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산성 12성문 종주

○ 북한산성 [北漢山城] 사적 제162호
현재 대서문[大西門]이 남아 있고 장대지[將臺址], 우물터, 건물터로 추정되는 방어시설의 일부가 있다.삼국 사이의
쟁탈대상지로 백제가 위례성에 도읍할 때 도성을 지키는 북방의 성으로 132년[개루왕 5]에 축조한 것이다. 여기서
백제의 주력군이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였고, 근초고왕의 북진정책에 따라 북정군[北征軍]의 중심요새가 되었다.
그러나 고구려의 광개토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은 북한산성을 포위, 함락시켜 475년[개로왕 21] 왕을 죽이고 백제의
도성을 유린하였다.
이로 인하여 백제는 공주의 웅진성[熊津城]으로 도읍을 옮기고 신라와 힘을 합쳐 고구려의 남진을 막았다.
그러나 553년[진흥왕 14] 신라는 백제와의 동맹을 어기고 백제의 영토인 한성[漢城]지역을 점령하였다. 진흥왕의
북한산순수비[北漢山巡狩碑]는 이 시기를 전후하여 세워진 것이다.603년[진평왕 25] 8월 고구려 장군 고승[高勝]이
신라의 북한산성을 포위하자 진평왕 자신이 1만의 군사로써 이를 구원하였다.
또한 661년[태종무열왕 8] 5월에 고구려 장군 뇌음신[惱音信]이 말갈인 장군 생해[生偕]와 함께 20여일간 포위하여
쌍방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이때 성주[城主] 동타천[冬陀川]은 2,800인의 군민[軍民]과 필사적으로
이 성을 방어하였다. 특히 이 전투는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고 백제부흥군의 도전을 받고 있던 때이므로 만약
고구려에게 함락되었다면 삼국통일 계획에 큰 변화를 초래하였을 것이다.
이 전공으로 성주 동타천은 대사[大舍, 제12관등]에서 대나마[大奈麻, 제10관등]로 승급되었다.
11세기 초 거란의 침입이 있자 현종은 고려 태조의 재궁[梓宮 : 유해를 모신 관]을 옮겨오고 증축하였다.
1232년[고종 19] 이곳에서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고, 1387년[우왕 13] 개축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외침을 자주 당하자 도성 외곽성으로 축성하자는 의논이 일어나 1659년[효종 10] 송시열[宋時烈]에게
명하여 수축하게 하고 1711년[숙종 37] 왕명으로 대대적인 축성공사를 하여 둘레 7,620보의 석성이 완성되었다.
성의 규모는 대서문, 동북문[東北門], 북문[北門] 등 13개의 성문과 시단봉[柴丹峰] 위에 동장대[東將臺],
나한봉[羅漢峰] 동북에 남장대, 중성문[中城門] 서북에 북장대가 있었다.
또한 이듬해에 지은 130칸의 행궁과 140칸의 군창[軍倉]이 있다. 성내에는 승군[僧軍]을 위한 136칸의 중흥사[重興寺]를
비롯한 12개의 사찰이 있고, 99곳의 우물과 26곳의 저수지가 있었다. 현재의 북한산성에는 삼국시대의 토성이 약간 남아
있기는 하나 대개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으로 성곽의 여장[女墻 :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은 허물어졌으나 성체는 잘 남아 있다.
◈ 참고문헌
『삼국사기』『고려사』『증보문헌비고』『신증동국여지승람』『경성부사(京城府史)』
『문화재대관』-사적편-[문화재관리국, 1976]「숙종조북한축성고」
|

△. 오늘은 북문에 이어 백운봉암문[위문]에서 용암문까지 포스팅 됩니다.
이동거리는 2.7km 입니다.. 그러나 대동사에서부터 위문가지는 게속 오름길 몇번을 휴식하며 올라야 합니다..

△. 남산 제비꽃
우리나라 전역의 산과 들에 자라는 다년생 초본이다.
생육환경은 양지 혹은 반음지의 물 빠짐이 좋은 곳에 자란다. 키는 10~15㎝이고,
잎은 3개로 완전히 갈라지며 옆에서 있는 것은 다시 2개로 갈라져 새발 모양을 하고 뿌리 부분에서 나온다.
꽃은 백색으로 잎 사이에서 꽃줄기가 나와 1개씩 달린다. 열매는 7~8월경에 타원형으로 달린다.
주로 관상용으로 쓰이며, 어린순은 식용으로도 쓰인다. [야생화 도감]

○ 상운사 [祥雲寺]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서울특별시와 경기도 고양시의 경계를 이루는
북한산 원효봉[元曉峰] 남쪽 중턱에 있다. 신라 때 원효[元曉 617∼686]가 삼천사[三千寺]와 함께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조선 중기 이후 승병들이 머물렀던 절이다. 1722년[조선 경종 2] 승병장
회수[懷秀]가 중창하면서 절 이름을 노적사[露積寺]로 바꾼 것을 1813년[순조 13] 승병장 태월[太月]과
지청[智廳]이 중건하면서 현재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1864년[고종 1] 긍홍[亘弘]이 극락전을 중건하고, 1898년 한암[漢庵]이 큰방을 중건하였으며,
1912년 주지 법연[法延]과 덕산[德山]이 법당을 중수하였다. 이후 1980년대에 법당을 중건하고
요사채를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른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삼성각, 범종각, 요사채 2동이 있고,
유물로는 고려 중기에 제작된 석탑과 석등 부재가 남아 있다. 그 중 석탑은 기단부와 1층 탑신만 전한다.
절 뒤에는 원효가 좌선하였다는 바위가 있다.
○ 출처 : 두산백과
|





△. 대동사
상운사 아래에 위치하면서 어떤 자료를 찾을수가 없내요..
아마도 기도처로 보이는것 같기도 히며 들어가는 입구에는 울타리 때문에 접근을 할려고 하니
수양중이라는 문구만 보여 앞으로지나기만 합니다..

△. 대동사
입구에서 ↑ 북문 0.2km, → 백운봉암문 1.3km 지점입니다.




○ 백운봉암문[白雲峰暗門]
북한산의 주봉[主峰]인 백운대 약836m와 만경대 사이에 위치한 성문으로 북한산성의 성문 중 자장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1711년[숙종 37] 북한산성 성곽을 축조하면서 설치한 8개 암문 중 하나인데, 일제 강점기 부터
위문[衛門]으로 불려왔다. 암문은 비상시에 병기나 식량을 반입하는 통로이자, 때로는 구원병의 출입로로
활용된 일종의 비상 출입구이다. 산성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적이 비교적 쉽게 접근할수 있는 고갯마루나
능선에 설치했다. 백운봉암문은 어느 암문과 마찬가지로 성문 상부에 문루[門樓]는 마련하지 않았다.
성문 양쪽은 장대석으로 쌓고 그 위 천장 부분은 장대석 여러 매를 걸쳐 만들었다. 이런 양식의 성문을 아치
모양의 홍예식과 구분하여 평거식[平据式]이라 부른다. 원래 문짝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문짝을 달았던
원형의 지도릿돌과 일반문의 빗장에 해당되는 장군목을 걸었던 방형 구멍이 남아있다.
|









△. 만경대 아랫부분을 지나면서
↑ 백운봉암문 0.1km, ↓ 노적봉안부 0.5km 지점으로 지나 갑니다.



△. 노적봉 휴식공간
↑ 백운봉암문 0.6km → 대동문 2.1km지점이다.




○ 용암문[龍岩門]
북한산성의 대동문 북쪽에 있는 암문으로, 산성이축성된 1711년[숙종 37]에 지어졌다. 용암봉 아래에 있어서
용암봉암문[龍岩峰暗門]이라고도 부르며 우이동으로 통하는 관문이다. 암문은 일반 성문과 달리 은밀한 곳에
만들어 전쟁 때에는 비밀통로로 사용하였다. 암문은 그 모양이 횽예가 아닌 방형이라는 것이 특징이며 상부에
문루도 만들이 않는다. 그러나 용암문은 동암문인 보국문과 달리 성 내무 쪽을 홍예형으로 만들었다.
용암문 상부의 여장은 무너졌던 것을 1996년에 새로 복원한 것이다.
|

△. 용암문 도착 이곳 주변에서 이른 점심 식사를 하며 휴식을 함께 합니다.
물론 여기 까지가 좀 힘든 구간이며 나머지 구간은 능선을 오르락 내리락 거리면서진행 하면 되는 구간입니다..
다음으로는 동장대, 대동문을 준비 합니다...
← 백운봉암문 1.2km, → 동장대 1km, 대동문 1.5km 지점입니다.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