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청옥병 암각문
이곳은 선조 19년[1586] 영평에 왔다가 산천의 빼어남을 보고 배견와[拜鵑窩]를 지어
은거생활을 하던 박순 선생이 주변의 경치가 수려한 이곳의 이름을 붙이고
“제이양정벽[題二養亭壁]”이라는 제하의 시를 지었는데 이것을 김수증이 쓴 것이다.
또 이곳에는 선조의 윤음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석봉 한호가 쓰고, 신이가 새긴 것이다.
박순의 자는 화숙, 호는 사암, 본관은 충주이고, 시호는 문충이다.
명종 8년(1553) 정시문과에 급제한 후 한산군수, 이조참의 등을 거쳐
영의정을 지냈다. 인접한 곳에 선생을 배향한 옥병서원과 신도비가 있다.
[박순 시]
題二養亭壁 [제이양정벽] : 곡운 김수중[谷雲 金壽增]이 쓴 사암의 시
谷鳥時時聞 [곡조시시문]. 一箇 匡牀寂 [일개광상적]. 寂散郡書每 [적산군서매].
憐白鶴帶前 [련백학대전]. 水纔出門 [수재출문]. 便帶瘀 [변대어]
골짜기의 새소리 때때로. 한마디씩 들려오는데
침상은 쓸쓸하고 여러책 흩어져 있네. 언제나 안타까운건. 백학대 앞의.
물로서 입구를 겨우 나가면. 곧 흙탕물을 띤다네
[선조의 윤음]
松筠 [송균]. 節操 [절조]. 水月 [수월]. 精神 [정신]
松筠節操 [송균절조] : 소나무 대나무 같은 절개 있는 지조
水月精神 [수월정신] : 물과 달 같은 정신
[암각문]
산금대[散擒臺]. 장란[障蘭]. 수경대[水鏡臺].
청학대[淸鶴臺]. 토운상[吐雲床]. 와준[窪尊]. 청냉담[淸冷潭]
송죽같은 절의와 수월같은 정신을 지닌 박순
박순(朴淳)
1523(중종18)~1589(선조22)
백운산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 한탄강으로 유입되는 영평천(永平川)변에 우거진 숲,
맑은 물,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명승지가 많아 옛부터 시인 묵객들이 자주 찾아
즐기었는데 여덟 곳이 특출하여 영평팔경(永平八景)이라고 하였다.
그곳이 화적연, 금수정, 창옥병, 와룡암, 낙귀정지, 백로주, 청학동, 선유담이다.
영의정을 14년간이나 지낸 박순(朴淳)은 이 아름다운 자연환경에 매료되어 선조대왕이
조금만 더 있어 달라는 간곡한 만유도 물리치고 이곳을 찾아 창옥병 건너 언덕에 집을 짓고
살며 속세에서 벗어나 시골 백성 노인들과 자리를 함께 하며 즐겁게 지내면서 배우러 오는
자가 있으면 서로 학문을 강론하고 지내다가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1649년(인조27) 이 지방 유림들이 공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서원(書院)을
세우기로 하고 우선 사우만을 창건하고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받들어 오다가 1680년(숙종6)
영의정 신완(申琓)의 주청으로 동은 이은건, 문곡 김수항(文谷 金壽恒)을 추가 배향하고
1713년(숙종39) 옥병서원(玉屛書院)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1871년(고종8) 서원훼철령에 따라 서원이 철폐되자 이곳 유림들이 영당(影堂)을 세우고
중단된 향사를 부활하였다. 이때 김성대(金聲大), 이화보(李和甫), 윤봉양(尹鳳陽)을
추가 배향하였다. 6.25사변으로 영당마저 소실되었던 것을 1980년 이곳 유림대표
이명우(李命雨) 서원복원추진위원장을 중심으로 복원을 추진 현재의 서원을 복원하였다.
이서원에 배향된 명현 박순의 행장을 살펴본다.
박순의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菴), 본관은 충주이고 우윤(右尹)우(祐)의 아들이다.
6세 때 어머니를 잃고 23세 때에는 부친상을 당하여 소년기에는 매우 불우하였으나
어려서부터 남다른 데가 있어 학문에 열중하여 18세 어린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해 주위의
칭찬을 받았다. 서경덕(徐敬德)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혔고 1553년(명종8)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성균관 전적을 거쳐 홍문관 수찬, 교리 등을 역임한 후 한산군수(韓山郡守)로
나가 선정을 베풀고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홍문관 직제학, 이조참의, 좌ㆍ우승지를 거쳐
1565년(명종20) 대사성(大司成)에 이어 대사간(大司諫)이 되어서 대사헌(大司憲)
이탁(李鐸)과 함께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불교를 신봉하는 것을 기화로 신임을 받아 만행을
자행하는 요승 보우(普雨)를 탄핵하여 유배시켰다.
외척인 척신 윤원형(尹元衡-문정왕후의 동생, 명종의 외숙)에 대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탄핵하여 조정에서 축출시켜 포악한 척신일당의 횡포를 제거하는데 주역이 되었다.
그 후 대사헌, 대제학, 이조판서, 우의정, 죄의정 등을 두루 거쳐 1572년(선조5) 영의정에
올라 14년간이나 재직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기어 역사에 빛나는 대재상(大宰相)이 되었다.
또한, 성리학(性理學)에 대한 연구가 깊었으며 시(詩), 문(文), 서(書) 모두 뛰어났다.
고매한 인격과 청렴결백한 정신등 한국 선비의 모든 기품을 갖추었다.
그러므로 선조대왕께서 교지를 내려 이르기를 박상공(朴相公)은 송죽(松竹)같은
절조(節操)에 수월(水月)같은 정신을 가졌다고 하였다.
1568년(선조1) 공에게 모든 벼슬하는 사람이 최고의 영예로 여기는
대제학(大提學)이 제수되었다. 그런데 공은 ‘선배이신 퇴계 선생이 아직 대제학이
못되시었는데 어찌 제가 대제학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사직 상소를 올려
퇴계 선생이 대제학이 되시도록 하였다.
얼마나 장한 일인가 박상공의 인품에 머리가 숙여진다. 그러하기에 영의정을 14년간이나
역임한 것이라 느껴진다. 정계에서 물러나와 포천을 찾아 영평팔경을 벗 삼아 지내며
이 고장을 예찬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 곳 선비들이 그의 공적과 높은 덕을 받들고
기리고져 영평에 옥병서원을 세워 배향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고 저서로는 사암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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