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06.15] 담양 식영정 서화당 부용당 환벽당 취가정

◈ Travelog/⊙ 고찰 문화재

by 순도리(칠이) 2008. 6. 16. 18:00

본문

▲ 식영정(息影亭)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산 75-1번지에 있는 정자로 그림자가 쉬는곳이라는 의미를 지니고있다.

식영정은 서하당 김성원이 그의 장인 임억령을 위해 지은 정자로

조선 중기 학자이자 정치가인 정철이 성산에 와 있을 때 머물렀던 곳 중의 하나이다.

서하당유고의 기록에 따르면 명종 15년(1560)에 지었다고 한다.

 김성원은 송강 정철의 처가쪽 친척이며, 송강이 성산에 와 있을 때 함께 공부하던 동문이다.

정철(1536∼1593)은 명종 16년(1561)에 27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 뒤로 많은 벼슬을 지내다가 정권다툼으로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에 내려와

이곳 식영정을 무대로 하여 많은 선비들과 친분을 나누었으며, 시문을 익히고 성산별곡 등의 문학작품을 지었다.

식영정은 앞면 2칸·옆면 2칸의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한쪽 귀퉁이로 방을 몰아 붙이고 앞면과 옆면을 마루로 한 것이 특이하다.

 

 ▲ 식영정(息影亭) 현판

 

▲ 식영정(息影亭)

 

 ▲ 식영정(息影亭)

 

▲ 식영정(息影亭) 성산별곡 가사비

 

▲ 식영정(息影亭)

 

 ▲ 식영정(息影亭)

 

 

▲ 서하당(棲霞堂)

 

서하당 김성원(棲霞堂 金成遠 1525-1597)이 식영정 바로 곁에 본인의 호를 따서

서하당(棲霞堂)이란 정 자를 지었다고 하며 최근 복원하였다.

『서하당유고 (棲霞堂遺稿)』행장(行狀)을 보면「庚申公三十六歲 築棲霞堂于昌平之星山 爲終老計 … …」란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서하당과 식영정이 1560년에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제봉 고경명(齊峰 高敬命 1533-1592)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1593)등과 함께

’식영정 사선(息影亭 四仙)’으로 부르기도 한다.

 서하당 김성원은 송강의 처외재당숙으로 송강보다 11년이나 연상이었으나

송강이 성산에 와 있을 때 같 이 환벽당(環壁堂)에서 공부하던 동문이였다. 송강 정철은

이곳 식영정과 환벽당 송강정(松江亭) 등 성 산 일대의 화려한 자연경관을

벗삼으며『성산별곡』을 창작해냈던것이다. 또한 송강은 이곳을 무대로 하여

면앙정 송순(傘仰亭 宋純) 하서 김인후(河西 金仁厚)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承)등

당대의 명유들을 스승으로 삼았으며 제봉 고경명 옥봉 백광훈(玉峰 百光勳)

귀봉 송익필 (歸峰 宋翼弼) 등과 교우하면서 시문을 익혔다.

 

▲ 부용당(芙蓉堂)

 

▲ 부용당(芙蓉堂)

 

▲ 부용당(芙蓉堂)

 

식영정 옆에는 1973년에 《송강집(松江集)》의 목판을 보존하기 위한 장서각을 건립하였으며

1972년에는 부속건물로 부용당(芙蓉堂)을 건립하고 입구에 《성산별곡》 시비를 세웠다.

주변에는 정철이 김성원과 함께 노닐던 자미탄(紫薇灘) 노자암 견로암 방초주(芳草州)

조대(釣臺) 서석대(瑞石臺) 등 경치가 뛰어난 곳이 여러 곳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광주호의 준공으로 거의 물 속에 잠겨버렸다. 

 

 ▲ 환벽당(環碧堂)

 

조선시대의 선비들에게는 오직 한문만이 참글이었고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었지만 그것은 개글,

언문(諺文)으로 아랫것들이나 아녀자들이 쓰는 문자였다.

그런 시대에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1593)은

순수한 우리글로 성산별곡(星山別曲),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관동별곡(關東別曲) 등의 가사를 지어

인구에 회자되는 문학으로 승화시킴으로써 조선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그 송강이 청소년시절을 보내며 배우고 자랐고 주옥같은 작품을 창작했던 산실이 전라도 창평(昌平縣 오늘의 담양)이었다.

을사사화에 역적의 집안이 되어 유배를 다녀야 했던

송강의 아버지는 유배가 풀리자 서울을 버리고 친산(親山)이 있는 창평으로 발길을 돌렸었다.

 

 이때 아버지를 따라왔던 16살의 송강은 이곳에서

사촌 김윤제(沙村 金允悌 1501-1572)선생을 인연으로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송촌 양응정 등

당대의 석학들을 스승을 만나 학문을 익혔으며 면앙정 송순, 석천 임억령 등에게서 문학을 배웠다.

그리고 평생의 동지였던 서하당 김성원(棲霞堂 金成遠 1525-1597)과 제봉 고경명 등도 여기에서 만났다.

이러한 송강의 행적가운데 배우고 자랐으며 성산별곡의 산실이기도 했던 환벽당(環碧堂)과 식영정(息影亭)이 있다.

지금은 모두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의 지방문화제 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러한 귀중한 문화유산들이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오는데는 송강의 후손들의 역할이 컸다.

특히 그 중심에 계당(溪堂)사람들이 있다.

 

환벽당의 주인이었던 사촌 김윤제선생과 식영정의 주인 서하당 김성원선생의 후손들인

광산김씨(光山金氏)들이 의병장이었던 충장공 김덕령장군이 모함을 받아

역적으로 몰리면서 선조들의 문화유산을 보존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들 후손들을 이은것이 송강의 후손들이었다. 송강의 3남 정진명의 증손이며 송강의

현손인 수환 정흡(1648-1709)이 사촌의 후손에게서 환벽당을 물려받아 거기서 살며 호를

스스로 수환(守環)이라 지었고, 수환은 아들이 없어 조카인

소은 정민하(字 達夫 1671-1754)를 양자했는데, 소은은 1721년 서하당의 후손에게서 식영정을

인수하여 노년을 이곳에서 소가로 보냈다고 한다.

 

그 후 소은의 장남 정 근(鄭 根)은 송강의 4남 기암 정홍명이 지어 살다가

소쇄원 양산보선생의 후손인 양경지선생이 잠시 거주하던 계당을 인수하게 되었는데,

이로 계당의 주인은 환벽당과 식영정의 주인이기도 했다.

이런사연으로 계당은 가사문화권을 찾던 선비들의 사랑방이 되었고,

마치 객사처럼 400여년동안 손님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았다.

 

 ▲ 환벽당(環碧堂) 

 

  ▲ 환벽당(環碧堂)

 

  ▲ 환벽당(環碧堂)

 

 ▲ 환벽당(環碧堂) 성산 별곡중에서

▲ 취가정 (醉歌亭)

 

충장공 김덕령(金德齡)이 출생한 곳으로서 환벽당 남쪽 언덕 위에 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덕령의 혼을 위로하고 그의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1890년(고종 27년) 후손 김만식(金晩植) 등이 세웠다.

 6·25전쟁으로 불탄 것을 1955년 재건하였다. 주변 정자들 가운데 가장 늦게, 얕으막한 산 위에 누대처럼 지었는데,

 대부분의 정자들이 강변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과 달리 넓게 펼쳐진 논과 밭들을 향하여 세웠다.

정자 앞에 서 있는 소나무는 정자의 운치를 한결 더해준다.

정자의 이름은 정철의 제자였던 석주 권필(權糧:1569∼1612)의 꿈에서 비롯하였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은 김덕령이 꿈에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고 한맺힌 노래 《취시가(醉時歌)》를 부르자,

권필이 이에 화답하는 시를 지어 원혼을 달랬다고 한다.

 

▲ 취가정 (醉歌亭) 

 

▲ 취가정

 

취시가(醉時歌) / 김덕령

한 잔 하고 부르는 노래 한 곡조, 듣는 사람 아무도 없네.

나는 꽃이나 달에 취하고 싶지도 않고 나는 공훈을 세우고 싶지도 않아

공훈을 세운다니 이것은 뜬 구름 꽃과 달에 취하는 것 또한 뜬 구름.

한 잔 하고 부르는 노래 한 곡조, 이 노래 아는 사람 아무도 없네.

내 마음 다만 원하기는 긴 칼로 밝은 임금 받들고자

 

 此曲無人聞 , 我不要醉花月 . 我不要樹功勳 .

樹功勳也樹浮雲 . 醉花月也是浮雲 . 醉時歌 .

此曲無人知 . 我心只願長劍奉明君.

 

<충장공유사>

 

취시가에 화답시 / 권필

 

지난 날 장군께서 쇠창을 잡으셨더니 장한 뜻 중도에 꺾이니

천명을 어찌하리 돌아가신 그 넋의 그지없는

눈물 분명한 한 곡조 취시가로 읊으셨네.

 

將軍昔日把金戈 . 壯志中최奈命何 .

地下英靈無限恨 . 分明一曲醉時歌

 

<취가정 현판>

충장공(忠將公)  김덕령(金德齡)

(1567 - 1596) 임진왜란  의병장

 ..

[06.16]

역사 탐방을 정리 하면서...

 

꽃밭의 소녀 / 오청수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