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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17】송강 문학의 산실이자 고향인 발자취 찾아 계당이 있는곳 지실마을에서.

◈ Travelog/⊙ 출사 여행지

by 순도리(칠이) 2012. 6. 28.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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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실[智實] 마을



 

 




    ○ 지실[智實] 마을 전라남도 담양군의 남단에 위치한 면이다. 동쪽은 화순군 북면, 서쪽은 광주광역시 북구 석곡동, 남쪽은 화순군 이서면, 북쪽은 창평 · 고서면과 접해 있다. 호남정맥 장원봉 자락이 영산강 증암천과 섬진강 동복천을 가른다. 인구가 담양군에서 가장 적다. 면 소재지인 연천리를 비롯하여 11개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호구총수』에 의하면 창평현 내남[內南)], 외남[外南]에 속했다. 1912년 내남면 ,외남면 지역이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이 통폐합되면서 남면[南面]이 되었다. 지명은 내 · 외남에서 유래되었다. 면에는 증암천을 중심으로 광주 충효동과 함께 가사[歌辭] 또는 시가[詩歌] 문화 유적들이 많다. 식영정[息影亭]은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1496~1568]을 위해 지은 정자이다. 정철[鄭澈, 1536~1593]의 성산별곡[星山別曲]의 산실로 안동네 지실 마을 등성이가 바깥뜸 "밖지실"로 이어져 별도로 떨어진 듯 올라 "별뫼"라 한 곳이다. 소쇄원[瀟灑園, 명승 제40호]은 1530년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스승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의 유배로 낙향하여 꾸민 별서정원이다. 자연과 잘 어울린 공간 배치를 보이고 있다.

 

 


 

. 지실[智實] 마을 입구에는 범상치 않은 은행나무 한그루가 있습니다.

 


 

. 지곡리 지실[智實] 마을은 영일 정씨일가 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송강 정철이 지실 마을에서 살았으며  송강 정철과 관련있는 계당매[溪堂梅] 매화가 있는 마을입니다.

 


 

. 1982년 12월3일 남면 면나무로 지정하였으며 당시 추정 수령은 약320년이 되었다고 하며

수고는 30M 둘레는 4.1M 남면 지곡리 리장 관리인으로 되었 있습니다.

소쇄원에서 식영정으로 이어지는 둘레길 "누정 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습니다..

 


 

. 저 건너편 낮으막한 야산에는 환벽당[環碧堂]이 있는곳입니다.

또한 지실마을 에서 식영정[息影亭] 또한 가까운곳에 있습죠...

 


 

. 송강문학[松江文學]의 산실이며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1593]시인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담양군 남면 지실마을. 성산별곡[星山別曲]의 산실 식영정[息影亭]과 16살에 사촌 김윤제[1501-1572]선생을 만나

공부하기 시작했던 환벽당[環碧堂] 그리고 양산보[1503-1557]선생의 소쇄원[瀟灑園]이 있고

지실마을 깊숙히에는 송강의 고향 산책길 만수명산로[萬壽名山路]가 있는 곳이다.

 


 

. 우축으로 보이는 건물은 지곡리 지실마을 마을회관으로 얼마전에 건립되었다.

 


 

. 계당과 만수동으로 가는 지실마을 길,

우거진 회화나무 거목과 정다운 돌담이 새삼 모든이의 고향임을 일깨워 준다.

이 길을 계속 올라가면 송강의 고향 산책길인 만수명산로[萬壽名山路]가 이어지며

가사문화권의 사랑방 계당[溪堂]과 백일홍[百日紅, 紫薇]이 만발한 비경 만수동[萬壽洞]이 있고

몇년 전 문을 연 새로운 명소 한식카페 자미원[紫薇苑]이 이름이 "바람소리"로 변경 되있다.

사랑방 계당[溪堂]있던 터에는 지금도 계당매[溪堂梅] 가 있으면서 이곳이 정철의 후손인 영일정씨 종가집 이기도 합니다..

 


 

. 회화나무와 돌담길을 보시면 범상치 않아 보이실것 입니다...

옛길 그모습로 남아 있는 이길이 만수동 만수명산로[萬壽名山路] 길따라 가시면 옛길로 소쇄원[瀟灑園]으로 이어진다..

 


 

. 앞로 더 올라 가면 좌축으로 호남의 5매[五梅]중 하나인"계당매[溪堂梅]" 가 있는곳이나온다.

송강문학의 고향마을, 이곳에 계당[溪堂]이 있다. 담양군 남면 지곡리 229번지.

송강 정철이 자주 찾던 곳으로 선생의 詩에 나오는 만수동 이웃집[萬壽洞隣家]이다.

 

만년에 네번이나 창평(지근의 담양)으로 낙향했던 송강이 즐겨 찾던 이 집터는 송강의 4남

기암 정홍명[畸庵 鄭弘溟 1582-1650]에 의해 처음으로 계당이라고 편액되었다.

기암 정홍명이 1616년에 낙향, 송강이 자주 찾던 이 터에 새로 집을 짓고 계당[溪堂]이라 편액하였다고 기록되고 있으며,

여기에서 그는 여생을 마쳤다. 기암 정홍명은 1616년에 계당을 짓고 살다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성공했다는 조보[朝報]를 받았으며, 좌절되었던 벼슬길에 올라 대제학에까지 오른다.

그러나 만년에는 계속 내리는 벼슬도 마다하고 이곳에 거처하며 아버지 송강의 작품들을 정리하여

오늘의 송강문학을 전하게 되었다. 기암도 역시 대시인이었다. 그도 1,100여수가 넘는 詩 등 작품을 남겼던 것이다.

 

기암 이후인 1689년, 송강의 5대손으로 송강이 공부하던 환벽당을 인수했던 수환 정흡이 조카 소은 정민하를 양자하면서

당시 계당에 살던 양경지선생에게서 계당을 인수하여 지금까지 그의 종손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그리고 소은의 장남 정근이 호를 계당이라한것이 지금껏 당호로 불려온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계당의 사랑채는 1902년 화재로 불탄던 것을 당년에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1951년 11월 6.25전란의 혼란이 계속되던 때, 빨치산은 지실마을을 방화했는데

이때 계당도 7동이 전소하고 이 사랑채만 간신히 살아남게 되었다.

 

호남 5매[五梅]

장성 백양사의 고불매[古佛梅], 선암사의 선암매[仙巖梅], 담양 지실마을의 계당매[溪堂梅],

전남대의 대명매[大明梅], 고흥 소록도의 수양매[水楊梅 ]가 있다.

이 가운데 고불매와 선암매는 각각 천연기념물 486호와 488호로 지정돼 있다.

 

=♤=== 지실마을은 여기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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