종의 행록[行錄]에 의하면

 

"[진종의] 임종에 이르러 내 얼굴을 그의 얼굴에 대고 나를 알겠느냐고 부르자

희미하게 응답하는 소리를 내며 눈물이 뺨을 적셨다. 아! 마음 아프다.

아! 내가 덕이 없어서 믿는 것이 오직 너 뿐이었고,

성품도 좋아 동방 만년의 복이기를 바랐는데,

어찌 나이 겨우 열 살에 이 지경이 될 줄 알았겠는가?" 라며

 

비통한 아비의 심정을 고스란히 잘 표현하는 장면이 나온다.

어린 아들을 잃는 아비의 마음은 왕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영조의 아픔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살아 생전에 맏며느리까지 잃게 되는 참극을 겪는다.

 


 

. 추존왕 진종[眞宗] 일화로써는

 

『영조실록』 1728년 11월 16일자 기사에는 효장세자가 죽던 날 밤, 영조가 슬퍼하던 모습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밤 3경[三更 : 밤 11시에서 새벽 1시 사이]에 왕세자가 창경궁의 진수당에서 훙서하였다.

이날 종묘와 사직에서 두 번째 기도를 거행하였는데, 밤에 병이 더욱 심해져 해시에 훙서하였다.

임금이 영의정 이광좌, 병조판서 조문명 등을 대하며 슬피 곡하며 말하기를, “종묘와 사직을 장차 어찌할 것인가?” 하고,

한참 만에 곡을 그쳤다. 임금이 일어나 안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뒤에 내시를 시켜 흑곤포[黑袞袍]를 담은

검은 함을 들려 앞세우고 임금이 뒤따라 나왔다. 어둑새벽에 예방 승지가

세자의 흑곤포를 담은 함을 받쳐 들어 내시에게 전해주니, 내시가 전[殿]의 지붕 모퉁이에 올라가 호복[呼復]하고 내려왔다.

 


 

. 영조는[영조4] 세자인 효장세자. 이후 [영조52]37세로 세자빈 효순왕후 까지 잃게 되었다.

효장세자의 이복 동생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음을 맞이 하도록 까지 하는 비운에 왕으로

이후에는 정조가 효장세자가 양부가 되면서 즉위하자 추존되었다고 한다.

 


 

. 파주 삼릉은 어린 나이에 모두가 죽음이 이루게된 공릉 장순왕후. 순릉 공혜왕후는

세조의 공신이였던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2딸로써 왕가를 누렸으며...

영릉 효장세자[추존 진종왕]과 원비 효순소왕후의 능으로 하나같이 왕이 되지못하고 추존된 왕릉으로써

예전에는 관리가 소월하지 않았나 봅니다..

 

=★=== 끝 ===★=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