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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7】병인.신미양요의 전흔이 남은 강화 광성보 [江華 廣城堡] 사적 제227호

◈ Travelog/⊙ 고찰 문화재

by 순도리(칠이) 2012. 2. 11.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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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 광성보 [江華 廣城堡] 사적 제227호



 

 



⊙ 강화 광성보 [江華 廣城堡]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33 번지에 위치 하고 있다. 광성보는 덕진진, 초지진, 용해진, 문수산성 등과 더불어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이다. 고려가 몽고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로 도읍을 옮기면서 1233년부터 1270년까지 강화외성을 쌓았는데, 이 성은 흙과 돌을 섞어서 쌓은 성으로 바다길을 따라 길게 만들어졌다. 광해군 때 다시 고쳐 쌓은 후 효종 9년(1658)에 광성보가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숙종 때 일부를 돌로 고쳐서 쌓았으며, 용두돈대, 오두돈대, 화도돈대, 광성돈대 등 소속 돈대가 만들어 졌다. 영조 21년(1745)에 성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만들었는데 ‘안해루’라 하였다. 이곳은 1871년의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열세한 무기로 용감히 싸우다가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하였으며 문의 누각과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이 파괴되었다. 1976년 다시 복원하였으며, 광성보 경내에는 신미양요 때 순국한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와 신미순의총 및 전적지를 수리하고 세운 강화전적지, 수리한 것을 기록한 비석 등이 건립되었다. ※[광성보 → 강화 광성보]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 강화 광성보 [江華 廣城堡] 안해루[按海樓] 입구 안내판에서..

 

조선 1658년[효종9년]에 설치한 강화도 해안수비 진지의 하나이다.

1679년[숙종5년]에 강화도의 국방시살을 확장할때 화도돈대,오두돈대,광성돈대를 함께 추조하여 이에 소속시켰다.

신미양요때[1871년] 미국군대와 사투를 벌인 격전의 현장으로서 이때 전사한 어재연 장군을 기리는

전적비와 350여명의 순국 영령들을 기리기 위한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이 있다.

 

. 강화 광성보 [江華 廣城堡] 안해루[按海樓]

 

조선 효종 9년[1658년]에 강화유수 서원이 광성보를 설치하였는데, 즉 이말은,

고려 때는 물론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나서 강화도의 중요성을 더욱 실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외세가 밀어닥치던 당시의 강화도엔 5개의 진[鎭], 7개의 보[堡], 53개의 돈[墩]을 설치하였는데,

광성보는 강화에 여러 진이 설치되기 시작한 조선[朝鮮)] 효종[孝宗] 7년[1656]에 설치되었고,

숙종[肅宗] 5년[1679]에 용두[龍頭], 오두[鰲頭], 화도[花島], 광성\[廣城] 등 소속 돈대[墩臺]가 축조되었다.

이 것을 영조[英祖] 21년[1745] 성을 개축하면서 성문을 건립하고 안해루[按海樓]라 하였다.

 이 안해루는 신미양요 때 전화를 입어 없어진 것을 광성돈과 함께 1977년 복원하였다.

 

. 광성보 안해루 바닷가 방향으로.. 이곳에서 내려 보면 염화가 한눈에 들어온다.

 

. 광성돈대와 안해루 입니다.

 

. 광성돈대 [廣城墩臺] 사적 제227호

입구 문이다.

 

. 광성돈대 [廣城墩臺] 사적 제227호 안내판에서...

 

광성돈대는 광성보[廣城堡]에 소속된 3개 돈대중 하나로서 숙종5년[1679] 함경도[緘鏡道],황해도[黃海道].강원도[江原道]의

승군 8.000명과 어영군[御營軍] 4.300명이 40일만에 완공하였다. 1977년 포좌[砲座] 4개소와 포3문[門]의 복원 설치 되었다.

대포[大砲]는 홍이포[紅夷砲]라고도 하며 사정거리 700M로서 포알은 화약의 폭발하는 힘으로 날아가나 포알 자체는 폭발 하지 않아 위력은 약하다.

병자호란[丙子胡亂]에도 사용하였다고 전한다. 소포[小砲]는 사정거리 300M로서 포알은 대포와 같다.

대포는 조준이 안되나 소포는 조준이 된다. 작은것은 불랑기라 하며 프랑스군이 쓰던 것이라 한다.

 

. 대포와 소포다.

사정거리 대포 : 700M,[홍이포] 소포 : 300M[불랑기] 라고도 한다.

 

. 광성돈대 내부의 모습

 

 

 

 

. 쌍충비각 [雙忠碑閣 ] 강화향토유적 제10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佛恩面] 덕성리[德城里]에 있는 비각. 비각 안에는 신미양요[辛未洋擾]의

광성보전투에서 순절한 조선 후기의 무신 어재연[魚在淵]과 그의 아우 어재순[魚在淳] 등의 전적을 기리는 전적비가 있다.

1986년 4월 1일 강화군 향토유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1871년 신미양요 당시 어재연[魚在淵], 어재순을 비롯한

전 수비군은 인원과 무기의 열세를 딛고 미국함대와 치열한 격전을 벌였으나 결국 대패하여 부상자 몇 명을 제외하고

전군이 장렬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비각은 후에 어씨 문중에서 이들의 충절을 기려 건립한 것으로 광성보 안에 있으며

1976년 광성돈대 복원작업의 일환으로 정비, 보수되었다. 해마다 음력 4월 24일이면 어씨 형제의 충절을 기리는 제를 올린다.

 

. 신미순의총 [辛未殉義塚]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광성보 내에 있는 조선 말기 무명용사들의 무덤이다.

쌍충비각 맞은편 아래쪽에 있으며. 1871년[고종 8] 4월 23일 광성진[廣城津]에서 벌어졌던

미해군 육전대[陸戰隊]와의 싸움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용사들의 무덤이다.

당시 군사를 이끌던 어재연[魚在淵] 장군과 동생 재순, 군관, 사졸 등 53명의 전사자 중 어재연 형제는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성본리에 안장하고 신원을 알 수 없는 나머지 51명의

시신은 7기의 분묘에 나누어 합장하여 그 순절을 기리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호랑이를

사냥하던 포수 출신들로서 용맹함이 뛰어났다고 한다.

 

. 손돌목 돈대 [孫乭項 墩臺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佛恩面] 덕성리[德城里]에 있는 강화53돈대의 하나.

덕진돈대와 함께 덕진진에 소속되어 있으며 뱃사공 손돌의 전설에서 돈대의 이름을 땄다.

1679년[숙종 5]에 축조하였는데, 강화도의 다른 돈대들이 사각 모양인 것과는 달리 원 모양으로 만들었다.

1866년의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년의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외국 함대들과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으로서,

197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파괴되었던 성벽을 복원하였다.

돈대 입구에는 서해안 지역의 북한계선 식물인 탱자나무가 자라고 있다.

손돌목돈대에서 동쪽으로 내려다 보이는 곳에 용두돈대가 있는데,

그 앞의 염하(강화와 김포의 경계를 이루는 수역)를 뱃사공 손돌이 왕의 오해로 억울하게 죽은 곳이라 하여 손돌목이라고 한다.

염하 건너편 동남쪽에 덕포진이 있는데, 덕포진 언덕 위에 손돌의 묘가 있다.

 

. 손돌목 덕포진에 덕포돈대터와 보이는곳에 손돌묘가 있다.

 

. 광성포대 [廣城砲臺]

 

경기도 강화해협[江華海峽]이 면한 광성보[廣城堡]에 설치되었던 포대.

병인양요[丙寅洋擾]·신미양요[辛未洋擾] 당시에 큰 활약을 하였다.

1866년(고종 3) 9월 프랑스 함대는 프랑스인 선교사 살해에 항의하여 광성진 포대를 공격하였으나

조선군에 의하여 패퇴당하였으며, 1871년[고종 8] 4월에 미국 함대는 셔먼호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광성진에 침입해 왔다.

 

. 용두돈대 [龍頭墩臺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佛恩面] 덕성리[德城里]에 있는 강화 53돈대의 하나.

광성보에 소속되어 있으며 해협을 따라 용머리처럼 돌출한 자연 암반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고려시대부터 천연의 요새로 중요시되었으며 1679년[숙종 5]에 돈대가 세워졌다.

1866년의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년의 신미양요[辛未洋擾]를 치르면서 외국 함대들과 벌인 치열한 전투로

성벽이 크게 파괴되었으나, 197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다시 복원하였다.

당시 돈대 안에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를 세웠는데, 앞면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

뒷면에는 이은상이 짓고 김충현이 글씨를 쓴 비문이 새겨져 있다.

돈대 앞을 흐르는 염하[강화와 김포의 경계를 이루는 수역]는 손돌풍으로 잘 알려져 있는 손돌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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