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강화 나들기 따라 내려오다보면 초지포구 지나 이곳으로 나오면서 보이는
초지진의 모습이며. 우축 도로는 해안도로 입니다.

△. 초지진 주차장 안내 표지에서는
초지진은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7년[1656년]에 구축한 요새이다.
고종3년[1866년] 10월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침입한 프랑스군[로스]극ㄷ오합대 및 고종8년[1871년] 4월에통상을 강요하며
내침한 미국[로저스] 아세아 함대와 고종12년[1875년] 8월 일본군함 운양호와 치열한 격전을 벌인 격전지이다.
당시 프랑스와 미국,일본의 함대는 우수한 근대식 무기를 가진데 비해 우리군은 사거리도 잚고 정조준도 안되는
열세한 무기로 외세레 대항해 싸웠던 것이다. 특히 일본군함 운양호의 침공은 고종13년[1876년]에
강압에 의한 강화도 수호조약[병자수호조약]을 맺어 인천, 원산,부산항을 개항하게 되고.
또한 우리나라의 주권을 상실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초지진에는 병마첨 절제사1인.군관11인,
군사320인, 전선3척이 주둔하였었다.이곳은 민족 시련의 역사적 현장으로 애국애족 및 호국정신의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1973년 성각을 보수하고 당시의대포를 전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초지진 안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런대 좌축 문고리 보시면 현대식 열쇠가 있다....
관리 차원에 저녁 시간에는 관리소에서 열쇠로 잠그 더군요..

△. 초지진 홍이포 [草芝鎭 紅夷砲] 누각 내부 안내문에서 [대포 = 홍이포]
강화도의 여러 포대와 진·보에는 홍이포[紅夷砲]가 전시되어 있는데 모조품이 아닌 진품은
초지진(사적 제225호)의 홍이포 하나뿐이다. 조선 영조 때부터 주조하여 사용한 포구장전식 화포로,
길이 2.15m·무게 1,800kg·구경 100mm이며 사정거리는 700m이다. 폭발하는 힘으로 포탄은 날아가지만
포탄 자체는 폭발하지 않아 위력이 약하다. 1866년의 병인양요, 1871년의 미국 아시아함대 침입,
1875년 일본군함 운양호사건 때 사용하였다. 정면 3칸·측면 1칸의 포각 안에 전시되어 있다.

△. 초지진 내부에서 바라본 대명포구와 김포 해상공원 입니다.

△. 좌축 으로는 초지리포구 작은포구 횟집으로 구성 되있 더군요.

△. 초지진 내부에서 바라본 초지대교 저곳을 넘어 대명항으로 들어갈것이며 그곳에서 귀가 버스 이용할렵니다.

△. 내부에서 누각 우측 동쪽 방향이며 멀리 건너는 대명항이다

△. 내부 누각 좌측 서쪽으로..북쪽을 바라 보면서 담은 사진임

△. 초지진의 참고 문현에서
『여지도서[輿地圖書]』와 『강화부지[江華府志]』에 따르면 1716년에 설치되었으며,
1726년(영조 2)에 진장[鎭將]으로 종4품 무관인 병마만호[兵馬萬戶]가 배치되었다. 1763년에는 진장을 종3품 무관인
첨사[僉使]로 승격시켰다. 군관[軍官] 11인, 사병 98인, 돈군[墩軍] 18인, 목자[牧子] 210인을 배치했고,
진선[鎭船] 3척을 두었다. 초지돈[草芝墩]·장자평돈[長者坪墩]·섬암돈[蟾巖墩]이 소속되어 있었고,
포대는 9개가 있었다. 1871년(고종 8) 4월 23일 미국 해병 450명이 함포의 지원을 받으며 초지진에 상륙하였다.
초지진 수비대가 이들을 맞아 싸웠으나 화력의 열세로 패배, 결국 미군에 점령당했다.
이 때 진내에 있던 군기고[軍器庫]·화약고·진사[鎭舍] 등 군사 시설물은 미군에 의해 모조리 파괴되었다.
포대에 남아 있던 40여 문의 대포 역시 그들에 의해 파괴되거나 강화해협으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그 뒤 1875년 8월 21일, 운요호가 강화도 동남방인 난지도[蘭芝島] 부근에 정박,
단정[短艇]을 내려 담수[淡水]를 찾는다는 구실로 초지진 포대에 접근하여 왔다. 이에 초지진 수비군이
일본 함정을 향해 포격을 개시하자, 운요호는 11MM와 4MM 함포로 포격을 해 초지진 포대는 일시에 파괴되고 말았다.
이 때 초지진에는 사정거리 700m의 2인치 정도의 대완구만 있었다. 그 뒤 초지진은 폐쇄되어,
시설은 모두 허물어지고 돈[墩]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1973년 초지진의 초지돈만 복원되었는데,
높이가 4m 정도이고 장축이 100여m 되는 타원형으로 이 돈에는 3개소의 포좌[砲座]와 총좌[銃座] 100여 개가 있다.
그 외 조선시대 대포 1문이 포각[砲閣] 안에 전시되어 있다. 지금도 성채와 돈 옆의 소나무에는 전투 때 포탄에 맞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 미국 및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과 맞서 격렬하게 싸웠던 전투상을 그대로 전해 주고 있다.

△. 관리소와 포탄흔적을 갖고 있는 소나무들 수난을 격고 지금도 살고있습니다.

△. 성벽의 포탄 흔적
이곳은 병인양요[1879]. 신미양요[1871년] 및 운양호사건[1875년]의 격전장으로서
노송과 성벽에 가종 포탄의 흔적이 남아 있어 그때의 치열했던 전황을 말해주고 있다.

△. 노송 [소나무]에 포탄 흔적
지지대 바로 옆부분에 치료해 놓으곳이 포탄 흔적입니다.

△. 초지진 전체를 한번 담아 보며 강화 나들길[호국돈대길] 제2코스를 약6시간 동안 탐방 하며
지나온 곳마다 역사의 흔적들을 만져보고 느껴보는 시간이 되였습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난을
새롭게 알수 있었습니다. 언재부터인가 둘래길이 유명해지며 각 지방 자치에서 서둘러 개통하는 일들이 많이 있었으나
여기 마져 그런 흐름에 모순들을 보완하는 미덕이 부족함을 많이 느낄수 있었으며 아쉽다는 생각을 하게됬습니다.
앞으로 많은 변화로 좀더 좋은자료는 물론이요 교육자료로 이용할수있을것을 추천해 봅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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