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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6】다양한 군사방어 기술을 집대성한 유비무환 정신을 높게 남한산성을 평가했다..③

◈ Travelog/⊙ 출사 여행지

by 순도리(칠이) 2014. 12. 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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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성 동장대터[東將臺址]



 

    ○ 남한산성 [南漢山城] 조선시대에도 많은 시설물과 건물이 자리하였다. 원성에는 동, 서, 남, 북 모두 4곳의 성문이 있었는데, 동문은 좌익문[左翼門], 북문은 전승문[全勝門], 서문은 우익문[右翼門], 남문은 지화문[至和門]이라고 불렸다. 암문도 원성 11곳, 봉암성 4곳, 한봉성 1곳 등 16곳이 설치되어, 우리나라 산성 중 가장 많은 편에 속한다. 암문 가운데 6곳은 평거식이고, 10곳은 홍예식이다. 여장은 처음에 벽돌로 쌓았으나 영조 20년[1744]에 벽돌을 제거하고서 기와로 덮었으며, 정조 3년[1779]에 다시 원성을 고쳐 쌓을 때 기와로 덮었던 것을 전돌로 바꾸었다. 현재 남아 있는 여장은 대부분 전돌로 쌓은 것이며, 활이나 총을 쏠 수 있게 갈라 놓은 타구[垛口]에는 수키와를 한 장씩 올려 놓았다. 성벽에는 원성 4곳, 봉암성과 한봉성 사이 1곳 등 5곳의 치[雉]도 설치되어 있다. 한편 7곳의 포루가 있는데, 제1남옹성 8곳, 제2남옹성 9곳, 제3남옹성 5곳, 장경사 부근 원성 2곳, 장경사 신지옹성 2곳, 연주봉 옹성과 봉암성 2곳 등이다. 장대는 원성 성벽의 동, 서, 남, 북에 하나씩 설치되었고, 봉암성에도 외동장대가 있다.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에는 남한산성 안에 125곳의 초소인 군포가 있었으며, 각 군포는 2∼3칸 정도의 규모였다고 하였는데, 실제 성 안에서 앞면 3칸, 옆면 1칸의 군포 건물터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소금을 묻어두었던 매염처[埋鹽處], 숯을 묻어두었던 매탄처[埋炭處]도 있었다. 성 안에는 광주부의 읍치를 산성 안으로 옮겼기에 행궁과 함께 많은 관아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유사시에 국왕이 거처할 행궁[行宮]이 73칸반의 규모이고, 하궐[下闕]은 154칸 정도이다. 궁실에 딸린 건물로는 1688년과 1711년에 건립한 좌덕당[左德堂]과 종묘 건물로 사용하기 위한 좌전[左殿]도 자리하였고, 남문 안에는 사직을 옮길 우실[右室]도 갖추었다. 정조 22년(1798)에는 한남루[漢南樓]가 건립되었고, 1624년에 세운 객관[客館]인 인화관[人和館]은 순조 29년(1829)에 수리되었다. 하궐 왼쪽에는 일장각과 군사를 조련하던 연무관이 있었다. 이밖에도 비장청과 교련관청, 기패관청, 군관청, 별군관청, 서리청 등 많은 관아 건물이 자리하였다. 또한 행궁 및 관아의 소요 물품과 여러 가지 관수 물자를 비축하고 군량을 보관하기 위한 영고, 수창, 신풍창, 별창, 동창, 군기도 등 많은 창고도 들어서 있었다. ※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남한산성은 지난 6월 세계문화유산 등재 되었습니다.

등재 발표 2개월뒤에 문화재청에서 “문화재특별종합점검”에서 사적57호는 E등급을, 행궁은 D등급을 받았다.

E등금은 보수정비가, D등급은 계축조사가 필요한 수준이라고 발표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보수나 관리를 않하였을까요.?

경기도의회 행정감사에서 나온자료를 보면 2012년 20억, 2013년 21억7천만원, 2014년 19억원을

3년간 61억원 들여 관리보수 한것으로 나온다.

그럼에도 불과하고 현재에 상태에서도 눈에 많은 부족한 부분이 보이기도 합니다.

[2013년 12월~2014년 5월까지 조사 결과 입니다.]  

 

 

 

 

. 또한 한국관광공사에서는 11월에 걷기 좋을길 10선을 발포하면서

그중에 성남 남한산성길을 선정하기도 하였습니다. 선정 내용을 보면 토성산성어울길 제2코스

청량산고지가 화려하고 웅장한 수어장대와 능선을 따라 돌을 쌓아 만든 산성으로 흐름에 맞추어 자연스럽게 펼처져 아름다답다.

특히 산성 좌우로 울창한 수림들은 검은색 벽돌을 쌓아 만든 여장과 조하를 이루어 사계절 우아한 아취를 자아낸다.

 

 

 

 

. 오늘따라 유난히 길게만 느껴지는 곡선미로 이루어진 성곽길이

소나무들과 어울어져 걸음길에 지루함을 주지 않으며 피톤치드를 만끽 할수 있는것으로 가벼움을 느낀다. 

 

 

 

 

. 북문에서 동장대터 방향으로 오르다 보면 북원이 잘된 부분은 깔끔하게 보였으며

자책하는 길을 걷게 되는것 같기도 하였습니다. 

 

 

 

 

. 다시 지나온 길을 뒤돌아 사진 남겨 봅니다.

우축 높은곳이 서문 있는곳이며 수어장대 북문 방향도 한눈에 들어오며.

곡선미가 유난히 아름답게 보인다.. 

 

 

 

 

. 지나는 길목에는 흰색으로 은빛을 자랑하는 꽃으로

억새꽃이라고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갈대 같아 보이며 유난히 복슬거리는 꽃수술이

늦은 가을에 꽃을 피워 지나는 산객들을 반갑게 맞이하는것 같습니다. 

 

 

 

 

. 이곳은 북문을 지나면서 약간의 넒은 부분에 암문을 지나면서

동장대터로 올라가는 고개로 단숨에 올라오기는 힘차게 되이는 고개를 넘어야 합니다. 

 

 

 

 

. 이런곳을 마지막으로 올라서면 벌봉이 보이는 넒은 공터가 보인다.

바로 그곳이 동장대터를 만나게 된다. 

 

 

 

 

. 고개 올라와 약간의 여유구간 이런길을 조금더 걸으면

이재부터는 내리막길을 만나게 된다.

동장대터 만나면서 “남한산성 여장”이라는 안내문과 함께 울타리 쳐저있는 보존지역을 만난다 

 

 

 

 

. 남한산성 여장[女墻]

여장[女墻]이란 성위에 낮게 쌓은 담으로, 이곳에 몸을 숨겨 적을 향해 효과적으로 총이나 활을 쏠수 있게 만든시설이다.

남한산성 여장은 다른 성곽에서 보기 힘든 전돌[塡乭]로 축조한 평여장[平女墻]이다.

그러나 여장은 축조시기와 위치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여장 재료는 일반적으로 하부는 석재로 상부는 전돌을 사용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장은 수평되게 축조한 것이 기본형식이나, 급경사지에서는 계단식으로, 일부 완만한 경사지에는 지형에 따라 경사지게

조성한 예도 보인다. 여장에는 중앙에 근총안 1개와 좌우에 원총안 2개등 3개의 총안과 여장과 여장사이에는 활을 쏘기위한 타구가

마련되고, 남한산성 여장규모는 길이 4.2m, 높이 1.3m, 폭 0.8m, 내외가 일반적이다.

 

 

 

 

. 여장 넘어로 멀리 보이는곳은 지도상으로도 보았지만

벌봉으로 저곳도 남한산성의 일부이며 저곳은 오늘 탐방을 시간 관계상 포기 합니다.

물론 저곳도 역사적인흔적들이 산적한곳이다. 수어장대 부근에는 “병암남성신수비” 벌봉에는 “봉암신성신수비”가 있으면서

수축당시 지역을 나누어 공사하였다는 신수비로 2곳에서 발견 되었다고 합니다. 

 

 

 

 

. 언잰가는 한번 가보고 싶은곳으로 오늘은 먼발치로 가름합니다. 

 

 

 

 

. 벌봉으로 가게 되면 하남시와 광주시를 조망 할수 있을것 같아

아쉬움을 달래보는 시간 잠시같어 봅니다. 

 

 

 

 

. 기나긴 세월의 흔적을 남긴체 보전되고 있는 여장을

이렇게 바라보면 콘크리트가 아닌 흙으로 만든 여장이 였으면 하는 아쉬움을 그려 보기도 합니다.

 

 

 

 

. 남한산성 동장대터[東將臺址]

장대란 지휘와 관축을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 건물로 남한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었다.

이 곳은 동장대가 있던 곳으로 성의 동쪽에 있다하여 동장대라 불린다.

이 곳에는 남한산성에 주둔하던 수어청에 소속된 5영 중 좌영장을 지휘하던 곳이다.

동장대는 인조 2년[1624] 산성 구축시에 설치 되었고 누각도 함께 건립되었으나 18세기 초에 붕괴된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남장대외 서장대는 다시 수축하였으나 북장대, 동장대는 다시 짓지 않았다.

한본성과 연주봉웅성의 축성으로 동장대나 북장대는 상징적인 의미만 있을뿐 군사적인 실효성이 없어졌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 동장대터와 함게 여장을 인증해 놓습니다..

여장은 전시에 몸을 숨기며 적을 공격하기 좋겠끔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이렇게 관전을 마치고는 동문 방향으로 발걸음 옮겨 본다. 

 

 

 

 

. 남한산성 군포지[軍鋪址]

군포[軍鋪]는 성을 지키기 위한 초소[哨所] 건물이다.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 1848]』에 의하면 남한산성 내에는 125개소의 군포가 마련되어 있었다 하나,

현재는 한군데의 군포[軍鋪]도 남아있지 않다.

조사결과 이 군포지[軍鋪址]는 주변보다 약간 높은 평탄한 대지 위에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보이는 초석[礎石]과 벽체[壁體], 그리고 다수의 와편[瓦片]과 조총탄환[鳥銃彈丸]이 나왔다.

이를 통해 토석벽[土石壁]을 돌린 건물로 보인다. 또한 군포는 초소건물 기능에 맞게 정면은 트여있고,

내부에 온돌시설은 보이지 않았다. 이번 정비시에 발굴된 발굴시의 건물유구를 잘 보존하기 위해 유구를 흙으로 덮고

그위에 기존유고와 같은 형테의 모조초석[模造礎石]을 설치하였다.

 

 

 

 

. 동료는 오늘 서로 친구분으로써

인증 사진 남겨주고 있다. 사진뒤 멀발치는 장경사신지옹성이 보인다. 

 

 

 

 

. 지나온 동장대터와 군포지를 뒤돌아 바라 보게된다.

남한산성의 곡선미는 남다르다는것을 알수 있게꿈 하게한다. 

 

 

 

 

. 동장대터에서 성벽을 끼고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가파른 내리막이다.

내리막이 끝날 즈음 암문[제2암문]을 만나는데 그 앞으로는 길게 돌출한 옹성[甕城]이 있다.

장경사신지옹성[長慶寺信地甕城]이다. 한봉성과 봉암성 방어를 위해 설치한 옹성이다.

그 끝에는 2개의 포[砲]가 있었는데 한봉과 벌봉을 지키려는 의도가 잘 나타난다.

 

 

 

 

. 신지옹성을 지나면서 성곽길을 따라

장경사 방향으로 하산 합니다.. 이곳 또한 잘되잇는 성곽길 낙엽 발으며 걷는다.  

 

 

 

 

. 아마도 지나고 보니 이곳을 오른다는것은 만만하지 않아 보이는 길로써

올라오는 사람들은 힘에 겨워 힘들어 하는것 같다. 

 

 

 

 

. 저길을 우리는 내려왔지만

올라가는것은 힘들게 보인다. 그러나 동문과 가까우다보니 이곳을 선택 하는것 같기도 합니다. 

 

 

 

 

. 이젠 이곳을 출발하며 조금더 진행 하면

급내림길 내려서면서 사찰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그곳이 가장 아름답다는 장경사를 만나게 된다.

 

 

 

 

 

. 경기도 문화재 자료 제15호 지정된 장경사[長慶寺]

인조 2년에 남한산성을 고쳐 쌓을때 승려 벽암각성을 팔도 도총섭으로 삼고 전국의 승려들을 번갈아 징집하여 성을 쌓게 하였다.

축성 후에도 승군을 주둔시켰는데 이들의 숙식을 위하여 인조16년[1638]에 건립한 절이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승군제도가 없어질 때까지

전국에서 뽑힌 270여 명의 승려가 교대로 산성을 보수하거나 경계하는 역할을 수행 하였다.

산성 내에는 이러한 목적을 위해 10개의 절이 세워졌는데 장경사가 창건 당시의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다.

사찰내에는 대운전을 비롯하여 진남루[鎭南樓], 칠성각, 대방, 요사체 등이 있었는데, 그중 대웅전이 가장 화려한 양식을 가지고 있다.

 

 

 

 

. 장경사 관람후 나오던 길가에는

또다른 느낌을 주는 꽃 한송이가 활짝 피였군요, 요즘 제철을 잊은듯한 꽃들이 자주 만나게 된다.

장경사 포스팅은 별도로 준비 하겠습니다.  

 

 

 

 

. 남한산성에서 가장 아름답다고하는 장경사를

일주문을 나오면서 뒤돌아 담아 봅니다. 가을철 단풍이 아름답게 보여줄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 주변에 눈돌려 바라보던중 성곽에 꼭대기 붙어사는 야생화들도 자주 보였지만

늦은 시간에 사진 남기기 어려워 잔듸밭에 내려 앉은 낙엽을 한장 남겨 봅니다.

여기서 부터 동문 까지는 멀지 않은지점이지만 성곽길이 멋지게 보여주는 송암정터를 지나게 된다.

다음 포스팅으로 준비하여 동문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감사합니다. 날씨가 엄청 추워졌습니다.. 감기라는 놈과 친하게 지내지 마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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