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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7】강화해협을 지키던 요충지로 덕진돈대[德津墩臺] 와 경고비[警告碑]

◈ Travelog/⊙ 고찰 문화재

by 순도리(칠이) 2012. 2. 1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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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진돈대 [德津墩臺 ]



 

 



⊙ 덕진돈대 [德津墩臺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佛恩面) 덕성리(德城里)에 있는 강화 53돈대의 하나. 손돌목돈대와 함께 덕진진에 소속한 2개 돈대 중 하나로서 북쪽의 광성보와 남쪽의 초지진 중간에 있어 강화수로에서 가장 중요한 요새 역할을 한다. 1679년(숙종 5)에 축조하였으며 덕진진 안에 있다. 1871년(고종 8)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났을 때 남장포대, 덕포포대와 함께 미국의 아시아 함대와 이틀에 걸친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신미양요 때 크게 파괴되었으나 197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 당시 새롭게 복원하였다. 돈대의 남쪽 염하(강화와 김포의 경계를 이루는 수역)가 내려다보이는 곳에는 당시 통상수교거부정책을 짐작하게 하는 '강화 덕성리의 경고비'가 세워져 있다.

 

 


 

. 남장포대[南障砲臺] 안내문에서....

 

남장포대는 덕진진에 소속된 포대로 강화의 8개 포대중 하나이다.

대포 10문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고종8년[1871] 신미양요 때 덕진돈대와 함께

미국 아세아 함대와 맹렬한 포격전을 전개하였던곳이다.

성첩[城堞]과 시설물은 이때 모두 파괴되었는대 1977년 다시 복원하였다. 

 

. 포구는 건너 김포의 덕포진을 향하고 있다 대포는 홍이포 라고도 한다.

 

. 낮은 언덕을 올라서면 돈대가 있다 덕진돈대다.

 

. 덕진돈대[德津墩臺] 입구 안내판에서..

 

덕진돈대는 덕진진에 소속된 2개 돈대중 하나이다. 북쪽으로는 광성보와

남족의 초지진 중간에 위치하여 강화수로의 가장 중요한 요새지 이기도 하다.

신미양요[1871] 당시 미국함대와 48시간 동안 치열한 포격전을 전개하였는데,

이때 파괴되었던 것을 1977년에 복원하였다.

 

. 남장포대에서 이곳을 올라오면 덕진돈대 앞이 된다.

왼쪽의 대나무밭 뒤로는 사유지라며 보이지 않게 대나무를 심은듯해 보인다.

 

. 덕진돈대 내부 모습 다른 돈대와 다른점이 보인다. 포구 있는 방향이다.

 

. 돈대 위에서 경고비를 바라봅니다.

저기 관람객들은 일본인들이다.

 

. 포좌 구멍을 보면 다른곳 과는 달리 사각형 모양으로 만들어진 돈대를 각 코너 부분에 45도 방향으로

서로 사면을 향하고 있는것이 특이 하게 보여진다...

 

. 남장포대 덕진진와 덕진돈대사이에 있으면서 덕진진에 지휘를 받고 서로 마주보고있는

건너 덕포진 포대와 함께 동조하여 침입자 외적들을  공격 하였다고 합니다.

 

. 세월이 흘러 성벽면에는 담쟁이들이 자리하고 있내요...앞에 작은 구멍이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 멀리 보이는 초지진과 초지리 포구.초지대교 초지대교 길이가 1.080M 라고 합니다.

 

. 경고비와 바닷가를 내려다 봅니다.이재는 물길도 조용해 졌습니다

 

. 경고비[警告碑] 향토유적 제9호

 

덕진진 남단 덕진돈대 앞에 위치한 이 비는 조선 고종 4년(1867)에 대원군의 명에 의하여

강화 덕진 첨사가 건립하였다 한다. 개화여명기에 외국선박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한 경고비로서 비문에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라 음각되어 있으며 이는 어떤한 외국 선박도 함부로 이 해협을

통과할 수 없다는 쇄국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 경고비는 장대석의 지대 위에 1석의 기단을 만들어 그 위에 대리석 비신을 세웠으며

이 비의 크기는 높이 147cm, 폭 53cm, 두께 28cm이다.

이 경고비의 우측 상단과 하단부에는 탄흔의 흔적이 남아있다.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 [海問 防守 他國船 愼物過]』

 

 

. 이재는 저물어간다 늦은 시간에 출발하여 이곳까지 많은 시간을 소비 하였으며

앞에 보이는 초지대교 까지 가면 오늘 나들길 탐방은 끝내기로 하였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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