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06.06] 동송 상노리(심원사)

◈ Travelog/⊙ 고찰 문화재

by 순도리(칠이) 2008. 6. 8. 01:15

본문

 심원사 (상노리)

 

원래 심원사는 한국전쟁 중에 미군 폭격으로 전소되었는데 전쟁 이후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자

1955년 주지 김상기 스님이 철원군 동송읍 상노1리에 새 사찰을 짓고 심원사라 이름 지어 계승했다.

이후 잊혀졌던 내산리 심원사 터 국유지 250만여 평은 1997년 영도스님이 5년간의 소송을 거쳐 되찾았다.

 

그리고 2004년 도후 스님이 경기도와 연천군의 지원을 받아 심원사 터에

극락보전을 세우면서 복원의 물꼬가 열렸다.

해인사 주지를 지낸 세민스님이 부임하면서 2005년 7월 철원의 신 심원사와 달리

내산리의 심원사는 원래 심원사라는 뜻으로

사찰 이름을 「원심원사」로 개칭하였고 올해 들어 본격적인 복원불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 심원사의 역사

 

보개산 심원사(원래 이름은 흥림사)는 신라 진덕여왕 때인 서기 647년 영원조사가 창건하였고 859년 범일국사가 재창하였다.

조선태조 2년인 1393년 화재로 전소되자 당시 회암사와 흥림사 살림을 맡아 하던 무학대사가 3년간에 걸친 복원 끝에 1396년 삼창했다.

이때 산이름을 영주산에서 보개산으로 바꾸고 절이름을 흥림사에서 심원사로 바꿨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심원사가 또 전소되자 인숭 정인 두 스님이 4중창을 하였다.

1760년대 조선 영조 년간에 나온 여지도서에는 보개산 심원사가 92칸(間)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1907년 10월 17일 대한제국 군대 해산군인 연기우 등이 300여 부하를 이끌고

심원사를 거점으로 항거할 때 일본군이 공격을 하면서 심원사를 불태웠다.

 

1909년부터 유연수 화상이 복원에 나섰다.

일제 강점기까지 이어진 심원사 5중창은 홍월운 주지와 이진학 주지를 거치면서

1939년 천불전 봉향각을 세울 때까지 계속되었다. 1932년 김대은이 심원사 전 주지 홍월운 스님의

열반 소식을 듣고 보개산 심원사를 다녀온 후 쓴 기행문에는

1907년 이전의 심원사가 250칸(間)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1927년부터 1945년까지의 기간은 춘산 이진학 화상이 주지로서

심원사 살림을 맡았는데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다시 전소되었다.

 

☐ 심원사에 얽힌 이야기

 

심원사에 얽힌 설화는 이우형선생이 연천문화원에서 펴낸 「향토사료집」에 잘 나와 있으므로

심원사 부속 절인 석대암의 금돼지 설화 등을 비롯한 이야기거리는 제외하고 역사적인 사실 위주로 적는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왕조 창업 후 왕자들의 권력투쟁에 실망하여 태종 1년 1401년 3월 궁을 나와 보개산에 머물렀다.

 다음해 1402년에도 임진강 징파도(현 군남면 삼거리)에서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어 준

 태조 이성계가 보개산 심원사로 향하려고 하다가 그만두고 안변의 석왕사로 향한 적이 있다.

무학대사가 머물던 곳이고 당시의 대표적인 사찰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태조 이성계와 갈등을 빚었던 태종 이방원 또한 연천과 보개산을 자주 찾았는데

1414년 3월 1일 보개산의 신에게 제사지내고 연천의 대탄에 머물렀다.

1416년 10월 16일에는 연천현에 머물면서 내시별감을 보내어 보개산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게 했다.

당시 보개산이 영험한 산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조선초 왕실이 보개산과 연천을 자주 들른 것은 세종과 세조 대까지 이어졌다.

연천 지역이 왕실의 사냥터이자 군사훈련장으로 사용된 것이다.

조선 중기 인조 때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다 돌아온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후

 세자빈 강씨가 왕실 내의 모함에 의해 사약을 받고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세자빈 강씨는 생전에 보개산 절에 황금 160냥을 시주할 정도로 애정을 보였다.

세자빈 강씨 사후 보개산 절의 비구니는 왕실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다 죽는 사건이 있었다.

이 보개산 절이 심원사이고 비구니가 있던 곳은 심원사의 부속 절인 남암으로 추정된다.

 

조선 초기와 중기에 걸쳐 융성했고 40리 정계에 달한 심원사는

조선말인 1896년에는 스님이 송사를 통해서야 홍살문

 내 토지를 주관하는 권리를 확보할 정도로 위축되어 있었다.

 

심원사는 20세기 들어 일본제국주의 군대가 절을 소각하는 참화를 딛고 서서히

회복기에 들어섰는데 일제 강점기 동안 불교계를 대표하여 3.1운동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한

 백용성 스님, 전 조계종 종정 서암 스님, 월하스님,

전 태고종 종정 안덕암 스님 등이 거쳐갔다.

 

 한편, 1927년 11월에는 심원사 주지 선출과 관련하여 불미스러운 분규가 발생하였는데,

홍월운 주지 후임자 선정에 문제가 있다고 하여 당시 철원군수까지

참관한 가운데 재선거가 열렸다. 재적 승려 14명 중 투표유자격자 7명이 투표하여

 이진학이 당선되었고 해방될 때까지 주지로서 심원사를 지켰다.

 

 이진학 주지는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애쓴 활동이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1939년 봄 양식이 떨어진 내산리 농민들을 위해 부속 절에까지 모금을 해서 극빈자 50여 호에

소맥을 배급하고 심원사 동구에 있는 보개간이학교 아이들을 위해 매년 보조금을 희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진학 주지는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신도들을 모아 시국강연회를 열고 일본제국주의 군대를

찬양하는 7일기도를 수행하는가 하면 국방헌금을 일제당국에 헌납하는 친일 행적을 남겼다.

중일전쟁 1주년에는 일본제국주의 군대 전몰장병 추도 법회를 열고 근로보국대를 조직하여

동네 주민들의 밭을 도맡아 제초작업하고 그 대가를 받아 소위 애국헌금을 내는데 앞장서는 오점을 남겼다.

 

심원사는 일제강점기에 연천보통학교를 다닌 원로 분들이 원족(소풍)을 다닌 곳이기도 했다.

 

【참고문헌】

 

이우형 편저 「향토사료집」(연천문화원,1995)

임혜봉 저 「친일승려 108인」(청년사,2005) 조선왕조실록

동아일보 등

.. 

[옮겨온글]

여기서 향토 사학자로 나오는 "이우형"님은 관인중학교 24회 동문님입니다.

그러구 연천에서는 원래의 터에 복원을 추진하는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저는 이곳을 다녀 오면서 이런 곳에 이런 문화재가 있다는것을 새삼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옛터를 찾아 몇년전에 "이우형"님이 몇번씩 넘나들면서 찾았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

물론 관인중.고 동문회로 고향을 찾아 갔었지만 아직 까지도 심원사를 찾아 본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글구.. 이런글은 우리의 카페에는 글이 않맞는다고 생각은 들지만 저는 종교적도 아니고

단지 지역에 있는 문화재를 알아보고 널리 알리고자 하는 취지입니다.

..

===== 감사합니다 =====

 

 

 

 

 

 

 

 

 

 

 

 

 

 

 

 

 

 

'◈ Travelog > ⊙ 고찰 문화재 ' 카테고리의 다른 글

[06.15] 한국 자사 문학관  (0) 2008.06.16
[06.15] 담양 소쇄원  (0) 2008.06.16
[06.08] 파계사  (0) 2008.06.09
[04.17] 화원에서 꽃들을..  (0) 2008.04.20
[03.03] 사당동 관음사  (0) 2008.03.03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