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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28】05. 천험의 요새 군사 요충지 손돌의 충성심 담긴 김포 덕포진[金浦 德浦鎭]

◐ Climbing[2012]/├ ② 경기도 권역

by 순도리(칠이) 2012. 1. 29.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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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포 덕포진 [金浦 德浦鎭]



 

 

 



    ○ 김포 덕포진 [金浦 德浦鎭] [덕포진→김포 덕포진 2011.07.28 변경 고시]
      소재지 : 경기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산103-1 종 목 : 사적 제292호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시설 크 기 : 면적 48,794㎡ 지정일 : 1981.09.25 시 대 : 조선시대 소유자 : 국유,사유 관리자 : 김포시
    사적 제292호. 지정면적 48,794㎡. 이곳은 돈대(墩臺)와 포대(砲臺) 및 파수청(把守廳)이 있던 곳으로, 처음 세워진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666년(현종 7) 강화에 예속된 진이었다고 하며, 1679년(숙종 5) 강화의 광성보(廣城堡)·덕진진(德津鎭)·용두돈대(龍頭墩臺)와 함께 축성되었다. 돈대의 위치는 한성으로 통하는 바닷길의 전략요충지로서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함대와, 신미양요 때는 미국함대와 싸웠던 격전지이다. 또, 돈대와 포대의 중심부에는 파수청터가 있는데, 이곳은 포를 쏠 때 필요한 불씨를 보관하는 동시에 포병을 지휘한 장소로 생각된다. 1980년의 발굴조사 당시 7개의 포탄과 상평통보(常平通寶) 2개가 출토되었고, 건물터에서는 주춧돌과 화덕자리가 발견되었는데, 건물규모는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추정되며, 둘레에 맞담을 쌓듯이 둘러친 석벽이 있었다. 또, 돈대터에서는 1874년(고종 11)에 만들어진 포와 포탄 등이 발굴되었다. 이곳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강화도의 광성보와 맞서 있는데, 시야가 막힌데다가 해협이 매우 좁고 물살이 빠르며 소용돌이치므로 적을 방어하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고 생각된다. 고려 고종이 몽고병의 침략을 피하여 강화도로 가는 길에 배를 타고 이곳의 바닷길을 지나다가 위험을 느낀 나머지 사공이 흉계를 꾸몄다고 오해하여 그를 처형하였으나, 무사히 그곳을 빠져나가자 잘못을 뉘우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부근에는 당시 사공이었던 손돌(孫乭)의 무덤이 있으며, 지금도 덕포진 앞의 좁은 바닷길을 손돌목이라 부르고 있다.

    ○ 덕포진 손돌묘 [德浦鎭 孫乭墓]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덕포진에 있는 묘이다. 종 목 : 사적 제292호 지정일 : 1981년 09월 25일 소재지 :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산 103-1 시 대 : 조선시대 크 기 : 면적 48,794㎡
    김포 덕포진 북쪽 해안 언덕 위에 있다. 1970년에 덕포진 내의 현 위치에 복원하였으며 1977년에는 묘비를 세우고 묘역을 단장하였다. 손돌은 고려시대의 뱃사공인데, 1232년 몽고가 침입하여 고려 왕이 강화도로 피난할 때 손돌의 배를 타게 되었다. 물길이 좁아 앞이 보이지 않고 세찬 물살에 배가 심하게 요동치자, 왕은 자신을 죽이려는 줄 알고 손돌의 목을 베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손돌은 물 위에 작은 바가지를 띄우고 그 바가지를 따라가면 강화도에 무사히 도착할 것이라고 말한 뒤 죽음을 받아들였다. 마침내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한 왕은 자신이 경솔하였음을 깨닫고 후하게 장사를 치른 뒤 사당을 세워 억울하게 죽은 손돌의 넋을 위로하였다. 조선 말까지 손돌의 넋을 달래는 제사를 지내오다가 일제강점기 동안 중단되었으며 1970년부터 다시 지내고 있으며.묘는 1977년도에 박일양[朴一量]씨와 덕포진 발견자인 김기송[金基松]씨를 비롯한 면민들이 관리하며 묘비를 세워 단장 하였으며.... 이때 부터 손돌의 기일인음력 10월20일에 매년 제사를 지내 오고 있으나 1989년 부터는 김포문화원이 주관하여 진혼제를 지낸다. 또한 1866년 병인양요 당시에 양헌수 대장과 손돌묘의 일화가 병인일기[丙寅日記]에 기록 되어 있으며 저서는 하거집[荷居輯] 있으며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발굴자 김기송[金基松] 웅

          전 김포 문화원장. 문화관광 해설사. 황토 사학자.등등 김기송님께서 자료를 주었으며 잘 설명하여 주셨습니다. 또한 발굴자로써 그동안 발굴하며 담아온 사진들을 2010년에 사진전 까지 열어 그뷴의 열정도 였볼수 있었습니다. 그외 업적은 다수 있으므로 간단히 소개 할수없어 생략 하겠습니다.

 

 


 

사진으로본 산행기

 

. 덕포진 관리사무실과 앞에 보이느놋은 전시관 이다.

여기부터 덕포진 관람을 할것입니다.

 

. 여름에는 바다 바람으로 시눵한 휴시 공간이 될것 같아 보인다.좌축으로는 바다다.

 

. 처음으로 보이는 바다건너 우축 덕진진 좌축 초지진 일것이다.

 

. 이자리에도 뭐가 있을만도 한대 아무것도 없다는것이 이상하다

조망이 아주 좋아 보이는것이 혹시 옛날에 초병이 보초를 하지 않았을까...??[나름대로 생각...!]

 

. 덕포진 입구 간단한 설명과 사적지 안내판을 읽어본다..

 

. "덕포진포대" "가"포대 지역으로 들어간다.

 

. 이렇게 보면 위장이 잘된것 처럼 보여진다.

 

. "가"포대 뒷부분 이곳에는 당시 분주하게 군사들이 움직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 "가" 포대 [약물터] 7개의 포대로 강화 남장포대를 향하고 있으며

"다포" 와는 달리 "가포" 와 "나포"는 지붕을 이엉 를 올렸다.

이후로 보시면 알것이며 지나고 보니 이상하다 여겨 졌으며 문화재 해설가 만나

알아 보았지만 발굴 당시 이엉과 기와로 발견되어 그대로 복원 하였다고만 한다.

아마도 위장을 위해서 그런것이 아닐까 추축만 난무하다.  

 

. "가포대" 지역 먼져는 읫부분으로 걸어갔을것 같은대 무너지는것을 방지하기위해

출입을 금지 한다.불로거들의 지난 포스팅 사진을 보면 지나가는 장면들도 나오더군요.

 

. "가"포대 전면 지도상 에는 "덕진진" "남장포대" 로 나오며.

멀리는 마니산이 희미하게 보인다.

 

. 김포 평화누리길 첫번째 코스 대명항에서 문수산성 까지 16.6KM 이어지며.

이곳은 덕포진 이정표와 함께 휴식 공간이다.

 

. "가포대" 지역 포구 방향이 덕진진 남장포대로 향하고 있다.

 

. 바다물 흐름이 예상치 않아 보이며 멀리 보이는 초지대교와 철조망 DMZ라고 한다.

 

. 손돌목 이라는 곳에는 벌써부터 물살이 사나와 보이며 아마도 물때가 날물인듯하다..

 

. 이렇게 보니 예전에 드라마 "여명"이 갑자기 생각난다.

이곳에서 촬영하였다고 한다.

 

. 지나다 보니 이곳은 '나"포대 지역이다.

'나"지역도 "가"포 지역과 별다릴 보이지 않았지만 아래 설명을 읽어보면

요충지로 각각 목표지점이 설정되어 있다. 물살과 사투를 벌이는 동안 포대에서 일당 타진 하는 작전지다.

 

. "나"포대[원둘터] 5개의 포대로 강화 초지진을 향하고 있으며

"다포" 와는 달리 "가포" 와 "나포"는 지붕을 이엉 를 올렸다.

아마도 위장을 위해서 일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요.

 

. 각 지역을 잘 설명 하여 놓았다.

 

. "나"포대 전면 초지진 전면을 향하고 있다.

포구 방향을 바라보면서 담은 사진이다.

 

. "나"포대 지역을 다시 한번 살펴본다.

 

. 이곳 부터는 "다"포대 지역이다.

 

.

 

. "다"포대[굽두리] 3개의 포대로 강화 초지진와 남장포대를 향하고 있으며

"가포" 와 "나포" 와는 달리 지붕을 이엉 대신 기와를 올렸다.

 

.

 

. 다포 전면

 

.

 

. 파수청 과 손돌묘 가는길이다. 손돌묘 앞에는 덕포진 돈대가 있었다는 터 이야기

표지만 있고 아무것도 없어 아쉬웠다 그것을 복원이 어려운가...??

아마도 손돌목 에서의 전투가 그곳에서 치열했을것으로 보여지던대요....

 

. 파수청 넘어로 손돌묘가 보인다. 각각이 이루어 보면 설명을해 놓았다 다음으로 .....

 

. 덕포진 파수청터[德捕鎭 把守聽]

 

파수청은 각 포대에 공급할 불씨를 보관하던 장소이다.문헌조사에 의하면 사적지대 건물은 탄약고.

파수청이 존재 하였음을 알수 있으나 현재 탄약고는 덕포마을에 이전 위치하고 있고.

사적지 내에는 파수청만 현존하고 있다.

건물규모는 정면3간[間] 측면2간[間]이며 중심부에 화덕이 위치한다.

발굴당시 동서면에서 석벽으로 둘러 쌓여있었던 것으로 봐서.

출입구는 동서면이 아닌 남북면을 이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 덕포진 파수청터[德捕鎭 把守聽]

사적 292호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산105번지

 

이 유적지는 1980년에 덕포진 발굴 조사 결과 알려지게 된 건물 터이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3칸 측면2칸으로 추정 되며 맞담을 쌓듯이 둘러친 석벽 있었다.

발굴 당시 7개의 포탄과 조선시대[朝鮮時代]의 화폐인 상평통보[常平通寶] 2개가 출토되었으며

건물터 안에는 주춧돌과 화덕이 발견되었다.

이 건물은 포대[抛臺]와 돈대[墩臺]의 중심부에 위치 하여 포를 쏘는

불씨를 보관하는 장소인 동시에 포병을 지휘 하던 장대[將臺]로 생각된다.

 

. 파수청 지나며 뒤돌아 '다'포대 지역을 본다..

포대 성터가 구렁이 연상케 한다.

 

. 뱃 사공이였던 손돌공의 전설과 양헌수 대장과 솔돌표의 사연만 적어 놓았다.... 

 

. 덕포진 손돌묘 [德浦鎭 孫乭墓]

 

진심으로 이야기 하였건만 어찌 믿어 주시지 않으니 몸을 받칠수밖에.

죽음까지 이루어서도 진심을 이야기 하며 나랏님을 안전하게 이루 도록한

손돌공 충심만이 본받을수 있을까요...?

진실한 마음도 깊이 배워야 할것 같다... 

 

. 광성보[廣城堡] 용두돈대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佛恩面]에 있는 성[城].

고려가 몽고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로 천도하였을 때 쌓았다.

신미양요 때에는 미국과의 격전지였다. 사적 제227호이다.

광성보와 같은 곳에 있어 용두돈대도 이곳에서는 알수가 없다.

다음에는 꼭 저넘어도 찾아가 봐야겠다.

 

. 손돌목[孫乭목]

 

손돌묘를 정면에서 바라 보았을때 왼쪽으로 보이는 강이 손돌목이다.

손돌목은 안면도와 염창동과 함께 난파 위험지역으로 꼽히며 물살이 빠른곳 이다.

태조4년[1395년]에 조운선 16척. 태종3년[1403년]30척. 태종14년[1414년]60척이 침몰한 기록이 있다.

동절기에 속하는 을력10월20일을 전후해서 부는바람을 "손돌바람"이라고 하고 추위를 "손돌추위"라고 한다.

 

. 덕포진 돈대터[德捕鎭 墩臺터]

 

덕포진[德捕鎭]이 창설된 해는 확실 하지 않으나 조선[朝鮮] 현종[顯宗]7년[1666년]에 강화에 예속된 진[鎭]이 였다.

이 돈대[墩臺]는 숙종[肅宗]5년[1679년] 강화[江華]의 광성[廣城].덕진[德鎭].용두돈대[龍頭墩臺]와 함께 축성 되었다.

이 돈대의 위치는 서울을 통하는 해로[海路]의 전략상 요지로서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때는 프랑스 함대와.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때는 미국 함대와 싸운 격전지이다.

1980년 포대와 돈대를 발굴 조사 하였으며. 이때 1874년에 만들어진 포와 포탄 등이 발굴 되었다.

 

. 손돌목 물살을 철조망 넘어로 바라봅니다.

 

. 철조망 옆으로 김포 평화 누리길입니다.

 

. 바다 넘어로 보이는곳은 초지진.덕진진.남장포대. 희미 하지만

작게 보이는 포구들이 보인다. 

 

. 돈대터 에는 바닷가 초소가 자리하고 있다..

 

. 다시 돌아 가며 사진으로 정리해 본다

 

. 포구도 가까이 담아 보고 작은 구멍으로 포신을 겨냥해 발사....

 

. "가'포대 지역을 돌아 나가면서 다시 한번더 담아본다.

 

. 덕포진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그동안 잘 모르던 포대 구성부터 중요성을 알게된 여행 이였습니다.

또한 정리해 나가면서 말로만 나온 덕진진.남장포대.초지진.용두돈대.광성보.등등 강화의

문화 유적지도 공부는 물론이고 찾아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시간이였습니다.

감사 합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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