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한산성 수어장대[守禦將臺] △. 산행을 위한 준비 시간 이른 아침부터 1시간여 달려 8호선 전철역 장지역에서 일행 한분 친구 만남으로 산성역 부근으로 찾아 갑니다. 오늘 남한 산성 탐방은 산성역에서 부터 탐방 가능하나 승용차 이용하는 탓에 산성역 좌회전 하여 산성 종로 관리소 까지 이동 합니다. △. 오늘의 탐방 목적은 남한산성 탐방이였기에 산성역[2.9] → 남한산성 남문으로 시작을 할수도잇는 코스였지만 이쪽길은 생략합니다.. 산성 내부에 위치한 관리소 주차장 일일주차료 1.000원으로 주차와 함께 산성탐방을 시작 합니다. ※ 탐방코스 : 관리소[1.1] → 수어장대[1.1] → 서문[1.6] → 북문[1.1] → 동장대터[0.6] → 동문[1.7] → 남문[1.1] → 관리소, 총 8.3km △. 우선 남한산성의 성곽길은 한바뀌 돌을수 있는 코스로 되어있으니 어디서 시작하던 원점으로 올수 있는 코스 입니다. 오늘은 관리소에서 수어장대로 먼져 방향으로 행궁지지나 침괘정, 어정, 수어장대 향합니다. △. 이곳의 이정표는 주차장과 관리소, 만해 한용운 선생 기념관이 위치 방향을 표기해 놓았으며 관리소 주변에는 온통 음식점 유네스코 세계문화에 등재 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좀더 다시 한번더 생각해야 할 문제로 보여집니다.. △. 오름길에 어디서나 볼수 있는“맥문동”이라고 하며, 한방에서는 강장, 진해, 거담제, 강심제로 쓰고 있으며 비슷한 종류가 있는대 그것을 “개맥문동”이라고 한다. 구별이 참 어려운듯 합니다. 참고 하셔요.. △. 남한산성의 첫 만남으로 침괘정을 만나게 됩니다. 침과정, 침괘정이라는 이름이 안내문을 읽어보면 알수 있듯이 한자로는 베게 침[枕], 창 과[戈], 정자 정[亭]자로 소개하는데 이름은 침괘정으로 되어 있습니다.. △. 침괘정 장자 주변에는 커다란 은행나무 한그루가 있습니다. 정자 아래에 놓여진 의자 의미있어 보이내요. △. 정자 주변 넒은 마당에는 이미 은행나무잎이 떨어져 노랑색으로 마당을 수놓아 그냥 지날수 없는 필자 몇장의 사진을 남겨 본다. △.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도 아름답게 보여지며 누구나 찾을수 잇는 한적함에 너무 좋습니다.. 우리도 일행도 즐겨 봅니다. △. 나이 드신분들도 은행나무에서 사랑을 느껴 보기도 하내요. △. 이런 여유있는 자리에 한적한 시간 만들어 보고 싶어집니다... △. 그냥 아무런 의미 없이 은행잎을 발차기해 보기도 하구요..? △. 벌써부터 준비해온 간식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깊은 대화 나누기도 합니다. 이잰 다시 도 출발 합니다. 침괘정은 안내문에 보면 남한산성과는 좀 다른 느낌을 주는 정자로서 언재 만들어졌으며..? 어떤 목적으로 지어졌는지..?를 모르는 이름이 혼돈 스런 정자 세계문화 유산이라는 이름 아래 빠른 시일내로 찾았으면 하는 마음뿐을 남겨 봅니다. △. 침괘정[枕戈亭, 침과정]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호
남한산성내 마을 동쪽 작은 언덕위에 위치하고 있는 정각인데 여기서 이 건물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인조 2년[1624]에 남한산성을 축조한 이서라 한다. 이서가 축성에 착수하였을 때 이 지점 수풀 속에 한 고각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몇 백 년이 되었는지 건조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주초가 견고하였으며 방의 온돌이 상하지 않았고 건물 중간 한 방의 온돌 높이가 수 척에 달하였다 한다. 시험삼아 불을 아궁이에 때어 보니 웃목부터 더워지고 차차 아랫목이 더워졌다 한다. 따라서 주민들의 전하는 말로는 백제 온조왕의 왕궁지라 하였다 한다. 침괘정이 온조왕의 왕궁지라 하는데 대해서는 이를 고증할 아무런 자료도 없기 때문에 무어라 단정하기는 어렵다. 현재의 건물은 후세의 것이고 이서가 발견할 당시의 건물은 남아 있지 않다. 현재의 건물은 영조 27년[1751]에 유수 이기진[李箕鎭]이 중수[重修] 하고 침괘정이라 명명한 것이고 무기고 혹은 무기제작소의 사무를 관장하던 곳인 듯 하다. △. 이정표에는 숭렬전도 보이지만 오늘 목적은 성곽길을 두고 찾은것이라 수어장대, 우익문[서문]을 찾아 성곽길을 향합니다.. △. 수어장대 오름길도 이렇게 잘 되어 있습니다. 오늘 함게 동행한 일행분들을 뒤를 따라 수어장대길로 향합니다. △. 게단 오르다 보면 넒은 공터에 쉬어갈 의자도 만들어져 있는 여유로운 시간을 갖을수도 있는 공터 입니다. △. 이정표 방향으로 오르다 보면 또 계단길을... △. 오르다 보면 약수터를 만나게된다. 이를은 “아래어정 약수터”라 되어 있내요 대포 모양의 어정 꼭지를 만들어 물이흘러 나오게 되어있지만 가만히 한모금 물 마시자면 요상한 기계음이 들려 뒤를 돌아보니 전기구동 모타음이 들리내요. 그러나 수질 관리는 잘 되는듯해 보였습니다.. △. 어정약수에서 한모금 물을 마시고는 다시 길을 따라 수어장대 향합니다. 남한산성에는 소나무들이 많이 보이나 옛날 도토리묵에 관한 이야기들을 많이 접할수 있을것입니다. 수라간 궁녀들이 먹을것을 찾아 보던중 도토리가 많아 도토리묵을 쑤어 임금님 수라를 올린 이야기를 들었을것이다. 그러나 많이 보여야할 상수리 나무 그렇게 많아 보이질 않는군요. △. 이젠 성곽길에 올라섰습니다.여기서 사진 방향으로 다시금 올라서면 수어장대 입니다. △. 남한산성 문화제 안내문 어딜 가나 같은 모양으로 설치해 놓았습니다.. 수어장대 입구에 있내요.. △. 수어장대 앞마당에서 성곽을 내려다 봅니다. 그곳에는 “이승만 대톨령 송수탑[頌壽塔 칭송할 송, 목숨 수, 탑 탑]” 바로 이곳이 옛날 1950년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국립공원 지정 되었으나 4,19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고 제2공화국이 출법하면서 국립공원 무효화 되었고 이후 1971년 3월 17일 경기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지금에 이른다. 이처럼 이승만 대통령과 남한산성은 연관이 되있으면서 당시의 송수탑을 세운 사람은 경기도지사 이익홍 지사가 80회 탄신을 기념하여 건립되었으며 작가 윤효준이 설게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송수탑은 1955년 6월 15일 성대한 재막식으로 이승만 대통령 80회 탄신을 기념 하였으며 건강을 기원하는 측면에 세워졌다고 하지만 아부성 건출물이라고 보아도 될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밑둥지 원형판 원석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 수어장대 들어서면서 문을 통과 하면 처음으로는 청량당을 지나 다시 계단을 올라야 합니다. “청량당[淸凉堂]” 축조당시 책임자였던 이회장군와 그의 부인의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사당으로써 이회는 공사비 횡령의 누명을 쓰고 참수형에 취해졌으며 이 소식을 들은 부인 송씨는 한강에 뭄을 던져 따라 죽었다고하며. 이이의 죽음때 죄가 없으면 매 한마리가 날아올것이라 예언했는데 매 한마리의 이야기는 매바위에 있어 그의 죽음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이후에는 그가 맡은 구간의 공사가 가장 잘된것으로 알려지면서 사당을 지어 초상화를 안치하여 넋을 기렸다고 한다. 원래의 청량당능 6.25당시 소실 되었으며 수어장대 앞에 있는 산이름이 청량산이므로 청량당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 “수어장대[守禦將臺]”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 수어장대는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은 누각이다. 남한산성에 있던 5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있으며, 성안에 남아 있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다. 인조 2년 [1624년] 남한산성 축성때 단층으로 지어 서장대라 불리던 것을 영조 27년[1751년] 유수 이기진이 왕명을 받아 이층으로 다시 짓고 “수어장대[守禦將臺]”라는 편액을 달았다. 수어장대 2층 내부에는 “무망루[無忘樓]”라는 편액이 달려 있었는데,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격흔 시련과 8년간 청나라에 불모로 잡혀갔다가 귀국하요 불벌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지은 것이다. 현재 무망루 편액은 수어장대 오른편에 보호각을 지어[1989년] 많은 사람들이 볼수 있도록 보관하고 있다. △. 수어서대[守禦西臺] 라고 쓰여있는 바위“매바위”라고 하며, 청량당의 이야기 내용과 같다. 남한산성의 동남쪽 축조를 맡았던 이회[李晦]가 완벽한 시공과 지체의 험악으로 기일내에 완공하지 못하여 참수형[斬首刑]에 취하게 되었다. 그런데 절명[絶命]하는 순간 매 한마리가 하늘에서 내려와 이 바위에 앉아 이회를 응시하다. 갑자기 없어졌다 사람들이 매가 있던곳에 가 보니 돌에 매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한다. 현재는 손실되어 흔적만 남아 있다. 또한 수어장대 남동쪽 매바위에 새겨진 암각문을 보면 “수어서대[守禦西臺]”라 새겨 놓아져 있습니다. 원래 수어사는 도성의 수어청레서 업무를 수행하였으나 유사시 에는 남한산성의 수어장대에 지휘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조 19년[1795]부터는 광주유수가 수어사를 겸하였다고 합니다. [탁본] △. 남한산성에는 수어장대[서장대]를 비롯하여 동장대, 북장대. 남장대,가 있는데 그나마 아직까지 보전되고 있는 장대로써 남아 있는 장대는 이곳 한곳 밖에 없엇으며 산성을 찾는 사람들이 꼭 들러보는 수어장대 였습니다.. △. 무망루[無忘樓] 조선 영조 27년[1751] 광주유수[廣州留守] 이기진[李箕鎭]이 증측한 수어장대 2층의 내편 문루로서 그 편액이 2층누각에 있어 1989년 전각을 새로건립하여 이곳에 설치하여 현판을 볼수있게 하였다. 무망루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격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 심양에 불모로 잡혀갔다가 귀국후 북벌을 꾀하다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이름지은 것으로. 이 전각 내부에 진열 되있었습니다. △. 무망루 전각 바로 옆에는 비석이 하나 보인다. “리 대통령 각하 행차 기념식수”라는 표석이 하나있다. 표지석 이름대로 그엎에는 전나무 한그루 있다, 바로 이나무로 보여집니다. 표지석 뒤면을 보면“단기 4286년 9월 6일”이라 하였으니 지금의 서기로 보면 1953년 9월 6일이 맞을것이다. 그렇다면 수령을 따져 보면 약60년된 전나무 아니였던가요..? △. 수어장대 현판 입니다. 누구의 글씨이지는 알려지진 않앗으나, 영조 27년[1751년] 광주유수 이기진이 왕명을 받아 2층으로 다시 짓고 수어장대[守禦將臺] 편액 했다는 이야기로 보아 영조왕이나 이기진의 글씨로 봐야 할것 같습니다. △. 史蹟 第五十七號[사적 제57호] 南漢山城[남한산성] 으로 지정 되어 있으면서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 이런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발걸음 하였으며 문화 유산들을 잘 보전하여 후세들에게 물려주는 것도 지금의 성인들의 해야할 일중 하나로 보여집니다.. △. 잘 쌓은 성벽을 바라보면 이젠 수어장대를 나왔습니다.. 남한산성은 정교하면서도 웅성이 잘 되어있는것을 보면 지형을 잘 이용하여 축조된것으로 보여지며 성곽미 또한 아름답게 보여집니다. △. 앞전에 오르던곳을 다시 내려와 서문 방향으로 우회하여 탐방길에 나서게 됩니다. 우익문 → 전승문 → 동장대터 → 좌익문 → 자화문 방향으로 이어지며 발걸음마다 살펴보는 시간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아마도 남한산성은 많은 이야기가 있으니 많은 시간이 필요한듯 하며 주욱 이어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부터 날씨가 많이 추워진다고 하내요 건강 위의 하시길 바라며 내일을 준비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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