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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14】1박2일 여행중 두번째 일정 하대마[下對馬] 이즈하라[嚴原], 수선사[修善寺 슈젠지]

◆ 해외 원정/☞-──-≪ 일 본

by 순도리(칠이) 2013. 5. 7.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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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박2일 여행중 두번째 일정 하대마[下對馬] 시내 관광

 


 

 

 

. 하대마[下對馬] 이즈하라[嚴原] 시내를 관통하는 하천이다.


    대마도는 원래는 우리 땅이다. 세종실록의 기록에 보면 "대마도는 땅이 몹시 좁은데다 바다 한 가운데 있어 백성들이 들어가 살지 않았다. 그런데 자기들 나라에서 쪽겨나 오갈 데 없는 일본 사람들이 몰려 들어와 그들의 소굴이 되었다" 라고 쓰여 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대마도는 옛날에 우리 계림에 속해 있었는데 언제 왜인들의 소굴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라고 쓰여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비롯해 조선 시대에 간행된 지도는 거의 빠짐없이 대마도를 우리 영토에 포함시켰으며 심지어 임진왜란 당시 토요토미 히대요시의 부하가 만든 팔도총도라는 지도도 대마도를 조선 영토로 표시했다. 대마도가 속주[屬州]라는 의식은 고려 때부터 있었는데 고려 중엽 대마도주에게 구당관과 만호라는 관직을 내린 사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고 고려 우왕 9년에는 박위장군이 대마도를 토벌하였다. 본격적인 속주화 작업은 조선 세종 때에 이뤄졌는데 1429년에 이종무 장군이 병선 227척에 17000여명의 대군을 이끌고 대마도를 정벌한 것이다. 1436년 대마도의 식량 사정이 어려워지자 도주인 소우 사다모리는 대마도를 아예 조선의 한 고을로 편입시켜 달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에 조선은 대마도를 경상도에 예속시키고 도주를 태수로 봉했다. 조선의 국왕이 관직을 내려 무역을 허락하고 그들을 조선의 영향력 아래 두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후 조선은 대마도에 대한 영향력을 오래 유지하였으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영향력이 약화되고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일본의 영토로 대마도가 편입되면서 일본이 대마도를 통치하게 되어 우리 나라는 대마도 땅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하대마[下對馬] 이즈하라[嚴原] 시내 관광

 

 

. 쓰시마[つしま, 對馬島/津島 대마도] 교류센터[交流 center] 이즈하라[嚴原] 쇼핑센터[shopping center]

티아라[TIARA] 앞에서 집결하여 대마도 2일째 일정을 시작합니다.

 

참고로 저는 새벽 04시경 기상하여 대마호텔 → 고려문 → 아리아케 → 대마시립엄원 유치원 → 대마호텔

왕복 5.7km 2시간30분 소요 새벽 산행을 한상태로 2일 일정 이미 시작 되었습니다.

사진은 대마호텔에서 아리아케 산을 바라보면서 창문 넘어로 담은 사진입니다..

 

 

. 대마시청[對馬市廳] 청사[廳舍]

오전 8시30분 티아라 앞에 모여 대마시청[對馬市廳] 시청앞을 지나 수선사로먼져 향합니다. 

 

 

. 시청 옆 골목길로 면암 최익현 선생의 순국 지사비가 있는 수선사로 향합니다. 

 

 

. 지나는 길마다 오전 9시경쯤 될을까..?

너무 인적이 없어 사람이 살고 있는 골목인지 의심이 들정도로 한적 하기만 하며

주변을 둘러 보아도 깨끗한 거리 풍경들이 깔끔해 보인다. 

 

 

. 이즈하라[嚴原] 시내를 관통하는 개천이있다.

도시 중앙을 흐르는 개천이면서도 너무나 깨끗하고 작은고기들이 한가로이 노닐고 있는 모습도

간간히 보이며 오늘은 쫄복과 민어들이 때를 지어 노닐고 있었다. 

 

 

. 잘 정리정돈된 골목길에 깨끗함까지 갖추었으니

깔끔떠는 일본인들에게무었인가 본받을 일이있어 보인다. 골목길을 지나다 보면 처음에는 섬짓한 느끼을 주는 

작은 사당같아 보이는 신을 묘셔놓은 사당 같은것들 골목 입구 마다 있는것 같았습니다.. 

역시나 일본은 신들의 나라이며 신사의 나라임을 알수 있었다.  

 

 

. 대마시청[對馬市廳] 있는곳에서 얼마쯤 걸었을까.[약5분정도]

이런 골목길을 지나면서 수선사를 찾아가 봅니다. 빈집 아닐까.? 너무 한적함에 의문이 든다. 

 

 

.잠시 후면 앞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수선사에 도착 합니다...

수선사라는 작은 사찰이면서 남골당을 갖이고 있는 사찰로 일반 주택가에 있으면서 아무런 느낌을 주지 않아 보인다.

그러기에 주민들도 가까이 있으면서 어무런 허물이 없기에 함께 공존 하지 않는가 생각해 봅니다.

수선사로 들어가 본다.

 

 

 

 

 

수선사[修善寺]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선생[先生] 순국기념비[殉國記念碑]

 

 

. 백제[百濟]의 비구니[比丘尼]인 법묘[法妙] 스님이 창건[創建]했다는 수선사[修善寺 슈젠지]

입구 우측에는 ‘圓盛山[원성산] 九品院[구품원] 淨土宗[정토종] 修善寺[수선사]’ 라고 쓴

비석이 嚴原町敎育委員會[엄원정교육위원회]에서 앞에 세워 놓았고

뒤로는‘陶山 訥庵の 墓[스야마 토쯔안의 묘]’안내판[案內板] 자리잡고 있습니다.

 

수선사[修善寺] 내부에는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선생[先生] 순국 기념비[殉國 記念碑]

스야마 토쯔안 선생 무덤[陶山 訥庵先生 の 墓]가 있는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여기에서 스야마 토쯔안에 관해 알아본다.

스야마 토쯔안은 1600년대 중반 쯤 조선과의 무역[즉 대마도의 발전을 도모]과

대마도에서 골머리 썩고 있던 멧돼지 퇴치로 유명한 분입니다.  

 

 

. 면암 최익현선생 순국기념비, 스야마 토쯔안 선생님의 무덤,

대형 납골당, 턱받이를하고 있는 지장보살,등등 수선사의 중요한 사찰임을 설명하고있다. 

 

 

. 수선사[修善寺] 돌계단을 올라서서 우측을 바라보니 붉은 옷을 입혀 놓은 불상[佛像]들이 모셔져 있습니다.

턱받이를 두루고 있는 지장보살님들 입니다.. 일본에서는 특이하게 모시고 있었다. 

 

 

. 수선사[修善寺] 본전[本殿] 바로 옆에는

대형 납골당[納骨堂,のうこつどう,노우고츠도우]에 ‘百世無窮 納骨堂’ 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고 자물쇠가 잠겨져 있습니다.

 

 

. 1박2일 일정으로 대마도 여행을 진행 해준 여행사 가이드분입니다..

열심히 우리 일행들에게 귀한 자료들을 하나씩 설명해 주고 있다. 

 

 

. 콩난. 콩짜개란, 고란초과에 속한다.

꽃을 피우면 꽃봉우리가 너무 작아서 자새히 살펴야 볼수 있는 란 종류다. 

 

 

. 일행들설명에 열중하고 있습니다만..

필자는 사진에만 열중 하고 있으니 설명은 언재 들어 볼라나...

대마도는 첫 방문이다 보니 필요한 자료들이 많이 있는대... 어떻게 해야 하나..

하나 하나 귀 기울여가면 사진을 담아 갑니다.... 

 

 

. 일본은 종교문화는 여러가지 문화가 섞여져 있으나

장례식은 대부분 불교식으로 지내며 절 옆으로는 항상 무덤인 납골당[納骨堂]이 있다. 

 

 

. 수선사[修善寺] 본전[本殿]에서 측면으로 본 요사의 모습입니다.

 

 

. 수선사[修善寺] 본전[本殿]에서 측면으로 본 납골당[納骨堂] 모습입니다.

 

 

. 수선사[修善寺] 편액[扁額]을 넣어서 기념사진[記念寫眞]을 한장 담아 본다.

 

수선사[修善寺] 편액[扁額]에 쓰인 ‘修善[수선]’ 이라는 글씨는 조선말 판서[判書]를 지낸

김학진의 친필[親筆]로써 지금도 낙성관지[落成款識]가 선명[鮮明]하게 남아 있습니다.

수선사[修善寺] 편액[扁額]을 배경으로 한컷...

 

 

. 수선사[修善寺] 본전[本殿]에서 붉은 턱받이 옷을 입혀 놓은 불상[佛像] 지장보살 들을 볼수 있었으며.

턱받이하고 있는 지장보살 상은 간난아이의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해주는 보살이라 하며..

간난아기와 관련되어 애기들이 밥먹을때 턱받이를 대어 놓은 것이라 한다.

 

 

. 수전사의 용마루를 바라봅니다..

이또한 한국의모양과는 조금 달라 보였지만 수호천사를 연상케 하는 조형물 같아 보이내요...  

 

 

. 습기가 많은 대마도라고 하지만 콩란. 콩짜개란, 이라는 놈들이

습한곳을 찾아 보다 보니 국내에서 흔이 볼수있는 것은 아닌 나무에서도 기생하고 있었습니다.. 

 

 

. 수선사[修善寺] 편액[扁額] 우측에 위치한

최근에 모셔진 것으로 보이는 납골당[納骨堂,のうこつどう,노우고츠도우]의 모습입니다.

 

 

. 수선사[修善寺] 본전[本殿] 우측에 위치한 오래된 납골당[納骨堂,のうこつどう,노우고츠도우]의 모습입니다.

 

 

. 우축으로 보이는 비석이 면암 최익현 선생의 순국기념비 입니다.

어느 한켄에 끼어 있는듯하게 보여 않타깝게 보여졌습니다... 그나마 좋은곳에 자리 하였다면 하는 마음뿐이였습니다.. 

 

 

.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선생[先生] 순국 기념비[殉國記念碑]

수선사[修善寺] 본전[本殿] 우측 납골당[納骨堂,のうこつどう,노우고츠도우] 입구 앞 우측에

1986년 한일양국[韓日兩國]의 유지[有志]들이 세운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선생[先生]

순국 기념비[殉國記念碑]가 서 있습니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1833∼1906] 선생[先生]의 유해[遺骸]는

수선사[修善寺]에 며칠 동안 안치[安置]되었다가 부산항[釜山港]으로 이송[移送]되었다고 합니다.

 

황수영[黃壽永] 박사가 글을 쓰고 1986년 8월 3일 건립된 "大韓人崔益鉉先生殉國之碑[대한인최익현선생순국지비]"

비석[碑石] 옆에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선생[先生]에 관한 이야기들을

일본어와 한국어로 새겨놓은 안내[案內] 비석[碑石]을 만들어 세워 놓여 있었습니다. 

 

 

.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1833∼1906] 선생[先生]은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전라도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켜 대항하다가 1906년 피체 되었습니다.

징역[懲役] 3년을 받고 대마도[對馬島]로 끌려온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선생[先生]은

74세 고령의 나이 임에도 적이 주는 음식[飮食]이라 거절하며 단식[斷食]하다가

1907년 1월 1일 이즈하라쵸에서 순국[殉國]하였습니다.

 

 

.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선생[先生]은

또 다른 일화에 의하면 일본순사가 높은 상관이 오기때문에 지금 쓰고 있는 갓을 벗으라고 지시합니다.

강인한 성격의 최익현 선생님은 "내가 너희 말을 듣노라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이다."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자 일본 순사는 "너는 우리가 주는밥을 먹고 지내고 있지 않느냐." 라고 하자

그날 후부터는 단식을 시작해 결국 아사[餓死]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수선사에서는 최익현 선생님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헤 순국지비를 세웠다면 대마도 여행길에 한번은 꼭 들러..^^

대한민국 후에들을 위해 목숨을 바쳐가며 나라를지켜온 선조님들에게 감사의 묵념을 조용히 올려 봅니다. 

 

 

. 이곳이 수전사 들어가는 입구이며..

골목길에서 모두 모여 함께 다시 대마시청[對馬市廳] 청사[廳舍] 방향으로 돌어가

덕해옹주 결혼비를 찾아 갈려 합니다. 

 

 

. 대마시청[對馬市廳] 청사[廳舍] 맞은편에 對馬市立嚴原幼稚園[대마시립엄원유치원]으로 올라가는 길에...

이곳으로 올라가면 금석성으로 관람 할려고 합니다.. 덕혜옹주. 통신사비. 고려문. 등등

한국인 들의 흔적이 잇는곳 입니다.

다음으로 이어지며 오늘 이곳가지만 포스팅 합니다...

신나2감사합니다... 즐감하셔요..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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