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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3】사람과 사찰 그리고 자연과의 동화하는 방생과 문수보살 영험도량 고찰인 반야사[般若寺]

◈ Travelog/⊙ 고찰 문화재

by 순도리(칠이) 2014. 4. 27.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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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북 영동 황간 반야사



 

    ○ 대한불교 조계종 백화산[大韓佛敎 曺溪宗 白華山] 반야사[般若寺]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법주사 말사인 반야사는 원효, 의상대사 등의 여러가지 창건설화가 있으나 기록에 의하면 신라의 무염국사[無染國師 800~888]가 심묘사에 머물를 때에 사미승 순인을 이곳에 보내 못의 악룡을 몰아내고 못을 매워 절을 창건하였으니 신미대사[信眉大師]의주청으로 절을 크게 중건 하였으니 문수보살과 세종대왕의 설하도 이때의 일이다. 한국전쟁 때 불탔던 것을 근래 2~30년 전부터 다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역대 주석했던 유명한 스님으로는 고려 충수왕때 무이국사[無耳國師]가 여기에서 출가를 했고 조선 초기 큰 도인이 있었던 벽계정심선사[碧溪正心禪師]도 이곳에 주석했으며 또한 이곳 반야사를 배경으로 한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시도 전해온다. 문화재로는 삼층석탑[보물 제1371호]과 대웅전삼존불과 후불탱화등이 있다. 반야사[般若寺]란 이름은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이 도량에 상주한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 대한불교 조계종 백화산[大韓佛敎 曺溪宗 白華山] 반야사[般若寺] 

 

 

. 영동군 향토유적 제9호 반야사  

신라 성덕왕 27년(728년) 원효대사의 10대 제자중 수제자인 상원화상(相源和尙)이 창건하고,

고려 충숙왕 12년(1325년) 학조대사(學祖大師)가 중수 하였다고 전한다. 극락전은 언제 중건 되었는지 확실치 않으나,

근래 수리하고 단청을 해서 상태가 단정하고 아담하다. 목조 맞배 기와집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포 없는 간략한 양식의 건물이다. 1988년 5월 28일 전통사찰 제25호로 등록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포 : 기둥머리와 지붕 서까래 사이에 있는 짜임새

 

 

. 들어서는 입구에는 반야사라는 호수가 있으나

처음 창건설을 보게 되면 이곳에 호수를 매립하면서 그자리에 창건 한것으로 나오는대

들어서면서 울창한 숲을 이루어 반야호가 그 아름다움을 더해 주는것 같습니다. 

 

 

 

 

. 지금은 농수용을 이용하기 위해 보를 막은것으로 보여지나

이곳을 호수로 불리면서 잔잔한 호수가에 길게 늘어진 나무 가지들이 멋진 풍경을 남겨 준다.  

 

 

 

 

. 호수 중간쯤 올랐을까

멀리 반야사가 보이기 시작 합니다..

그동안 많은것들의 궁금증을 기대를 안고 관람해 볼랍니다..  

 

 

. 이곳은 일주문 앞의 도로로 반야호 호수가를

휘감아 볼면서 입구인 주차장에서부터 거리는 약300m쯤 되는곳에 위치합니다..

[일주문 사진은 생략 합니다.] 

 

 

. 반야사 정묵당 뒤편 너덜지대에 자리하고 있는 형상이

나무 한 그루 없는 너덜지대의 형상은 긴꼬리를 갖은 호랑이가 정묵당 지붕에 내려 앉은듯한 형상으로 제법 또렸하게

보이면서 방문자들의 감탄을 자아내며 백화산 불법을 수호 하기 위해 반야사로 내려 앉아 호랑이 산신령, 주변의 실록이

아름다운 게절이면 더 또렸하게 보이며 그 아름다움과 효염에 유명세를 떨치고잇는 사찰이다. 

 

 

. 심검당으로 불리는데 종무소 같아 보이나

반야사의 백미 뒤로는 호랑이[산신령]상이 자리 하고 있습니다.  

 

 

. 지장전[地藏殿]

황도령과 처녀귀신 이야기도 있다.

 

고려 충숙왕 때에 글재주가 좋기로 소문난 18세의 황도령이 황간 동헌에서 열린 백일장에 참석하게 됐다.

그런데 물“수[水]”자와 산“뫼”자를 몰라 낙방하고 말았다.

이에 크게 상심한 황도령은 그 길로 황간 반야사를 찾았다. 그는 이곳에서 학식이 뛰어나기로 소문난 일우스님께

학문을 배우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우스님이 가만히 보니 황도령 얼굴색이 점점 나빠지는 것이였다.

알고보니 황도령이 한 처녀 귀신에게 씌인 것이였다. 이에 일우시님은 황도령 전신에 금강경 5,149자를 빽빽이 써넣고

옷을 입혔는데 그날 밤 황도령을 찾아온 처녀귀신이 금강경의 힘에눌려 괴로워하다가 황도령의 귀를물어

뜯고 도망쳤다. 그만 일우스님이 금강경을 쓸때 황도령의 귀부분만 빼먹은 것이다.

그러나 황조령은 금강경 덕분에 살아났고 구 이연으로 출가했는데, 귀가 없다하여

“무이법사[無耳法師]”라고 불렸다고 전해진다.  

 

 

. 1993년 대웅전을 새롭게 건립한 현재의 대웅전

 

영동군 향토유적 제12호 반야사는 신라 성덕왕 27년[728년] 원효대사의 10대 제자중 수제자인 상원화상이 창건하고

고려 충숙왕 12년[1325년] 학조대사가 중수 하였다고 전한다.

대웅전 내에 있는 이 석조 불상은 제작 연대는 정확히 알수 없으나, 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전해 내려오며,

제작기법이 이 시대의 제작법과 비슷하다. 반야사 대웅전에 봉안된 불상은 3위로서,

중앙의 석가여래좌상은 높이가 100㎝ 이며, 우측의 보현보살은 높이 72㎝, 좌측의 문수보살은 높이 72㎝이다.

※ 석가여래좌상 : 석가는 불교의 개조[開祖]이며, 여래는 진리의 세계에서 중생구제를 위해 왔다는 뜻으로 부처의 존칭이며,

앉아있는 형상을 좌상이라 함.

※ 보 현 보 살 : 불타의 이[理], 정[定], 행[行]의 덕을 맡아보는 보살

※ 문 수 보 살 : 여래의 왼쪽에 있어 지혜를 맡은 보살

 

 

. 영동 반야사 극락전[永同 般若寺 極樂殿]

반야사 극락전의 창건 연대는 정확치 않으나 조선 후기의 건축물로 추정되며, 내부에는 중생에게 자비를 배푸는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다,

원래 반야사의 대웅전으로 건립된 건물이었으나, 1993년 현재의 대웅전을 새롭게 건립한 이후 극락전으로 이용하고 있다.

현재 반야사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불전이다.

 

 

. 영동 반야사 삼층석탑[永同 般若寺 三層石塔] 보물 제1371호

 

탑은 전형적인 신라 말과 고려 초기에 유행했던 단층 기단형 삼층 석탑으로 신라 문성왕 8년 반야사

창건 당시[846년]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지대석 위에 1층 기단을 이루고 그 위에 탑 몸돌을 올리고 있으며,

상륜부에는 노반[탑의 꼭대기 층에 있는 내모남 지붕 모양의 장식]북발[노반 위에 주발을 엎어 놓은 것처럼 만든 장식]

이 올려져 있다. 2층의 탑신은 1층에 비해 급격히 낮아지고 있으며, 1층의 지붕돌 받침은 5단인데 2층과 3층은 4단으로 되어 있다.

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곳으로, 불상과 도일시 되는 경배의 대상이다. 

 

 

. 문수동자의 출현과 세조대왕의 이야기가 있었다.

세조가 신미대사의 주청으로 반야사를 중건하고 희향법회에 참석했을때 문수동자가 나타나

세조에게 따라오라고 하면서 절뒤쪽 계곡인 망경대의 영천으로 인도하여 목욕할 것을 권했다.

“동자는 왕이 불심이 가륵하여 부처님의 자비가 따른다”는 말을 남기고 사자를 타고 사라졌는데 목욕을 마친후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이에 세조는 황홀한 기분으로 절에 들어와서 어필을 하사 했는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극락전 앞에 있는 배롱나무 아래 부분이지만 나무의 수령은 약500년 되었다고 합니다.   

 

 

. 심검당

아마도 이곳은 중무소로 이용하며 심검당이라고 불리는곳 같았습니다...  

 

 

. 반야사 정묵당 뒤편의 영험 설화를 보게 된다,,, [사찰 소개에서....]

문수보살이 상주 도량이자 호랑이상[산싱령]의 화현도량이다.

문수보살님의 지혜가 피력으로 학생수능기도 고득점 합격과 공무원 승진 등 각종 시험 합격에 특히 영험하고 호랑이가

산신령으로 화현한 산신각은 사업성취 영험으로 전국의 사업번창을 바라는 참배자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 반야사 옆 개천인 석천을 넘는 다리 입니다..

이다리는 관음전으로 가기 위한 다리 참고 하시면 된다. 

 

 

. 반야사 경내에서 석천을 건너는 교각을 만나면서 거너게 된다..

왜냐 하면 반야사에는 관음전이 있는대 그곳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 하고 있는데 

이곳을 넘어와 조금더 걸어야 만나게 된다 그러나 다리 건너면서 불심으로 세워진 작은 돌탑들이 눈에 들어온다.

위태로워 보이나 휘몰아치는 운명의 기세에 눌러 우리가 할수있는 일은 작은탑을 쌓아 소원을 비는일 밖에는 없어 보인다. 

 

 

. 다리 중간에 위치한곳에서

너덜지대의 호랑이상을 담아 봅니다.. 아무리 다른 생각을 하면서 보아도 산신령 호랑이 상이 틀립 없어 보이내요.. 

 

 

. 아래로 흐르는 석천의 물소리 반야호로 흘러 들어가고 있습니다. 

 

 

. 히야신스 [hyacinth, ヒヤシンス]

백합과에 속하는 구조식물의 하나로 백, 분홍, 적, 자색 계통의 꽃이 방망이 모양처럼 됨.

※ 출처 : 농촌진흥청

 

 

. 반야사 에서는 벽계정심 선사 이야기

 

조선시대 불교가 탄압을 당할 때 벽계정심 선사는 머리를 기르고 속이고 같이 지내기 위해서 과부를 얻어 서는데

부인은 1년을 살아도 과부요, 2년 3년을 살아도 이름만 영감이지 언제나 남남이었다.

그래서 하루는 “스님, 저는 갈랍니다.”“왜?”“이름만 영감이지 저는 과부 신세를 면치 못하니 이래서는 더이상 못살겠소”

“그러면 할수없지, 그러나 3년 동안 밥해 주느라 수고를 많이 했는데, 그동안 수고한 수고비로 이것이나 받으시오”

하면서 은으로 만든 표주박을 내어 준다. 부인은 그것을 받아 가지고 나오다가 동구밖 샘물가에 앉아소 표주박으로

물 한모금 마시고 팔자 한탄만 하다가 표주박도 눈에 모이지 않아서 그만 놓아둔 채 3년 동안 영감을 얻으려고

이리저리 돌아다녔으나 아무리 살자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하루는 생각해 보니 어차피 과부 신세 면할 길이없으니

다시 정심선사를 찾아가면 이름으라도 영감이니까 없는 것 보다는 나을것 같아서 그 길로 선사를 찾아뵙고

인사를 올렸더니“내 다시 올줄 알았소”한다.

 

 

. “어떻게 아셨어요 ?”

“그 이유를 알고 싶소 그러면 3년 전에 내가준 표주박은 어찌 했소”하고 물으니 부인은 솔직하게 다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그 자리에 가서 보시오 아직도 그대로 있을 것이요”“어째서요?”

“내가 이세상에 사람으로 태어자서 중이 되기를 5백번이나 하였는데 처음 중이 되면서 지금까지 남이 주지 않는 것은

가져본 일이 없었소 그래서 그 인덕으로 무엇이든 내 것이라 이름만 지어놓으면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는 거시요”

그러나 부인은 그 말을 믿을수가 없었다. 그래서 밑져봐야 본전이니 속는 샘 친다고 생각하면서 가서 보았더니

과연 3년전에 자기가 버린 그모습 그매로 있는 것이다.

이것을 본 부인은 인과법칙의 이치를 털끝 만큼도 어김이 없음을 확연히 깨닫고 다시는 다른 마음을 먹지 않고

죽을 때까지 잘 받들어 모셨다고 한다.

 

여러가지 많은 설화가 있었지만 반야사의 창건설에 관한 정확한 내용들이 없어 좀 아쉬운 부분으로 이렇게 정리 합니다.

감사 합니다.. 늘 마음은 무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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