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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9】역사속 문효세자 미스터리 죽음 서삼릉 효창원 찾아서...

◈ Travelog/⊙ 고찰 문화재

by 순도리(칠이) 2012. 3. 14.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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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삼릉[西三陵] 관리지역 내에 효창원[孝昌園]



 

 





    ○ 역사속 문효세자, 의빈 성씨의 미스터리한 죽음 이 어린 문효세자의 죽음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그것은 조선이 몰락하게 되는 계기 중의 하나가 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정조에게는 오랫동안 후사가 없었다. 중전인 효의왕후은 아이를 가지지 못하였고, 후궁인 원빈 홍씨은 궁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화빈 윤씨은 왕자가 아닌 옹주를 낳았고 그나마도 일찍 죽고 만다. 이런 상황에서 의빈 성씨가 왕실의 오랜 고민을 해결해 주는 큰일을 해냈던 것이다.그렇게 모두에게 소중했던 문효세자의 탄생이었지만 겨우 5살이라는 나이에 홍역으로 세상과 하직하고 만 것이다.세월이 흐르고 조선은 정조의 마지막 후궁인 수빈 박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순조를 정조가 죽은 후에 새로운 임금으로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순조의 나이는 11살이었다. 아직 어린 나이였기에 그는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속에 꼭두각시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다.그리고 순조는 자신의 아버지인 정조가 행했던 개혁이 정순왕후에 의해 모두 물거품 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조선은 근대화의 기회를 쳐버리고 결국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문효세자가 병으로 죽지 않았다면 정조가 죽은 후에도 그는 장성한 나이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정순왕후에 맞설 정도 의 힘을 지닐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또 그랬을 경우 문효세자는 정조의 업적을 물려받아 조선을 근대화의 길로 이끌었을 수도 있다. 이렇게 볼 때 문효세자는 조선의 마지막 희망 중 하나였다. 그런 문효세자의 죽음에 의빈 성씨의 힘을 견제하기 위한 효의왕후의 독살 가능성이 제기되는 것은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효의왕후는 조선을 몰락하게 만든 엄청난 일을 자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역사에서 보면 당시 의빈 성씨와 그녀가 낳은 옹주, 문효세자의 연이은 죽음이 정조에게 상당한 심적 타격을 줬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집안이 한미하고, 당파가 없던 의빈 성씨는 여자문제에 지극히 담담했던 정조가 유일하게 마음에 둬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승은 후궁이었다. 원빈 홍씨를 비롯해 화빈 윤씨, 수빈 박씨 등 정조의 나머지 간택 후궁들은 모두 노론 일파 유력 가문의 딸들이었다. 실제 의빈 성씨는 성품이 곱고 욕심이 없었으며, 정조 자녀의 절반이 그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났을 정도로 정조가 많은 애정을 쏟았다고 전해진다. 특정 당색이 없었던 의빈 성씨야 말로 정조가 온전히 의지하고 쉴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였던 것이다. 의빈 성씨가 문효세자를 낳기 전까지 정식 첩지를 받지 않은 특별 상궁의 신분으로 머물렀던 것도 집안이 한미했던 탓도 있겠지만 임신을 하지않은 궁인을 후궁으로 책봉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 정조가 당쟁에서 의빈 성씨를 보호하기 위한 처사로 보는 해석이 많다. 이후 의빈 성씨는 정조 등극에 결정적인 도움을 줬던 영의정 서명선의 간언으로 아들을 낳고 3개월 후 왕자의 세자책봉이 거론되면서 정3품 소용으로, 다시 3개월이 지난 이듬해 2월 정1품 의빈으로 책봉됐다. 유독 자식복이 없었던 정조에게 의빈 성씨의 몸에서 첫 아들을 얻게 된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이었고 왕자탄생을 기념하는 대규모 별시가 실시되고 이른 세자책봉 논의가 이뤄지는 등 문효세자는 정조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그렇게 아무 탈없이 잘 자라던 문효세자는 5살의 어린 나이에 갑자기 죽어버린다. 홍역에 걸렸다 완쾌돼가던 중 갑자기 병이 악화돼 사망한 것이다. 앞서 어린 옹주를 잃고 당시 임신 5개월의 몸이었던 의빈 성씨에게 연이은 자식들의 죽음은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런 심적 고통 때문인지 그로부터 몇 개월 후 의빈 성씨 마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정조는 “(의빈 성씨의)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더 이상 의탁할 곳이 없다’며 깊은 슬픔에 잠기고 20여 일동안 정사를 돌보지 못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여러 혼란이 빚어지자 많은 대신들이 정조에게 정사를 돌볼 것을 간청했다. 그러는 사이 정순왕후(김여진 분)는 기다렸다는 듯이 의빈 성씨와 문효세자 이향, 역시 의빈의 딸인 옹주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독살설을 제기하며 진짜 역적을 찾아내야 한다는 한글 교서를 내렸다. 당시 상황전개를 보면 정순왕후는 이들의 죽음과 관련해 사태의 모든 진전 상황을 미리 알았던 것처럼 기막힌 예견 능력을 보였다. 때문에 정순왕후가 제기한 의문투성이 역모 사건에 대한 정조의 반응은 분노에 가까웠고 정순왕후의 뜻과 달리 오히려 사태를 축소시키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이 때문에 항간에는 정순왕후가 이들의 죽음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떠돌았다. 실록에도 의빈 성씨의 죽음에 대해 세간에 의혹이 많았다는 점이 기록돼있다. 윗 내용 출처 : 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0805272320001020

 

 


 

사진으로 본 여행기

 

. 왕릉[王陵]과는 달리 정자각[丁字閣] 다르게 생겼다.

정[丁]모양을 갖추고 있지만 이곳은 일[一]모양으로 만들어져있다.

정자각[丁字閣]은 "정[丁]자와 일[一]자"로 만든 정자각[丁字閣]이 있다고는 한다..

 

. 정조 어제[御製] 문효세자 신도비[文孝世子 神道碑]

 

. 효창원[孝昌園]

효창원[孝昌園]은 문효세자[文孝世子]의 묘소이다.

문효세자는 조선 제22대 정조[正祖]의 큰아들이며 의빈[宜嬪] 성씨[成氏]의

소생으로 정조 6년[1782] 9월7일에 태어나

정조10년[1786] 5월11일에5세로 일찍세상을떠났다.

원래 문효세자의 무덤은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효창공원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44년에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봉분의 석물로는 혼유석[魂遊石]1기, 장명등[長明燈]1기, 문인석[文人石]2기, 망주석[望柱石]2기, 석호.마.양.등6기가 있다.

 

. 왕릉[王陵] 보다는 규묘는 작지만 혼유석[魂遊石] 망주석[望柱石], 장명등[長明燈], 문인석[文人石],

석양[石羊], 석호[石虎] 석마[石馬]으로만 구성 되있었으며

없는 부분은 곡장. 능주의에 "난간석[爛干石]". 특히나 "무인석[武人石]"이 없었다.

 

.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년 음력 9월 7일 새벽에 태어나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1786년 음력 5월 11일에 5세로 요절한다.

아들이 없던 정조는 아들의 탄생을 소원하였고 따라서 그가 태어나자마자 바로 왕세자로 책봉했던 것이다.

사후 문효세자로 추증되었고 대한제국 수립 후 태자로 추증되었다. 묘소는 숙부 의소세손의 묘소 근처에 안장되었다.

 

. 주변 풍경들 혼유석[魂遊石] 망주석[望柱石], 장명등[長明燈], 문인석[文人石], 석마[石馬] 왕릉과는 같아 보이나 작개만 보이는군요.. 

 

. 문인석[文人石]

 

. 장명등[長明燈], 문인석[文人石], 석마[石馬]

 

.비석[碑石]과 망주석[望柱石]에는 작은 동물 형상이 붙어 있는대 묘지를 바라 보는곳에서 우축에

형상은 올라가는 모양 좌축에는 내려가는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더군요.. 왜일까..??

 

. 좌축에 있는 망주석[望柱石]이다..동물 형상은 내려가도 있다....왜일까 ???

 

. 비문[碑文]은

"朝鮮國[조선국] 文孝世子孝昌園 [문효세자효창원]"

 

. "석호[石虎]상"

 

. "석양[石羊]상"

 

. 묘지 주변을 엄호 하는 석호.석양 등등..

뒤면에서 바라본 사진입니다.

 

. 서삼릉[西三陵] 효창원 주변에는 봄을기다리고 있는듯해 보였으며

봄소식으로 하려한 꽃들로 장식이 될것같더군요....

 

⊙ 의빈성씨 [宜嬪成氏, 1753~1786]

 

조선 제22대 왕 정조의 후궁으로 문효세자의 어머니이다.

의빈 성씨[宜嬪 成氏, 1753년~ 1786년]는 조선의 제 22대 왕 정조[正祖]의 후궁으로, 정조의 장남인 문효세자를 낳았다.

본관은 창녕[昌寧]. 아버지는 증찬성 성윤우[成胤祐]이고,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임씨이다.

정조의 다른 후궁들은 간택되어 들어온 후궁들이나, 의빈 성씨는 궁녀 출신의 승은 후궁이다.

화빈 윤씨 처소의 궁녀 출신이었다는 설이 있으나 근거는 없다.

1782년[정조 6년] 음력 9월 7일, 궁인 신분으로 왕자를 낳아 내명부 정 3품 소용[昭容]이 되었다.

11월 27일에 아들이 원자 정호를 받았고 이듬해 2월에는 본인도 승격되어 정1품 의빈이 되었다.

원자는 1784년[정조 8년] 음력 7월 2일에 정식으로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784년(정조 8년) 윤 3월 20일에는 딸을 낳았지만 첫 돌을 넘기기도 전에 잃었다.

1786년[정조 10년] 음력 5월 11일 문효세자가 죽었고, 같은 해 음력 9월 14일 의빈 성씨도 세 번째 출산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사망했다.

이에 정조는 그녀의 상제를 영빈이씨 장례의 예에 따라 1등 후궁의 예로 치러 주었다.

같은 해에 죽은 아들 문효세자와 함께 효창묘 [孝昌墓, 고종 7년 효창원으로 승격/현재의 효창공원 자리]에 묻혀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강제 이장되어 지금은 서삼릉의 후궁 묘역에 묻혀 있다.

정조는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의 무덤에 각각 죽음을 애도하는 어제 신도비[御製神道碑]를 내렸는데 현재 모두 서삼릉에 옮겨져 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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