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2012.04.14】영조 후궁인 사도세자 생모 영빈 이씨 묘지 수경원을 찾아서...

◈ Travelog/⊙ 고찰 문화재

by 순도리(칠이) 2012. 4. 14. 21:38

본문



▣ 사도세자 생모 묘지 수경원 [綏慶園]



 

 



    ◎ 산행장소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92. ◎ 산행일자 : 2012년 03월 31일 [토요일]

    ○ 수경원 [綏慶園] 영빈 이씨[暎嬪 李氏] 1696년 ~ 1764년 영빈 이씨는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이다. 어려서부터 궁녀생활을 하다 귀인이 되었으며 영조의 깊은 총애를 받고, 1730년[영조 6] 영빈으로 봉해졌다. 4명의 옹주와 후일 사도세자가 되는 원자를 출산하고 그 밑으로 옹주 하나를 더 낳았다. 1762년 사도세자가 폐위되는 일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고 한다.사망했을 때 영조는 후궁 제일의 의식으로 장례 지냈으며, 이듬해 의열[義烈]의 시호를 내릴 때는 그 의식을 친히 집행하였다. 시호 의열과 함께 같은 이름의 사당을 세워 제향했으나, 1788년[정조 12] 선희궁으로 고쳤고, 1870년[고종 7] 한때 육상궁[毓祥宮]에 합했다가 1900년에 다시 독립시켰다. ○ 일화 화현재 서울시 서대문구의 봉원사 입구에는 본래 영빈 이씨의 묘소인 수경원이 위치해 있던 연세대학교로 넘어가는 나지막한 고개가 있다. 사람들은 이 고개를 보통 '버리고개' 또는 '벌고개'라 부른다. 영조는 각별히 총애했던 영빈 이씨가 세상을 떠나자 크게 애통해 하며 후궁 제일의 예로 장례를 치르고 수경원을 조영하여 주었다. 그런데 이 수경원의 주룡[主龍]에 해당하는 산능선을 사람들이 넘어다니게 되면 등성이가 낮아질 뿐만 아니라 불경스러운 일이 된다 하여 통행을 금지시켰고, 만일 다니는 사람이 있으면 벌을 내렸으므로 '벌[罰]고개'라 했다. 이 말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서 '버리고개'가 됐다고 한다. 출처 : 문화재청 서오릉 관리소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서오릉에 있는

조선 제21대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인 영빈이씨[暎嬪李氏]의 묘.

증찬성 이유번[李楡蕃]과 부인 한양김씨[김우종의 딸] 사이의 딸이며.

첫 시호는 의열[義烈]로 이후 의열궁[義烈宮]으로 불렸다가 다시 소유[昭裕]로 시호가 바뀌었다.

 

사적 제198호인 서오릉[西五陵] 내 명릉[明陵]과 익릉[翼陵]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원래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내에 있었으나 1968년 현재의 자리로 이장하였다.

1899년[고종 36]에 정자각과 비각을 새로 신축하고 비석도 새로 세웠는데 정자각과 비각은 연세대학교 내에

그대로 남아 있어 비각과 비석이 서로 떨어져 있다.

 

영빈 이씨[1696~1764]는 영조의 후궁 가운데 가장 총애를 받은 후궁으로 세상을 떠나자

영조는 후궁 가운데 으뜸의 격식으로 성대하게 장례를 치르도록 명하였다.

 


 

. 비각과 정자각은 서울 연세대학교 내에 남아 있으며

비석만 묘지와 함께 옮겼다고 한다,

예전에 버리고개는 수경원[綏慶園], 있던곳으로  

즉 장헌세자의 생모 영빈이씨 무덤의 주룡[主龍]이므로

이 고개를 넘어가는 사람은 불경죄로 벌을 받았다는 데서 명칭이 연유한다.

 

비문에는 "대한 소유영빈 수경원[大韓 昭裕暎嬪 綏慶院]"라고 쓰여 있다

 


 

. 생애

 

1701년에 궁녀로 입궁하였다. 영조의 승은을 입어 1726년 11월 16일 내명부 종 2품 숙의에 책봉되었다.

1728년에 귀인이 되었다가 마침내 1730년 11월 27일, 내명부 정1품 빈[嬪]의 첩지를 받아 영빈이 되었다.

슬하에 화평옹주[和平翁主], 화협옹주[和協翁主], 화완옹주[和緩翁主]에

조졸한 옹주 둘을 포함한 5녀와 1남[사도세자], 모두 여섯 자식을 두었다.

 

1735년 사도세자의 출생 때 영조는 그녀의 곁을 직접 지키고 있었다 한다.

이덕일에 의하면 영조는 그에게서 어머니 숙빈 최씨의 그림자를 읽곤 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 영조의 총애를 받던 화평옹주와, 영빈을 닮아 미색이었다는 화협옹주는 병을 얻어 숨졌다.

 

고명아들인 셋째 사도세자는 애초에 아버지 영조와 사이가 멀었던 데다,

노론 벽파 신료들과 친동생인 화완옹주, 영조의 후궁이던 문숙의까지 나서서 죽음으로 몰아갔으며,

모후인 영빈까지 단죄를 간하자 뒤주 속에 갇혀 굶어 죽었다.

 

막내딸 화완옹주만이 참척[慘慽]하지 않고 천수[天壽]를 누리었으나,

젊은 나이에 어린 딸과 남편을 잃었으며, 말년에는 정조의 즉위와 함께 유배에 처해져 정처[鄭妻]로 격하되기도 했다.

 


 

. 사후

 

자식들과 손주들[의소세손, 화완의 딸 등]의 죽음을 지켜보던 그녀는 1764년 음력 7월 26일,

사도세자가 죽은 지 2년 후 사망하였다.

 

영조는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며, 영빈의 장례를 후궁 제일의 것으로 하였고, 의열[義烈]의 시호를 내렸다.

뒷날, 고종 대에 이르러 사도세자가 장조[莊祖]로 추존되자 묘[墓]가 원[園]으로 승격되며,

수경원[綏慶園]의 원호를 받았고, 시호 소유[昭裕]가 더해졌다. 칠궁에 올랐다.

 

그녀의 사당인 선희궁[宣禧宮]은, 그녀가 죽은 1764년에 건립되어

의열묘[義烈廟]라 불리다가 1788년 [정조 12년]에 비로소 선희궁이 되었다.

 

건립 당시에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교동에 해당하는 곳에 있었으나,

1870년 [고종 7년] 위패를 육상궁[毓祥宮]으로 옮겼다가,

1896년 선희궁으로 되돌린 뒤, 1908년 [순종 2년] 다시 육상궁으로 옮기는 등 변동이 잦았다.

현재는 모든 칠궁이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에 존재하고 있다.

신교[新橋]는 신교동 70번지와 청운동 108번지를 이어주는 다리로 선희궁을 만든 후

그 동편에 새로 놓았는데 새다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 의열묘[義烈廟]에서 수경원 [綏慶園]이란 이름을 가지게 되어서 그런지

혼유석.망주석.문인석.석호.석양.석마.석등.등등 모든것들이 후궁묘라 단촐해 보였습니다.  

 


 

. 영빈 전의이씨 지묘[暎嬪 全義李氏 之墓] 묘비 비문 입니다.

 


 

. 이곳으로 옮겨 오면서 신촌동[지금의 연세대학교 자리]에는 있었는대.

정자각. 비각등등 수경원으로서 가춰야할 것들이 없어서 인듯 너무나 단촐하게 보이는것이 아쉽기만 하였습니다.  

 


 

. 보여지는 것이 그져 일반묘지 처럼 느껴지며 누가 보아도 후궁묘 인지는 알수가 없을것입니다...

다른곳 "묘"가 아닌 "원"으로써 볼수 있겠습니까 만은 .....

자세한 이야기며 설명 들을 보아야만 알수 있는것이 수경원 영조 후궁인 영빈이씨 묘지로 남아 있더군요..

 


 

. 그나마 화려하게 보여지는 것은 봉분을 보호 하기위해 둘려있는 곡장이 있기에

일반묘지에서 볼수없는 것이 있어 후궁 영빈 이씨 묘지 임을 알수 있을것이다.

옮겨온지 약44년 되어 옛것으로 보여지는 것들은 없었으며

후궁이 아닌 본 부인 이였다면 아마도 이렇게 나마 보여지지는 않았을까 의문이 든다...

 

=♡==== 끝 ====♡=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