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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6】신라 주장성의 성돌을 활용하여 구축되었고 시기별 축성기법을 볼수있는 남한산성 ④

◈ Travelog/⊙ 출사 여행지

by 순도리(칠이) 2014. 12. 4.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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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성 좌익문[左翼門] 동문



 

    ○ 남한산성(南漢山城] 우리나라 산성축성술[山城築城術]의 전형[典型]을 보여 주고 있다. 남한산성의 지리적인 여건을 보고 『여지도서[黎地圖書]』는 남한산성을 ‘천작지성[天作之城]’이라 하였다. 가운데는 평평하고 바깥은 험고하며 형세가 웅장하여 마치 산꼭대기에 관을 쓴 것 같은 형상[拷,峰]이라고 하였다. 『택리지[擇里志]』에서도 “남한산성은 안쪽은 낮고 얕으나 바깥쪽은 높고 험하여서 청이 처음 왔을 때 병기[兵器]라고는 날도 대지 못하였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도 성을 끝내 함락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인조[仁祖]가 성에서 내려온 것은 다만 양식이 적고 강화가 함락된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남한산성은 해발 500m가 넘는 험준한 자연지형을 따라 둘레 8km가 넘는 성벽을 구축하여 많은 병력으로도 쉽게 공략할 수 없는 지리적 여건을 구비하고 있다. 또한 남한산성은 내부가 넓고 평탄하며, 80여 군데가 넘는 우물과 45개의 연못이 있을 정도로 수원이 풍부하여 비축된 군량미[軍糧米]만 충분하다면 수만 명의 병력도 수용이 가능할 정도이다. 구조적으로도 남한산성은 조선시대의 성곽이 갖추어야 할 구비시설[具備施設]을 대부분 갖추고 있다. 본성[本城] 외에 봉암성[峰巖城], 한봉성[汗峯城] 등 2개의 외성[外城]을 갖추고 있으며, 남쪽에는 두 개의 돈대(墩臺)가 있다. 원성에는 5개의 옹성[甕城]이 있으며, 20여 개의 포루[砲壘]를 설치하여 화포[火砲]공격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또한 성벽에는 4대문 외에 16개의 암문[暗門]이 있으며, 성벽 위에는 1,940여 개의 타로 구성된 여장[女墻]이 구비되고, 각 타에는 원총안[遠銃眼]과 근총안[近銃眼]이 설치되어 있다. 성벽 안쪽에는 125개에 달하는 군포가 구축되어 있었다. 군포와 군포 사이에는 90여 군데의 소금을 묻어 둔 매염처와 숯을 묻어 둔 매탄처[煤炭處]가 있었고, 성 내에는 유사시에 대비하여 충분한 식량[食糧]과 군수물자[軍需物資]가 보관되어 있었다. 남한산성의 본성은 신라 주장성[晝長城]의 성돌을 활용하여 구축되었고, 외성은 본성과 시차를 두고 구축[構築]됨으로써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각 시기의 축성기법[築城技法]을 특징적[特徵的]으로 보여 주고 있다. 산성축성기법의 교과서와 같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남한산성은 우리나라 성곽발달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적[遺蹟]이다. 최근 각종 역사드라마가 산성을 배경으로 촬영되고 있으며 10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몰려드는 관광의 명소이기도 하다.

 

. 동장대터에서 장경사산지옹성과 장경사를 거쳐

좌익문[左翼門]으로 불리는 동문까지 연결된 성곽길은 다소 지루하게 느껴지지만,

외성이 둘러싸고 그 너머로 중중첩첩 펼쳐지는 산들이 수묵화처럼 아련하여, 동문까지는 내리막길로 비교적 발걸음이 가볍다.

 

 

 

 

. 동문으로 향하는 성곽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으로 곡선과 직선을 그리는 성벽은

능선과 하늘의 경계를 따라 멀리 동문[左翼門]를 향하다 소나무 숲 속으로 사라졌다 나타나길 수차레 이른다.

 

 

 

 

. 가던길증에 잠시 머물게만 하는곳 내성 넘어로 보이는

외성인 한봉성은 돌로 쌓은 성벽은 주변의 지형대로 등고선을 그린다.

멀리 보이지만 한봉성은 장경사 남쪽으로 신지옹성 앞을 지나 봉암성까지 이어지는 능선 성벽이며 남한산의 최고봉인 벌봉에 위치한다.

 

 

 

 

. 성곽에 올라 이끼 낀 성벽을 왼쪽에 끼고

등고선을 닮은 성곽길을 따르면서 이어지는 곡선의 성벽에 놀라지 않을 수 없게 한다.

 

 

 

 

. 제1암문을 지난 성벽은 계곡부를 따라 안쪽으로

곡선을 그리다가 능선지점에서 다시 곡선을 이루는데, 끝지점을 돌아서면 송암정을 만나게 된다. 

 

 

 

 

. 돌아서서 아래를 바라보는 두분을 보면서 우리도 내려다 보니.

광주시로 이어지는 지방도 342번 도로가 아래로 보인다. 또한 성벽 중간지점에 사람 서있는 곳을 발견이 된다.

그곳이 황진이와의 인연이 있는 송암정이 잇던 곳이다.

 

 

 

 

. 여기서는 남한산성 중앙통인 종로도 눈에 들어온다,

오늘 출발지이며 종착지인 남한산성 마을이 있는곳 이기도 합니다. 물론 초등학교 까지 있습니다.

 

 

 

 

. 소나무 한그루 서 있는 바위

조선 팔도의 최고 기생 황진이 와의 인연이 깃든“송암정”이라 하는 곳이다.

 

 

 

 

. 송암정터[松岩亭址]

송암정은 성밖의 동문에서 동쪽으로 오르면 바위 절벽과 그 사이에 말라죽은 소나무가 서 있는 곳이다.

이 곳은 산성리 산8-1번지에 해당되며 송암정 표지석은 성안에 송암정의 바위와 고사목은 성밖에 서 있습니다.

 

옛날 황진이가 금강산에서 수도를 하다가 하산하여 이 곳을 지나는데 남자 수명과 기생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이 때 술에 취한 사내가 황진이를 희롱하자 황진이는 개의자치 않고 그 사내에게 심오함 붑법을 설파하였습니다.

이때 그 무리중 감명을 받은 기생 한사람이 갑자기 절벽으로 뛰어 내려 자결 하였습니다.

 

이 바위에 서 있는 소나무[고사목]은 정조가 여주 능행길에 “대부”벼슬을 내렸으므로

“대부송”이라고 부르는 그 소나무라 합니다. 송암정은 우리말의 “솔바위 정자”라는 뜻입니다.

[안내문 발취]

 

 

 

 

. 송암정터에서 뒤돌아 지나온 장경사 방향으로 바라본 성벽 입니다. 

 

 

 

 

. 이쪽 방향은 동문 방향으로 가야하는 성벽길이다.

 

 

 

 

. 남한산성에서 왕이 많이 이용하던 문으로써 주변으로는 시구암문, 제11암문이있는데

뜻이 상반되게 이용되던 암문이 가깝게 있는 성문으로써

왕이 정국을 살필때 좌축으로 있는 문이라서 좌익문[左翼門]이라고도 합니다. 

 

 

 

 

. 좌익문[左翼門] 동문

남한산성에는 동, 서, 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동문은 성의 남동쪽에 위치하며,

남문과 함께 가장 많이 사용했던 성문이다. 조선 선조때 보수하였고, 인조 2년[1624]에 다시 건립하였으며,

정조 3년[1779] 성곽 개축시 함께 보수하였다. 이때 성문마다 이름이 하나씩 붙여졌는데, 동문은 좌익문[左翼門]이라 하였다.

행궁을 중심으로 국왕이 남쪽을 바라보며 국정을 살피니, 동문이 좌축리 되므로 좌익문이라 한것이다.

이 동문은 낮은지대에 축조되었기 때문에 계단을 쌓고 그위에 성문을 축조하여 우마차의 통행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물자의 수송은 수구문 남쪽에 있는 11암문이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발취]

 

 

 

 

. 이곳에는 남한산성의 본성이라는 이정표를 보게 된다.

오늘 탐방 코스는 본성만 들러본것으로 외성은 광주 방향으로 한봉에 있는 성벽으로 벌봉까지 이러지는

성벽을 보고 외성이라고한다. 외성은 한봉성과 봉암성을 두고 외성이라고 하는것 같습니다.

 

 

 

 

. 병자호란 당시 서문쪽은 급경사로 청나라 군들은 주로 보병이 포진했고,

동쪽은 지세가 완만하여 주로 기마병이 포진했다.

이렇게 포위되어 항전하던 47일간, 함경도, 평안도,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전라도 근왕병[勤王兵]들이

임금을 구원하러 출병했으나 전라병사 김준용 장군, 평안병사 유림 장군만이 작은 승리를 거두었을 뿐

모든 근왕병은 참패하거나 싸움조차 해 보지 못하고 미원에 물러가 있었다.

이러는 사이 포위당한 조정은 희망을 잃고 더구나 식량이 바닥났다. 남한산성 항복의 직접적 원인은 식량 부족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식량을 조달 되었을까? 의문이 든다 모든 성문들은 우마차 드나들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동문 근처에는 암문이 2개가 있는데 그곳이 제일 유력해 보이는 식량 조달문으로 보여진다.

 

 

 

 

. 처음에 산성길을 시작 하면서 “종로라는

이정표를 보면서 의야해 했었는데 종로는 정중앙에 위치한 지점으로 서울 종로와 같은 격으로

생각하시면 쉽게 이해 할수 잇는 지점이다.

즉 행궁지 있는곳이 종로라는 지점이며 종로를 통하는 도로는 342번 지방도로써

광주시에서 동문을 남문으로 통하는 성남시 방향으로 유일한 도로이며

이곳이 광주 방향에서 동문을 통해 들어가는 길이다.

 

 

 

 

. 남한산성에서 가장 오래된 망월사[望月寺]가 보인다.

경기도 기념물 제111호로 지정 되어있으며

중정남한지에 의하면 남한산성 사찰 중 가장 오래된 절이라 한다.

근년에는 13층탑도 세우고 탑 안에 인도 간디 수상으로부터 받아온 진신사리를 봉안했다 한다.

그래서 이 절도 적멸보궁이 됐다.

중정남한지 기록에 보면

“한양에 장의사가 있었는데 태조가 도성을 세울 때 이를 허물고 불상과 금자화엄경 일부와 금정 하나를 여기에 옮겼다고 썼다.

漢陽有壯義寺 太祖建都時 毁之其不像及金字華嚴經一部 金鼎一坐移藏于此

[한양유장의사 태조건도시 훼지기불상급금자화엄경일부 금정일좌이장우차]

 

조선왕조실록 연산[燕山]군 10년[1504년] 7월조를 보면 장의사의 부처를 삼각산 안팎 절로 옮겼으며

傳曰 : 藏義寺佛令兩宗僧徒, 移之三角山內外寺, 竝黜僧空之.

[전왈 : 장의사불영양종승도, 이지삼각산내외사, 병출승공지] 

1년 반 뒤인 연산군 12년[506년] 2월에는 장의사를 철거했다.

그러니 태조가 장의사를 철거하고 불상을 옮긴 일은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태조는 장의사에서 법석[法席]을 베풀고

자신의 죽은 처 신의왕후의 제사도 받들게 했으니 어찌 된일인가요,

망월사에는 중정남한지의 기록을 그대로 알리고 있다.

아무튼 산골짜기 아늑한 곳에 자리하고 있어 편안함을 주어 당시의 어려운 마음을 다스리는 좋은곳 같기도 합니다.

 

 

 

 

. 시구문[屍柩門] 과 제11암문

천주교가 탄압 받을 때마다 남한산성으로 옮겨온 천주교도들이 박해를 받아 300여명이 순교했다고 한다.

그 시신들은 돌보는 이 없이 이 시구문 밖에 버려지기도 하고 이 문을 통해 장사지내러 나갔기에 시구문이다.

남한산성 최초의 순교자는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 때 발생했다.

시구문은 시체들이 드나드는문이고. 제11문은 바로 옆으로 있는 식량조달을 하였던 문이기도 합니다.

 

 

 

 

. 황사영[黃嗣永] 백서사건[帛書 事件] 1801년 9월 신유박해[辛酉迫害] 

신해박해[辛亥迫害]1791년 11월 이후 탄압을 받기 시작한 천주교도들은 각도의 오지로 숨어들었는데,

제천 봉양[현 베론성지]으로 숨어든 이들 중 황사영[黃嗣永]이 있었다.

북경교구 앞으로 조선의 천주교 탄압 실정을 알리고 천주교 탄압을 중지시킬 목적으로 비단에 백반으로 글을 써

글씨가 보이지 않게 쓴 백서[帛書]인데 청나라 사신 가는 일행편에 북경으로 보내려다가 발각됐다.

문제는 외국군대의 힘을 빌려 조선을 협박해달라는 내용이 포함됐다는 점이다.

이른바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무수히 많은 이들이 순교했다.

이때부터 천주교는 기해박해, 병인박해를 거치면서 더욱 심한 탄압을 받았다. 그 때의 일을 이미 잊은 듯 한가롭다.

황사영 백서는 로마 교황청에 현재 보관중이다..

 

 

 

 

. 남한산성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느껴지는 제11암문인 시구문을

올라오는 성벽길을 바라 봅니다.

이곳은 그동안 회손이 많이 된듯하여 복원 공사시 콘크리트로 성벽과 함께 소실을 막아 놓은듯

콘크리트길을 올라오게 된다. 과연 이런 방법밖에는 없었는가를 생각이 듭니다.

 

 

 

 

. 멀리 앞에 있는 성벽이 높이 올라간 부분이 보인다.

그곳이 제9암문 제3남옹성 가까이 있는 동서방향으로 길게 발달된 능선을 따라 성벽이 축조되어 있는 곳으로

암문에 가까운 성벽이 굴곡을 이루며 돌출해 있어 마치 적대와 같은 기능을 하면서 암문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제3남옹성 부근에서 바라본 사진이다.

 

 

 

 

. 제9암문에 올라서면서 뒤돌아 제3남옹성을 바라본다.

사진상 우측으로 늘어진 성벽을 희미하게 나마 보이며 지금도 복원을 위한 발굴 조사중 인듯 하다..

 

 

 

 

. 제9암문에서 멀리 보이는 동장대터를 함께 사진 담아 봅니다.

좌축으로 높은 부분이 지나온 동장대터 부분으로 이렇게 보면 머리게만 느껴지지 않으나

지형에 맞춰어 만든 성벽길을 따라 걷다보니 멀걸만 느껴진다.

 

 

 

 

. 성벽길을 따라 걸다 보면 남문에 도착 하겠죠.

오늘 이쯤에서 좀 아쉬웠던 부분을 정리하겠습니다.. 지나면서 보았던 암문들 모두 본성과 외성을 합치면 16개의 암문이 있다.

본성은 11암문, 외성은 5암문 또다른 암문 하나는 시구문으로 되어있으나 어느 위치인지 잘 알수 없기에 정리합니다.

○제1암문은 장경사 바라보는 앞에 있는 암문, ○제2암문 장경사 신지옹성으로 이어지는 암문, ○제3암문은 동장대에서 봉암성으로 이러지는 암문,

○제4암문은 옥정사터옆 물도 빠져 나가도록 낮은 지형에 지형보다 낮게 설치된 암문,

○제5암문은 연주봉옹성으로 이어지는 암문, ○제6암문은 수어장대 앞에 있는 암문, ○제7암문은 제1남옹성 옆에 있는 암문,

○제8암문은 제2남옹성 옆에 위치한 암문, ○제9암문 제2.3남옹성 사이에 있는 암문, ○제10문은 제3남옹성 옆에 있는 암문,

○제11암문은 동문인 좌익문 옆으로 시구문과 함께 옆에 있는 암문으로 제11문은 주로 군량미를 나르던 곳으로 추정되는 문이다.

이렇듯 암문이 본성을 둘러쌓고 있지만 암문에 관한 특징이나 관련된 자료들이 부족하여 아쉬운 것으로 보여집니다.

물론 저는 여러곳을 보면서 이렇게 밖에 정리가 되질 않내요..

오늘은 여기까지 준비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남문을 준비 하며 남한산성 포스팅을 마무리 할려 합니다..

감사합니다.. 늘 건강을 잊지 마시길 바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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