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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6】백제의 숨결과 지혜을 간직한 민족지존의 터 남한산성을 걸으면서...⑤

◈ Travelog/⊙ 출사 여행지

by 순도리(칠이) 2014. 12. 5.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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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성 지화문[至和門] 남문



 

    ○ 남한산성 [南漢山城] 서울에서 남동쪽으로 25km 떨어진 산지에 축성된 남한산[南漢山城]은 조선시대[1392~1910]에 유사시를 대비하여 임시 수도로서 역할을 담당하도록 건설된 산성이다. 남한산성의 초기 유적에는 7세기의 것들도 있지만 이후 수차례 축성되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17세기 초, 중국 만주족이 건설한 청(淸)나라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여러 차례 개축되었다. 남한산성은 승군[僧軍]이 동원되어 축성되었으며 이들이 산성을 지켰다. 남한산성은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전해온 성제[城制]의 영향과 서구의 화기[火器] 도입에 따라 변화된 축성 기술의 양상을 반영하면서 당시의 방어적 군사 공학 개념의 총체를 구현한 성채이다. 오랜 세월 동안 지방의 도성이었으면서 아직도 대를 이어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도시인 남한산성의 성곽 안쪽에는 당시에 만들어진 다양한 형태의 군사,민간,종교 시설 건축물의 증거가 남아 있다. 남한산성은 한민족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하다. 남한산성의 중요성,다양성 그리고 범위는 문화유산 구성의 완전성을 뒷받침하는 근거이다. 남한산성은 분명하게 정의된 역사적 역할과 함께 산성의 구조, 옛 산성의 기능 등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문화유산의 특성을 충분하게 지니고 있다. 이 문화유산이 지니고 있는 역사와 지식, 즉 남한산성이라는 산성이 지닌 방어적 군사 공학이라는 개념의 도출에 영향을 미쳤던 다양한 요인에 대한 역사와 지식은 만족할 만큼 충분하다. 그러나 민속적, 네오애니미즘[neo- animism, 심령주의]적 성격을 띤 오늘날의 여러 활동이나 지방 분권적 성격의 활동은 유산의 완전성이나 탁월한 보편적 가치라는 측면에 있어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 ※ 출처 : 유네스코 세계유산, 유네스코한국위원회[번역 감수]

 

. 남한산성의 마지막으로“제2남옹성치[第2南甕城稚]”부터 준비 합니다.

치는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시설물 중의 하나로

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치가 설치되어 있으며, 이 중 본성에 4개, 보암성에 1개가 있다.

제남옹성치는 남장대 바로 앞에 설치되어 있으며, 남한산성네 설치된 치중 가장 규모가 크다.

남한산성은 대부분 성벽이 굴곡이 심하여 치가 별도로 필요하지 않으나 남쪽은 지형이 완만하고

성벽의 굴곡이 약하여 방어력을 높이기 위하여 설치 하였다.

그러면 이곳에 도착 하면서 도다른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옹성과 치”입니다.

※ 옹성[甕城] : 본성과 연결되어 암문을 통하여 연결이 되어있으면서 치[稚]와 비슷한 목적을 이루어지고 있다.

※ 치[稚] : 본성과 바로 연결된 돌출부로써 성벽을 적으로 부터 좌,우,앞을 보호하기 위한 설치된 돌출성이다.

 

 

 

 

. 이렇게 사진으로 준비해봅니다.

제2남옹성, 치, 암문이 구분이 되니 쉽게 이해 할 수 있을것이다.

치는 돌출부이며, 옹성은 다른 성벽을 쌓아 만들 또 하나의 성을 이야기 하는것이다. 

 

 

 

 

. 제2남옹성치 앞에 위치한“남장대터[南將臺址]”이다.

지휘와 관축을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 건물로 남한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었다. 이곳은 남장대가 있던 곳으로

성 남쪽에 있다하여 남장대라 불린다. 이 곳에는 남한산성에 주둔하던 수어청에 소속돤 5영 중 전영장을 지휘 하던곳이다.

제2남옹성 바로 안쪽에 있었던 장대로 주변 지형을 보더라도 장대가 위치할 입지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1788년[정조 12] 부윤 이태영[府尹 李泰永]이 수어장대와 같이 이층으로 고치고 타운루[唾雲樓]라는 편액을 걸었으나,

지금은 둥글게 잘 다듬어진 주춧돌만 남아있다.

남장대가 있는 이 지역을 제2남웅성치를 설치하여 장대앞이 면적을 넒힘과 동시에 3개의 남옹성을 설치한 점등을 고려해 볼때,

전략적으로 중요한 장대임을 알 수 있다.

 

 

 

 

. 남장대 앞에 이정표이다.

지화문 0.6km, 공원 관리소 1.5km, 그러니까 남문에서 관리소 까지는 0.9km나 되내요.

오늘 코스는 남문지나 관리소 까지 가면 되지만 동문에서 부터 여기까지는 1.1km 올라온 곳이다.

 

 

 

 

. 앞으로 가야할 제1남옹성 있는 부분을 바라보면서

잠시 제2남옹성치 성을 들어가 봅니다.

 

 

 

 

. 치성 바로 밑으로는 옹성이 잘 보였으며 뒤돌아 남장대터를 바라보면 인증 사진 남긴다.

다시 성벽길로 나와 다시 제2남옹성을 만난다.

 

 

 

 

. 남한산성 “제2남옹성[第2南甕城]”

옹성은 일반적으로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밖으로 한겹의 성벽을 더 둘러쌓은 이중의 성벽을 말한다.

그러나 남한산성의 옹성은 성벽의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하고, 요충지에 대한 거점확보를 위해 성벽에

덧대어 설치한 시설물로 다른 성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옹성이 있는데, 이 중에 3개의 옹성이

산성 남쪽의 완만한 지형을 보완하고 신남성으로 부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되었으며, 제2남옹성은 이 3개중 중앙에 있는

두번째 옹성이다. 제2남옹성은 둘레가 318m이며, 다른 옹성과는 달리 이중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옹성 끝에는 포대가 있는데, 그곳으로 둘어가는 홍예문이 있으며, 포대는 동,서,남 3방향으로 설치되어 있다.

본성과 연결되는 지점에는 전투시에 성내로 출입할수 있도록 암문을 설치하였다.

남한산성에 설치된 옹성 중 규모가 가장크다.

제2옹성은 발굴조사와 복원이 마무리 되지 않았내요. 잘 복원을 기원해 봅니다.

 

 

 

 

. 아직도 발굴 조사중인 제1남옹성을 먼발치에서 사진 남겨본다.

제1남옹성은 연주봉옹성 같이 길게 지형에 맞추어 멀리까지 나가면서 마지막으로 치를 만들어 놓은것이 들어나 있다.

제1남옹성은 다른 2곳의 남옹성들과 함께 병자호란 직후인 1638년[인조 16년]에 축성됐다.

제2남옹성과 제3남옹성의 포루가 청나라와의 외교적인 문제로 축조 이후 곧 헐어내고 다시 축성했다.

하지만 제1남옹성은 초축 당시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제1남옹성, 남쪽 관망 전망대 역할 제1남옹성은 남한산성 옹성 가운데 유일하게 옹성 내부에

장대를 설치돼 본성의 수어장대와 나머지 남옹성 사이에 연락을 취할 수 있게 한 점이 주목되고 있다.

제1남옹성의 기록은 축성 이후 고지도첩에서 보인다. 고지도첩남한산도

제2남옹성과 제3남옹성은 옹성으로 표기돼 있다. 반면 제1남옹성은 남포루로 표기돼 있다.

 중정남한지에서 보이는 1779년[정조 3년]의 증,개축에 대한 기록은 포루부분의 여장에 대한 개축으로 추정된다.

 

 

 

 

. 제1남옹성은 이렇게 들어나 있지만 끝부분에는

치루가 있던것으로 보이는 높은 부분이 보이기도 합니다..

 

 

 

 

. 제1남옹성 전망대에서 뒤돌아 지나온 암문을 바라 봅니다.

제2남옹성, 제2남옹성치 암문이 또렸하게 보인다.

 

 

 

 

. 이잰 멀리 보이는 성벽끝으로 지나면 남문인 지화문을 만나게 된다.

남한산성 성벽길 중에 제일 한적한 부분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곳이기도 합니다.

지나면서 운동을 하기 위한 몇 사람뿐 한적합니다.

 

 

 

 

. 이젠 남문이 보입니다.

저곳에서 또다른 친구분들을 만나기 위해 불친인 일행 효령대군님은 먼져 내려 갑니다..

지나면서 성벽에는 천막을 씨워 놓았더군요 습기로 인해 소실일 될것 같기도 한대 왜 그랬을까.

관리 차원이라면 다시한번 더 생각을 해야 할것 같다.

 

 

 

 

. 친구분 만났습니다.

초딩 친구로써 얼마전부터 자주 만남 자리를 준비중 인것으로 보입니다. [동창회..]

 

 

 

 

. 남문에 도착 하면서 이젠 얼마남지 않은 성벽길 아마도 0.6km이어 올라가면

오전에 출발지였던 수어장대 있는 곳을 만나게 되지만

또 다시 다음으로 미루고 관리소 주차장으로 마무리 할려 합니다..

 

 

 

 

. 남문 우축으로 위회하여 성문 앞으로 가던길에

울타리 넘어로있는 수많은 돌탑들 그정성이 가릇하여 사진 한장 남겨 봅니다.

산성내에는 마을이 있으며 현재까지도 초등학교까지 운영 되는것을 보아 옛날부터 이어온 자손들 인듯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아마도 장사의 목적을 두고 마을이 유지되고 있는것으로 보인다.

 

 

 

 

. 남한산성의 정문격인 지화문[至和門]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남문은 남한산성에 있는 4대문중에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으로 현재에도 출입이 가장 많은 곳이다.

선조때의 기록을 보면 동문, 남문, 수구문의 3개문을 수축하였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남문은 인조 2년[1624] 수축되기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것임을 알수 있다. 남문은 정조 3년[1779] 성곽을

보수할 때 게축하고 “지화문[至和門]”이라 하였다.

1976년 문루를 복원하였고 2009년 정조의 글씨를 집자하여 전면에 현판을 설치 하였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처음으로 남한산성에 들어올때 바로 이 문을 통해서 들어왔다고 한다.

다시 남문에서 조금 내려가면서 비석군을 만난다.

 

 

 

 

. 남한산성 비석군[南漢山城 碑石群]

성 내부에 18~20세기 무렵에 설치된 39기의 비석이 있다. 이중 본부지내로 남한산성 행궁 복원 사업에 따라

이전된 11기와 현 위치에 보존 되어있던 19기를 포함한 총30기의 비석[碑石]을 한 곳으로 모아 남한산성을 방문하는 탐방객들에게

옛 선형의 발자취를 느낄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후대에 소중히 전승[傳承] 될수 있도록

비석을 한곳으로 옮겨 정비해 놓았다. 이곳에 있는 비석[碑石]은 역대 광주유수[光州留守], 수어사[守禦使], 부윤[府尹], 군수[郡守]

비[碑]로서 재직시 백성들을 정성스레 돌봐 치정[治政]을 잘 했거나 사랑을 베풀어 선정[善政]을 한 분들에게

백성들이 그들을 추념[追捻]하여 세운 비[碑]로서 광주유수[光州留守],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심상규[沈象圭]

비[碑]를 포함 30기의 비석이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

 

비석군 지나 관리소 주차장으로 내려 갑니다..

 

 

 

 

 

 

 

 

. 남문으로 올라가는 입구 주차 요금을 칭수하고 있습니다.

주차장은 길가 주차장으로 몇대 밖에 주차 가능하오니 참고하시면 좋을것 같습니다..

주차 할려면 관리소 앞 주차장 이용하면 된다.

주차비는 일일 주차요금 1.000원 입니다.

 

 

 

 

. 남한산성 산성터널입니다.

이 터널로 이어지는 곳은 성남 산성역으로 갈 수 있는 산성터널입니다.

 

 

 

 

. 이곳은 남한산성의 내부에 있는 마을로써 야수터 주변으로는 상가들

음식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곳 중에 관리사무소 주변이 있어 관리는 잘되어 보입니다.

 

 

 

 

. 물맛이 좋아서 그런것인지 많은 물병이 줄을서 있어 한 박아지

물멋을려 하니 부담을 느낄수 밖에 없내요

오늘 남한산성 탐방에는 거리상으로 보면 그리 멀지는 않았지만 지나면서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 등제로

그냥 지날수 없는 문화제를 꼼꼼히 살피게 되었습니다.. 또한 여러 자료들을 찾아 볼려 했으나 얼마전 부터는

사이트 개설로 나름 설명이 되어 잇으면서 도음을 받기도 하였지만 나머지 아쉬운 부분들이 많이 발견되게 되었습니다.

세계문화유산 보존차원에서도 아직도 발굴 조사중인 부분도 있으니 자료들을 잘 정리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생각하게 된 탐방길이였습니다. 우리 문화는 소중한것입니다...

 

 

 

 

. 이재는 남한산성중에 남문에서 수어장대까지는 탐방을 하지 못하였지만

이렇게 주차장 도착으로 다음으로 미루면서 포스팅을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한번 찾아 볼 준비중인 분들은

혹시나 겨울철 눈이온뒤 아름다울 것으로 보여집니다. 한번 기획해 보셔요...

몇일 앞으로 대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대설 가가워지면서 많이 추워졌습니다..

건강 잊지마시고 즐겁고 행복한 겨울을 즐기시길 바래 봅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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