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사 문학관
전라남도 북쪽에 위치한 담양은 기름진 평야와 아름다운 자연
그리고 수많은 문화 유산을 보존, 전승해 온 유서 깊은 고장이다.
대쪽같이 올곧은 선비정신을 이어 받은 조선시대 士林(사림)들은 불합리하고
모순된 정치 현실을 비판하고 자신들의 큰 뜻을 이룰 수 없음을 한탄하며 낙남(落南)하여,
이곳 담양 일원에 樓(누)와 亭子(정자)를 짓고 빼어난 자연 경관을 벗삼아 시문을 지어 노래하였다.
이들은 修身(수신)과 후진양성에 힘쓰다가 나라의 부름을 받아서는 충성하고,
국난이 있을 때에는 분연히 일어나 救國(구국)에도 앞장섰다.
한국 가사문학관앞 피리부는 목동 조각
조선시대 한문이 주류를 이루던 때에 국문으로 詩(시)를 제작하였는데,
그중에서도 歌辭文學(가사문학)이 크게 발전하여 꽃을 피웠다.
면앙정
宋純(송순)이 면앙정에서 풍류적인 삶을 노래한 詩(시)
송순(1493∼1582)은 성종 14년 전남 담양군 봉산면 상덕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守初(수초), 또는 誠之(성지)이고, 호는 企村(기촌), 또는 ?仰(면앙)이며, 시호는 肅定(숙정)이다.
송흠, 박상, 송세림으로부터 학문을 익혔고, 27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종9품 승문원 부정자로 출발하여 정2품 의정부 우참찬까지 역임하였다.
그는 벼슬에서 물러난 뒤 고향의 면앙정에서 선비들과 교유하며
학문을 닦고 시문을 창작하면서 悠悠自適(유유자적) 신선처럼 살았다 한다.
평생 덕을 근본으로 삼고 흐트러짐이 없는 선비의 길을 걸었으며,
寬容(관용)과 大道(대도)를 삶의 길로 삼고 살았다.
가사 문학관 앞 반월교
담양군에서는 이같은 가사문학 관련 문화 유산의 전승,
보전과 현대적 계승, 발전을 위해 1995년부터 歌辭文學館(가사문학관) 건립을 추진하여
2000년 10월에 완공하였다.
본관과 부속건물인 자미정, 세심정, 산방, 토산품점, 전통찻집 등이 있다.
가사문학관 건물로 들어가는 뜰에 자리한 정자(亭子) 세심정
李緖(이서의 樂志歌(낙지가), 宋純(송순)의 면仰亭歌(면앙정가),
정철의 星山別曲(성산별곡), 關東別曲(관동별곡), 思美人曲(사미인곡), 續美人曲(속미인곡)
鄭湜(정식)의 竺山別曲(축산별곡), 南極曄(남극엽)의 鄕飮酒禮歌(향음주례가),
忠孝歌(충효가), 柳道貫(유도관)의 庚戌歌(경술가), 思美人曲(사미인곡),
南碩夏(남석하)의 白髮歌(백발가), 草堂春睡曲(초당춘수곡), 思親曲(사친곡), 願遊歌(원유가),
정철의 10대손인 鄭海鼎(정해정)의 石村別曲(석촌별곡), 憫農歌(민농가) 및
작자미상의 孝子歌(효자가) 등 18편의 歌辭(가사)가 전승되고 있어
담양을 歌辭文學(가사문학)의 산실이라 부른다.
세심정 연못
세심정 전경
세심정 물래방아
세심정
유리문을 통해서 관람하는 전시실
소쇄원도와 제월당, 오곡문(우암 송시열 글씨)
소쇄원도(1755년에 그려진 소쇄원의 모습으로 소쇄원사실에 실려 있음)
제월당(소쇄원 내의 제월당 현판으로 우암 송시열의 글씨)
오곡문(소쇄원의 애양단 담장에 새겨진 우암 송시열의 글씨) 瀟灑處士(소쇄처사)
梁山甫(양산보, 1503~1557) 자는 彦鎭(언진), 호는 瀟灑處士(소쇄처사),
양사원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소년시절에 한양에 있는 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세가 되던 중종 14년에 현량과에 급제하였으나
그 해 겨울 기묘사화가 일어나 어진 선비들이 참화를 입고,
스승인 조광조는 전남의 능주로 유배되자 이에 분통한 양산보는 벼슬의 뜻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무등산 아래 수려한 승지를 찾아 소쇄원을 경영하고, 종신토록 行義(행의)를 지켜 처사로서 은거하였다.
이 곳에 이르러서는 많은 유학서를 갖추어 놓고,
특히 중국의 도잠과 주돈이를 흠모하여 독서와 학문으로 일과를 삼았다.
당대의 명류인 송순, 임억령, 김인후, 오겸, 유희춘 등과의 교분은 물론
이후백, 기대승, 고경명, 정철 등에게도 존경을 받았다.
그중 김인후는 소쇄원사십팔영을 지음으로써 그 곳은 명원으로서 더욱 알려졌다.
양산보는 평소 효행이 독실하였는데 그 효심을 담아 장편의 孝賦(효부)를 지었다.
많은 시문은 병화와오랜 세월의 흐름으로 거의 자취를 감추었지만,
후손들의 노력으로 소쇄사실이 엮어져 전하고, 그의 원림이 보존되어 있다.
霽峰 高敬命(제봉 고경명, 1533~1592) 본관 長興(장흥). 자 而順(이순). 호 霽峰(제봉), 苔軒(태헌).
시호 忠烈(충렬). l552년(명종 7) 진사가 되었으며, 1558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호조좌랑으로 기용되었다가 典籍(전적), 正言(정언)을 거쳐 賜暇讀書(사가독서)하였다.
1591년 동래부사로 있다가 西人(서인)이 제거될 때 사직하고 낙향하였으며,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은 각 도의 수령과 민중에게 격문을 보냈다.
"국운이 비색하여 섬나라 오랑캐의 침략을 받아 국가가 무너질 지경에 으르렀는데
수령이나 관군들은 죽기를 두러워하여 도망치기 일쑤니 어찌된 일인가.
신하로서 왕을 잔학한 왜적 앞에 내버려둔단 말인가. 각 읍의 관군, 수령, 민중들이여,
무기를 들고 군량을 모으며 모두 분연히 일어설 때다.
구국을 위해 다 함께 목숨을 걸고 앞을 다투어 나설 줄로 믿는다.
" 페부를 찌르고 간담을 울리며 용기를 불어넣은 이 간절한 호소에 호응한 의병들은 30일만에 6000명을 한 마음으로 모이게 했다.
첫 전투에서 고경명은 선봉대를 앞세워 공격했는데 군장 김정립의 말이 부상 당해 후퇴하였다.
그러나 이날 저녁 적병이 잠든 후 용맹스런 30여명을 성밑에 잠복시킨 뒤 성밖에 사가를 모두 불태워 서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튿날 다시 공격을 시작 관군은 북문을, 의병은 서문을 향해 쳐들어갔으나 관군이 먼저 집중공격을 받아 무너지자 의병도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이 와중에 유팽로가 고경명에게 피할 것을 외치나 1592년 고경명은 둘째 아들 인후와 함께 몸을 감싼 채 최후를 맞았다.
고경명이 세상을 떠난 후 큰아들 종후가 의병을 일으켰고 능주에서는 최경회가 전라우의병을,
보성에서는 임계영을 중심으로 전라좌의병을, 남원에서는 변사정을 주축으로 적기의병군을 일으켰다.
모두 고경명 휘하의 의병들이었다. 고경명의 피가 의병운동에 불을 지펴 호남과 조선 땅은 고스란히 지켜졌던 것이다.
후학들은 조선조의 도통정맥을 따지면서 기묘사림의 조광조 이후 호남사상의 맥을 이은 이로 고경명을 꼽고 있다.
조광조가 이룩하려다 실패한 인도주의는 고경명에 의해 외세침략에 대항하고
민족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수용되었으니 민족 정통성에 대한
실체의 확인이며 참된 민족정기를 높이는 행동철학이었다.
眉巖 柳希春(미암 유희춘, 1513~1577) 본관 善山(선산). 자 仁仲(인중). 호 眉巖(미암).
시호 文節(문절). 崔山斗(최산두), 金安國(김안국)의 문인으로 1538년(중종 3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544년 賜暇讀書(사가독서)한 다음 수찬, 正言(정언) 등을 지냈다.
호남 3걸이라 일컬었던 당대의 시인 유성춘의 아우이며,
여류문인으로 이름이 높았던 송덕봉(宋德峯)의 남편. 1547년 壁書(벽서)의 獄(옥)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고,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사면되어 直講(직강) 겸 知製敎(지제교)에 재등용되었다.
이어 대사성, 부제학, 전라도관찰사,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1575년(선조 8) 이조참판을 지내다가 사직하였다.
金成遠(김성원, 1525~1597) 호: 서화당(棲霞堂)
[성산계류탁열도]
서하당유고에 전함. 남면 지곡리의 성산에서 선비들이 더위를 식히는 장면의 그림
金成遠(김성원, 1525~1597) 조선 중기의 문인. 본관 광산. 음보로 察訪(찰방)을 지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同福縣監(동복현감)으로 각지의 의병들과 제휴하여 縣民(현민)들을 보호하였다.
뒤이은 정유재란 때 무등산을 거쳐 동복의 모후산으로 피신하던 중
적병을 만나자 몸으로 어머니를 보호하다가 고령의 노모와 함께 72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뒤에 그 산을 母護山(모호산)이라 하였다.
자는 剛叔(강숙)이며 호는 棲霞堂(서하당) 또는 忍齋(인재)이다.
광주의 충효리(옛 석저촌)에서 秉節校尉(병절교위)를 지낸 아버지 金弘翼(김홍익)과 어머니 해주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棲霞堂 遺稿(서하당 유고)]
송강 정철의 妻外再堂叔(처외재당숙)이다.
6세가 되던 중종 26년(1531) 아버지를 여의었고,
인종 원년(1545) 瑞山柳氏(서산유씨, 柳泗(유사)의 딸)와 결혼하였다.
장인인 유사와 하서 김인후에게 학문을 배우기도 하였다. 32세 때(명종 12년)는
당시 담양 부사로 있던 석천 임억령을 만나 학문을 배웠고 忘年之交(망년지교)를 하였다한다.
33세에는 사마시에 급제하였다.
河西 金麟厚(하서 김인후,1510 - 1560) 호. 河西(하서), 湛齋(담재). 시호. 文正(문정).
河西(하서)는 전남 장성 출생으로 본관은 蔚山(울산).
성균관에 들어가 李滉(이황)과 함께 학문을 닦고 1540년(중종 35) 문과에 급제하여 承文院正字(승문원정자)에 등용되었으며
이어 博士(박사), 說書(설서), 副修撰(부수찬)을 지냈다. 명종이 즉위하고,
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난 뒤에 병을 이유로 고향에 돌아가 성리학 연구에 정진하였다.
李恒(이황)의 理氣一物說(이기일물설)을 반대하여 理氣(이기)는 혼합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천문, 지리, 의약, 산수, 律曆(율력)에도 정통하였고 시문을 잘 지었으며, 글씨는 行(행), 草(초)에 뛰어났다
옛날 시인들의약력
早紅枾歌(조홍시가) / 박인로
盤中(반중) 早紅(조홍)감이 고아도 보이나다.
柚子(유자)가 안이라도 품엄즉도 하다마난 품어 가 반기리 업슬새 글노 설워 하나이다.
[풀이]
쟁반 가운데에 놓인 일찍 익은 감(홍시)이 곱게도 보이는구나.
유자가 아니라 해도 품어 가지고 갈 마음이 있지만 감을 품어가도 반가워 해 줄 부모님이 안 계시니 그것이 서럽구나.
'早紅枾歌(조홍시가)'라 이름하는 이 노래는,
지은이가 선조 34년 9월에 漢陰(한음) 李德馨(이덕형)을 찾아가 조홍시를 대접 받았을 때,
懷橘(회귤) 故事(고사)를 생각하고 돌아가신 어버이를 슬퍼하여 지은 효도의 노래이다
[회귤 고사란?]
'삼국 시대 吳郡(오군) 사람 陸績(육적)이 여섯 살 때에 袁術(원술)을 찾아갔더니,
원술이 귤 세 개를 먹으라고 주었는데, 육적이 그것을 품속에 품었는데,
일어설 때에 품었던 귤이 방바닥에 떨어졌다. 원술이 그 연유를 물은즉,
어머님께 드리려고 품었다고 대답하더라는 고사인데,
회귤의 고사는 곧 효도를 뜻한다. "
懶翁 和尙(나옹 화상, 1262-1342) 법명, 혜근(惠勤). 호, 懶翁 (나옹).
고려 공민왕 때의 승려. 일찍이 출가하여 수도에 힘쓰며 王師(왕사)로서 활약하였다.
중국 指空(지공)을 따라 心法(심법)을 익혀 지공, 無學(무학)과 함께 3대 和尙(화상)의 한 분으로 불리고 있으며
고려 말의 불교계를 대표하는 승려로 추앙되고 있는데 이색이 글을 지은 비와 浮屠(부도)가 회암사에 있다.
[懶翁和尙西往歌(나옹화상서왕가)] 흔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청산은 나를 보고'란 詩는 원래는 漢詩(한시)라 해석하는 사람마도 조금씩 달리 하기도 하지만,
나옹 화상(懶翁 和尙)의 선시입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세월은 나를 보고 덧없다 하지 않고
우주는 나를 보고 곳없다 하지 않네
번뇌도 벗어 놓고 욕심도 벗어 놓고
강같이 구름 같이 말없이 가라 하네
崔晛(최현, 1563~164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全州(전주).
자 季昇(계승). 호 인재 시호 定簡(정간).
1588년(선조 21) 司馬試(사마시)에 급제,
92년 임진왜란이일어나자 구국책을 올려 元陵參奉(원릉참봉)이 되었다.
1606년 增廣別試(증광별시) 생원과에 장원,
檢閱(검열)이 되었으며, 광해군 때 遷都論(천도론)이 거론되자 이를 반대,
그 계획을 중단시켰다. 仁祖反正(인조반정)후 副提學(부제학)을 거쳐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는데,
27년(인조 5) 李仁居(이인거)의 모반에 관련된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왕명으로 석방되었다.
예조판서에 추증되고, 善山(선산) 松山書院(송산서원)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인재집] [一善志(일선지)]등이 있다.
白光弘(백광홍, 1522~1556)의 자는 대유(大裕). 호는 岐峰(기봉).
부친 삼옥당 세인과 자당 김씨의 장남으로 전라남도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에서 출생하였다.
그가 태어난 곳은 생명의 근원인 사자산 젖줄의 정기를 타고났다한다.
본디 타고난 성품이 총명하고 영특하였으며 배움에 슬기로웠고 지혜로웠으며 우의가 돈독하였다.
그에게는 동생인 백광훈이 있었 는데 그의 호는 옥붕으로 조선시대의 대문장가로 불리워진다.
백광홍은 당시 우리나라가 유교사회였던 만큼 유교와 관련있는 학문을 고루 섭렵하고 있었다.
명종 4년(1549), 스물 여덟의 나이에 사마양시에 급제 하였고,
서른한 살 나던 명종7년(1555 )에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로 임명되었다.
그 당시 호남과 영남의 문신으로서 성균관에서 시재 겨루기를 하게 되자
백광홍이 으뜸을 차지하여 선시10권을 특사 받았다.
이 선시는 중국의 유명한 시문을 골라 간행한 것인데 지금도 전하고 있다.
다음 해에 호당에 선발되었다.
문과에 급제한 뒤 벼슬이 평사에 이르렀으며 시와 문장에 능하여 8대 문장가로 손꼽히었다.
백광홍이 임관된 형사직은 곧 병마 평사 를 말하는데 병마 철도사의
밑에서 군기에 참획하는 문관의 직책으로 등급으로는 정육품이었다.
국방의 책임을 무관에게만 맡길 수 없다 하여 특별히 배치한 문관 계통의 직책이다.
[기봉 백관홍의 관서별곡]
34살 나던 명종10년(1552)에 평안도 평사가 되어 서도의 국경방비 지역에서 민생을 보살피며 관서별곡을 지었다.
이 관서별곡은 우리 나라 최초의 기행 가사로서 조선시대 가사 문학의 정수이다.
그런데 500여 년이 넘도록 그 작자만이 백광홍으로 알려져 왔을 뿐 그 원본 내용이 전하지 않았었다.
1961년 안양면 기산리 백태인씨 집에서 백광홍의 문집인 기봉집이 발견되므로써 하마터면
영원히 세상빛을 보지 못하고 사장될 뻔 했던 관서별곡이 빛을 보게되었다.
백광홍은 어려서부터 문장에 뛰어나 한 번 보면 모든 글을 외워 천재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그는 어떤 책이든 읽기만 하면 바로 암기하였다한다.
글을 짓는데에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였는데 동생과 어울려 문장짓기를 즐겼던 점을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려서 이항에게 글을 배우고 김인후, 율곡 이이, 영천, 신잠, 고봉 기대승,
석천 임억령, 송강 정철, 양응정, 최경창 등과 교류하면서 문장과 학덕이 크게 완성되 었다.
그가 호남에 있었던 만큼 호남지역의 학자들과 많이 어울리게 되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무등산 언저리 창평에 살고 있던 면양정 송순과 친하게 지냈다.
그들이 친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송순 선생이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고향에서 후세를 양성하는데 주력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수 차례에 걸쳐 창평에 오가면서 술과 시와 감회로써 울분을 달래며 지냈다.
또한 송순 선생도 백광홍의 집에 와서 수 차례 흘러가는 물에 술을 띄어 놓고 국화꽃을 뿌려가며 시와 정분을 나누면서 지냈다한다.
호남가단을 형성하고 있는 송강 정철은 중종 10년에 서울에서 태어나 열 살 때 을사사화로
인하여 유배되어 온 부모님을 따라 전라도 창평에 옮겨 살게 되었다.
정철의 부친 정유심이 창평 현감으로 있으면서 호남지방의 대유학자이신
송순 선생에게 부탁하여 공부하게 되어 16세에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여 27세에 문과에 장원하여 정치가가 되었던 사람이다.
이 때 정철의 나이가 송순이나 백광홍에 비하여 20여세 연하여서 송순 선생에게서 공부하였는데
수 차례 송순과 창평에서 시를 논하던 백광홍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본다.
즉 백광홍의 관서별곡을 1555년 명종 10년에 평안도 평사로 있으면서 평안도 지방의 경치를 보고
서울에서부터 임금님의 은총을 얻어 벼슬하게 된 동기와 그 아름다운 풍경을 적은 것인데
정철의 관동별곡은 백광홍의 관서별곡 보다 25년 후에 지은 것이다.
그 내용과 형태가 비슷하다기 보다는 거의 같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정철의 관동별곡은 백광홍의 관서별곡을 보고 거의 모방하다시피 지은 것이지만 현재 교과서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은 백광홍의 관서별곡보다 정철의 관동별곡이 더욱 널리 알려져 있고
또 관동별곡이 그 내용에 있어서나 형식에 있어서 더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널리 알려진 것과 사실은 다르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백광홍은 송순과 친분관계가 있었고
송순과 술을 마시며 함께 문장을 짓기도 하였다. 그리고 정철은 송순의 제자였다.
이렇게 볼 때 백광홍의 관서별곡이 정철의 관동별곡의 모태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허난설헌의 규원가등
본관은 陽川(양천). 본명은 楚姬(초희). 자는 景樊(경번),
호는 蘭雪軒(난설헌) 강원도 江陵(강릉) 출생. 曄(엽)의 딸이고,
燈(봉)의 동생이며 筠(균)의 누이이다.
1563(명종 18)∼1589(선조 22).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모진 세월을 살다간 허난설헌은 [홍길동전]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허균보다 여섯 살 연상의 누이였다.
아버지가 첫 부인 淸州韓氏(청주한씨)에게서 筬(성)과 두 딸을 낳고 사별한 뒤에
江陵金氏(강릉김씨) 光轍(광철)의 딸을 재취하여 봉, 초희, 균 3남매를 두었다.
성장하면서 오빠와 동생의 틈바구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으며,
아름다운 용모와 천품이 뛰어나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 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지어서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허씨가문과 친교가 있었던 李達(이달)에게 시를 배웠다.
허난설헌은 15세 무렵에 安東金氏(안동김씨) 誠立(성립)과 혼인하였으나, 원만한 부부가 되지 못하였다.
난설헌의 불행은 15세에 한 살 많은 김성립에게 시집감으로써 시작되었다. 남편은 재주가 한참 떨어진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기록에 따르면 그가 과거에 급제한 것은 난설헌이 죽은 해였고, 학식과 인품,
생김새가 볼품 없었다고 하니 불과 여덟 살에 시를 짓고 여신동 소리를 들은
재주와 용모 빼어난 난설헌의 배필감으로는 너무나 부족한 위인이었던 셈이다.
잘난 아내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을까. 김성립은 아내와 함께 있을 때마다 열등감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런 까닭에 신혼 초부터 과거공부를 핑계삼아 새색시는 버려둔 채 밖으로만 나돌았다.
하지만 들려오는 소문은 글방에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기방에서 술 마시고 계집질한다는 소리뿐이었다.
게다가 시어머니와의 사이도 원만치 못했다. 남편이 주색에 빠져 열등감을 잊으려고 할수록 난설헌의 외로움과 괴로움은 깊어져갔고,
그 절망의 상처는 구구절절 한서린 詩歌(시가)로 차곡차곡 쌓여만 갔다.
옛날에 선비들이 모여서 글공부하던 곳을 接(접)이라고 했다.
김성립이 접에 가서 공부는 하지 않고 계집질만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난설헌은 이런 짤막한 오언시를 지어 보냈다.
古之接有才 今之接無才(고지접유재 금지접무재) 옛 접에는 재 있더니 요즘 접에는 재 없더라.
이는 옛날의 접에는 재방才(변)이 있었지만 요즘에는 재방변이 없어져 妾(첩)만 남았구나,
그러니까 공부한다는 것은 핑계요 계집질만 하고 있구나 하는 신랄한 풍자였던 것이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나마 정을 붙여보고 살려던 두 아이까지 차례로 잃고 나니 난설헌의 비애와 비감은 그지없었다.
더 이상 살고 싶은 희망도, 용기도 사라져버렸다. 하늘 아래 나보다 더 불행한 여자가 또 있을까 싶었다.
차라리 일찍 죽어 그토록 가고싶은 하늘나라로 빨리 가서 존경하는 이태백이나 두보를 만나고 싶었다.
아버지도 잃고, 남편과 시어머니에게서 버림받고, 불쌍한 어린것들마저 먼저 보낸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작은 오라비 허봉이 율곡을 탄핵하다가 머나먼 북녘 땅 함경도 갑산으로 귀양살이를 떠나니 눈물이 마를 새가 없었다.
게다가 시집살이는 고달프기만 하니 난설헌에게 남은 것은 그저 하루 빨리 저승으로 가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을 것이다.
난설헌은 어느 날 꿈속에서 이런 시를 지었는데, 자신의 죽음을 예상한 기이한 꿈이요 시였다.
이 신비로운 이야기는 허균의 '학산초담'등에 실려 전한다.
허난설헌의 [규원가] 가사 작품을 보면 그런 잔상들이 여기저기 남아있음이 확인된다.
조선 봉건사회의 모순과 계속된 가정의 참화 때문에, 허난설헌의 시 213수 가운데에
속세를 떠나고 싶은 신선시가 128수나 될 만큼 신선사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허균이 허난설헌의 작품 일부를 명나라 시인 朱之蕃(주지번)에게 주어
중국에서 [난설헌집]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다.
[난설헌집]은 1711년에는 일본에서도 文台屋次郎(분다이)가 간행하여 애송되었다.
규원가는 사대부가의 여성들이 겪어야만 했던 참담한 현실 세계의
고독 체념의 미학과 꿈을 시학으로 표현한 규방 문학의 대표작임 총 100구
어느 날 밤 꿈에 月宮(월궁)에 이르렀더니 月皇(월황)이 운을 부르며 시를 지으라 하므로 이런 시를 지었다.
푸른 바닷물이 구슬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새는 아롱진 난새와 어울렸구나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꿈에서 깨어난 뒤
그 정경이 낱낱이 머리에 떠오르므로 이 '夢遊歌(몽유가)'를 지었다한다.
그 이듬해에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몸을 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입고서 집안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올해가 바로 3, 9수에 해당되니 오늘 연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 되었으니 내가 죽을 날이다.
내가 지은 시들은 모두 불태워 없애버려 나처럼 시를 짓다 불행해지는
여인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도록 하라"하고는 눈을 감고 세상을 마쳤으니
3, 9는 27이라, 난설헌이 세상에서 누린 햇수와 꼭 같았다. 일세의 풍류여걸이며
천재 시인이었던 난설헌 허초희는 시대를 잘못 만나 불행한 세월을 보내다가
한창나이인 스물 일곱 살이 되던 선조 22년(1589) 3월 19일 이승살이의 미련을 죄다 버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머나먼 천상으로 여행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1570년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 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지어 신동으로 불림 1585년 외삼촌 댁에 머물면서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는 시를 지음 1589년 본인의 예언대로 27세에 생을 마침
조선 인조 때의 문신(1561~1625).
본관 昌寧(창령). 자는 여익(汝益). 호는 매호(梅湖), 이재(?齋).
우부승지를 지냈으며, 글씨, 그림, 시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불리었다.
고궁의 황폐함을 보고 시를 지은 것이 무고를 받아 투옥되었다.
1588년(선조 21) 진사가 되고, 참봉을 지낸 뒤 1605년 庭試文科(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의 벼슬을 지내고 鏡城判官(경성판관)을 거쳐 1621년(광해군 13) 製述官(제술관)으로
상경하여 고궁의 황폐함을 보고 시를 지은 것이 李爾瞻(이이첨) 일당에 의해 大逆(대역)의 뜻이 있다는 무고를 받아 투옥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中樞府僉知事(중추부첨지사)가 되고, 同副承旨(동부승지)를 거쳐 右副承旨(우부승지)에 올랐다.
글씨, 그림 , 시에 능하여 三絶(삼절)이라 불렸고, 글씨는 특히 晉體(진체)와 草書(초서)에 뛰어났다.
문집 [梅湖集(매호집)]과 가사집 [?齋詠言(이재영언)]이 있다.
[曺友仁(조우인)의 自悼詞(자도사)]
자도사는 광해군의 혼정으로 대비를 폐하고 영창대군을 죽이는 등 극도로 혼란한 때에
간신들에 대한 증오와 신하로서 임금에 대한 연모의 정을 노래한
충신 연주가사임 총 189구 自悼詞(자도사) '自悼(자도)'는 스스로를 애도한다는 뜻으로,
작가는 자신의 처지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변하지 않는 충정을 가사 작품에 담아 임금에게 전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작자가 獄中(옥중)에서 쓴 작품인 듯하며, 임금을 그리워하는 정을 읊었다.
松江(송강) 鄭澈(정철)의 [思美人曲(사미인곡)]과 수법이 비슷하며,
歌辭集(가사집) [?齋詠言(이재영언)]에 수록되어 있다. '임 향한 일편단심, 하 나시니,
삼생(三生) 결연(結緣)이오, 지은 마음 안녀이다.
얼골 못보니, 보즉다 가, 밋치 곱고 밉고 삼긴 로 진혀이셔…'로 시작된다.
조선 광해군 때 조우인이 지은 歌辭(가사), 政事(정사)의 어지러움을 한탄하고 임금을 그리워하는 내용이다.
梅溪 曺偉(매계 조위, 1454~1503)
김천시 봉산면 봉계 출신으로 김종직의 처남이다.
20세에 문과를 거쳐 檢閱(검열), 도승지, 호조참판에 올랐다가
무오사화 때 순천에 유배되고 갑자사화에 部棺斬屍(부관참시) 당했다.
성종대에 '道學(도학)으로는 鄭汝昌(정여창), 金宏弼(김굉필),
兪好仁(유호인), 曺偉(조위), 南孝溫(남효온)이 있다'고 할 만큼의 문장가였다.
그는 여러 차례 試製(시제)에서 장원했고,
28세에 柳允謙(유윤겸)등과 같이 杜甫(두보)의 시를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우리말로 옮겼다.
[萬憤歌(만분가)]
流配地(유배지) 순천에서 [萬憤歌(만분가)]를 지어 우리나라 최초의 유배가사를 남겼다.
황간 松溪書院(송계서원)과 景廉書院(경렴서원),
그리고 순천 玉川書院(옥천서원)에 配享(배향)되고,
봉계에는 그의 舊居地(구거지)로 재실이 있는데 해마다
이곳에서 그의 호를 딴 梅溪白日場(매계백일장)이 열리고 있다.
그의 저서는 사화로 인하여 흩어졌으나 후세에 대강 수집한 문집이 있다.
[두시언해] 일부를 여기에 옮겼다.
江 村 淸江一曲抱村流
금강 한 구비 마을 안고 흐르나니
長夏江村事事幽
긴 여름 이 마을 모든 일이 한가 하네
自去自來堂上燕
절로 가고 오는 지붕위의 제비요
相親相近水中鷗
물 위에 두둥실 서로 모이는 갈매기려니
老妻畵紙爲碁局
늙은 아내 종이에 장기판 그리고
稚子敲針作釣鉤
어린놈은 고기 낚을 바늘 만드네
多病所須唯藥物
하고한 날 병든 이내심사 오직 약 생각밖에 없으니
徵軀此外更何求
하찮은 몸이 이밖에 또 무얼 구하랴
풍경도와 관동별곡, 성산별곡, 사미인곡등이 전시되어있다.
관동별곡
성산별곡
사미인곡
..
다녀 온곳은 이렇게 아름답고 향기가 있는 고장 이였습니다.
주위에는 사진과 정리한것보다 더많은곳이 있었습죠.
그러나 시간이 부족 하고 저가 사전에 정보입소를 소울이해서 이것으로만 만족을 해야 했었습니다.
저가 정리한것은 부족하더라도 끝까지 읽어 주신것에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이런 여행을 자주 할것입니다 그때 마다 좋은곳들을 사진으로 정리해서 올리겠습니다.
많은 지도 좀 부탁 드릴게요.. 감사 합니다...
..
이모든 자료는 [한국 가사 문학관]에서 수집을 하였습니다.
[06.17]
역사 기행을 정리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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