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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1】비운의 고려 마지막 제34대왕 공양왕 묘지 찾아서..

◈ Travelog/⊙ 고찰 문화재

by 순도리(칠이) 2012. 3. 4.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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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마지막왕 공양왕릉 [恭讓王陵]



 

. 공양왕릉 [恭讓王陵] 전경

1345[충목왕 1]~ 1394[태조 3]. 고려 제34대 왕[1389~92 재위].

 

고려의 마지막 왕으로 이성계 등에 의해 왕으로 옹립된 후 신진사대부의 세력확장에 이용되는 등 불운하게 생을 마쳤다.

이름은 요[瑤]. 신종[神宗]의 7대손. 아버지는 정원부원군[定原府院君] 균[鈞]이고, 어머니는 국대비왕씨[國大妃王氏]이다.

비는 창성군[昌成君] 진[稹]의 딸 순비노씨[順妃盧氏]이다. 1389년 이성계[李成桂]·심덕부[沈德符] 등에 의해

창왕이 폐위되자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이성계 일파의 압력으로 우왕과 창왕을 죽였다.

 

사회 전반에 걸친 제도 개편을 단행했으나, 이는 신진사대부들이 자기들의 세력기반 확립을 위한 개혁이었다.

1391년 정몽주[鄭夢周]를 살해한 뒤,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은

관제를 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공조 등의 6조로 개편하고, 첨설직을 폐지했다.

유학의 진흥을 위하여 유학 교수관을 두었으며, 과거시험에 무과를 신설했다.

 

배불숭유론에 의해 주자가례를 시행하고, 오교양종[五敎兩宗]을 없애

군사에 보충하고, 절의 재산을 몰수하여 각 관사에 분속시켰다.

경제면에서는 1391년 광흥창[廣興倉]·풍저창[豊儲倉]을 서강[西江]에 세워 조운의 곡식을 비축하게 했으며,

개성 오부에는 의창[義倉]을 설치했다. 신흥세력의 경제 기반을 다지기 위해 과전법을 실시했으며,

인물추고도감[人物推考都監]을 두어 노비결송법을 정했다. 남은[南誾] 등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함으로써,

1392년에 폐위되었다. 1392년 공양군으로 강등되었고,

1394년 삼척부[三陟府]에서 살해되었다. 능은 고릉[高陵]이다.

 


 

 


 

 


 

. "나는 왕이 되기 싫다 !"공양왕

 

고려왕가의 운명이 기울어 가던 1392년 어느날 고양 견달산 기슭에서 헉헉거리며 쪽기는 한 사나이,

결국 군사들에게 붙잡혀 다시 개성으로 끌려건더. "나는 왕이 되기 싫다!" 수없이 외쳤으나

결국 왕이 되어 비운을 맞이했던 공양왕의 최후 모습이다.

 

고려말기에 승려 신돈이 집권하고 홍건적, 왜구의 침입 등으로 정국이 홍란스러었다.

신지사대부 이성계 등은 국운이 다됐다며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고 역성혁명을 일으켜 지배층을 속청하였다.

이때 쪽기는 공양왕을 단번에 알아보고 밥을 날라주던 스님의 암자.

그절이 유래되어 지금의 식사동[食寺洞]이 되었고, 비운의 공양왕은 원당동 왕릉골 산기슭에 묻혀있다.

 

---- 고양시 안내표지 중에서. ----

 


 

. 고려 공양왕릉을 지금부터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울타리 쳐 놓아서 들어갈수도 없고... 멀리서 바라봅니다.

 사진상에 우축에 자세히 보시면 공양왕과 왕비와의 전설 있듯이 묘지를 지키라고 삽살개상을 놓여있으며.

묘지앞에는 비석. 석상. 장명등. 양쪽에 석인이 2쌍. 석호. 등이 있으며

비석에는 "고려공양왕고릉" [高麗恭讓王高陵] 이로 새겨져있는 비석이 있고. 

물론 뒷면에 있는 묘지들 과는 완연히 대조적인 묘지로만 보였습니다. 

 


 

. 여기서 부터는 바로뒤에 있는 묘지들 왕가의 묘지와는 다르게 보여 사진으로만

담아 왔으며 설명은 생략하도록하겠습니다.

--- 4층으로 만들어진 묘지들중 맨 아랫부분이다. ----

 


 

. 보기에는 조선시대에 벼슬아치 지낸분들은 분명하다.

그러나 왜 왕릉뒷편으로 묘지를 조성한 것은 알수가 없어 보인다...

이 묘지를 보면서 느낀것은 예전에 윤관 장군 묘지와의 문중 싸움이 생각이난다. 

맨윗쪽에 있는 묘지다. 

 


 

. 바로 아래있는 묘지...

석상 하며 비석들을 보면 명문대가는 분명하다.

 


 

. 3단쯤에 있는 묘지 이며 최근에 다시 비석등.새롭게 단장 한듯하다.

여기 까지는 뒤면에 있는 묘지들 입니다..

 


 

. 다시 공양왕릉 으로 내려왔습니다.

울타리 부근에는 최근에 "고란이"가 울타리에 끼어 사상 당한듯한 흔적도 남아있더군요[털이 많이 빠져있다.]

 


 

. 공양왕릉 아랫부분에 설치되있는 문화재 지정 비석

"사적 제191호 고려공양왕릉"

 


 

. 사면으로 바라본 공양왕릉 전경

사진상 좌측으로는 화장실도 설치되있어 관리는 잘되는것으로 보여지나

조철하게만 느껴지는 고려 공양왕릉 폐배자의 설움 또한 느낄수있었다.

 


 

.고려 공양왕 [高麗 恭讓王陵] 사적 제191호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왕릉골]

 

고려[高麗]의 마지막 왕인[제34대] 공양왕[恭讓王 1389~1392 재위] 과 왕비 순비[順妃]의 능이다.

공양왕은 재위 4년만에 고려가 망하면서 폐위되어, 원주[原州]에 추방되어 공양군[恭讓君]으로 봉[封]하여졌고,

삼척[三陟]에 옮겨져 그곳에서 태조[太祖]3년[1394] 춘추[春秋]50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 뒤 태종[太宗]16년[1416] 공양왕으로 추봉[追封]되어 봉릉[封陵]이라 하였다.

능은 왕과 왕비의 쌍능형식으로 되있고, 능앞의 석물로는 비석 1좌씩과 석상[石床]이 놓였고 장명등[長明燈]이 1좌,

양쪽에 석인이 2쌍, 석호[石虎] 1필이 있다.

 

비석은 봉릉 당초의 것으로 보이며, 왕릉 중간에 조선고종[朝鮮高宗]때 세운 것으로 보이는

"고 려 공 양 왕 고 릉" [高 麗 恭 讓 王 高 陵] 이라는 비가 서 있다.

 


 

고려 공양왕과 삽살개의 전설이 담긴 연못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조선 태조에게 왕위를 빼앗기도 도성인 개성에서 도망쳐

이곳 견달산 아래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저룰어 사방이 어두워졌다.

두려움과 배고픔으로 지쳐있는 왕의 일행에게 건너편 골짜기에서 한가다 불빛이 보여

찾아가 보니 마침 작은 절이 있어 하룻밤을 묵고자 부탁 하였다.

 

그러나 이미 불교의 나라 고려는 멸망되고 새로운 유교의 나라 조선이 창건 되었으니

절에서 머물기는 어렵게 되었고 인근의 대궐고개 다락골 누각에 피신하게 되었다.

이후 남몰래 스님들이 밥을 날라 왕에게 드렸는대

이러한 이유로 이마을의 이름이 밥 절 즉 식사동[食寺洞]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공양왕과 왕비가 보이지 않아 스님들과 왕씨 일행이 온산을 뒤지며 왕을 찾았으나 모두 허사였다.

다만 공양왕과 왕비가 귀여워 하던 삽살개만이 골짜기의 적은 연못 속을 향해 겨속 짖고 있었다.

이에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연못을  가세히 보니 사람의 형상이 보였고

연못의 물을 모두 퍼내자 느안에 왕과 왕비가 편안한 자세로 죽어 있었다.

 

이를 본 사람들이 두 분의 시신을 정성들여 모셔 연못 뒤 양지 바른 곳에 장례를 치루고

능을 지키기 위해 능앞에 삽살개 모양의 석물을 세워 지키게 하였다 한다.

 

이러한 전설로 인해 인근에 식사동 뿐만 아니라. 어침이. 대궐고개. 왕능골. 등 여러지명이 생겨나게 되었다.

고려사나 왕조실록과 같은 정서에는 공양왕이 강원도 삼척시에서 돌아가신 것으로 기로하고 있지만

고양사람들의 공양왕에 대한 애절함이 이와 같은 전설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에 공양왕과 삽살개의 전설을 길이 후손에게 전하기 위해 고양시에서

공양왕릉 정비사업을 하면서 연못을 좀더 깊고 넒게 보수 하였다.

 

---- 안내 표지 중에서.----

 


 

. 입구 도로에서 바라본 모습이지만 너무나 조촐 하였으며 문중에서도 관리가 않되는것 같더이다.

문중에서 관리하면 널리 알릴려는 흔적들이 있을것 인대 아무리 찾아 보아도 그런 흔적은 없었으며

그나마 문화재 지정으로 관리 되는것 왜 에는 모든것들이 너무나 조촐 하였습니다.

또한 묘지가 2곳에 있다는 사실 어떤것을 믿어야 할찌. 삼척...?? 후손들은 햇갈리것 같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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