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많은 사연과 전설이 서린 남원 광한루원

△. 거북바위 앞에서 바라보는 광한루 봉래섬에서..
조선조 초기의 재상이었던 1419년 황희[黃喜]가 남원에 유배되었을 때 누각을 짓고 광통루[廣通樓]라 하였다.
그 후 1434년 세종 16년에 남원부사 민여공이 중수하고 당시 충청 전라 경상 삼도 순찰사였던 하동부원군 정인지가
이 누에 올라 경관을 감상하다가 “오호라 호남에서 가장 뛰어난 경관은, 나의 고향의 경승을 감상하게 되면
나의 고향보다 나은 곳이 없고, 더욱이 이곳 광한루보다 나은 곳이 없더라"용성지[龍城誌]"고 했다.
또 일설에는 ”호남의 승경으로 달나라에 있는 궁전 광한청허지부가 바로 이곳이 아니던가“하고 감탄하여
그 후 광한루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건물은 1597년 정유재란으로 인해 불타고 현재의 건물은 1626년
당시 남원부사인 신감(申鑑)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광한루의 앞뒤에는 ‘호남제일루[湖南第一樓], 계관[桂觀] ’광한루[廣寒樓]란 편액이 걸려있다. 호남제일루라는
말 그대로 호남에서 제일가는 누각이라는 뜻이며, 광한과 청허부는 하늘나라 월궁의 옥경에 들어서면 ‘광한 청허지부’가
있다는 신화적 전설을 상징하고, 계관은 달나라의 계수나무 신궁을 상징한다. 광한루 누각에 걸린 여러 편액중 광한루란
편액은 신익성이 호남제일루와 계관의 편액은 1855년 남원부사 이상억이 누각을 중수하면서 손수 써 걸었다.
이 중 계관의 편액은 동학란 때 없어진 것을 1930년대 광한루를 대대적으로 보수할 때 남원유지 강대형이
다시 써 건 것이다. 또한 현재 광한루에 걸린 광한루란 편액은 전민의원 조정훈이 쓴 글씨라고 하는데
금암봉의 금수정과 용성관의 편액 글씨도 썼다고 전해온다.
1879년 광한루가 차츰 북쪽으로 기울어져 이를 방지하기 위해 루의 북쪽에 다락[월랑]을 세워 층층대를 만들어 놓았다.
북쪽의 층층대는 1877년[고종14년]에 부임한 남원부사 이용준이 광한루가 퇴락하여 본관 전체가 북쪽으로 기울어져 무너질
우려가 있어 수지면 고평리에 사는 추[秋] 대목의 묘안을 받아들여 북쪽에 누를 오르내리는 계단을 만들되 본관과 같이 아름드리
기둥을 세워 튼튼하게 고정시켜 본관의 기울음을 바로 잡고 외관으로도 더 화려하게 하였다. 이는 우연하게도 누각 건축사상
큰 의의를 가지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나라 누각에 월랑을 가설하게 된 시초이며 이전까지는 누상을 오르내리는 사다리만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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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문 앞에서 바라본다.
광한루는 출입문이 4곳이 있는대 동문, 서문, 북문외 남쪽에 있는 문이 정문으로
광월한 크기의 정원으로 누각이 있는 광한루원 이였습니다..
북문에는 청허부[淸虛府]라 현판 되있으며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의 친필이다..

△. 보물 제281호 광한루 비석

△. 비석군[碑石群]
이곳 비석은 과거에 남원과 인연을 맺은 부사[府使], 관찰사[觀察使], 어사[御使]들의
사적비[事跡碑], 선정비[善政碑]등 이다.
예전에는 남원시내 여러곳에 흩어져 있었으나
도시화 과정에서 비석의 소실과 훼손을 방지 하고자 이곳으로 옮겨놓았다.
비석들의 제작연대가 조선중기에서 부터 후기까지 다양하여
남원 고을의 역사와 비석제작의 변천과정을 엿볼수있는 좋은자료이다.

△. 광한루의 뒷태 모습입니다..
특히한것은 뒤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면서 다락을 세워 층층대 방식으로 건축되어있어.
이것들은 처음에 만들어진 광한루가 차즘 기울어지는것을 막기위해
1977년[고종 14년]에 부임한 남원부사 이용준이 수지면 고평리에 사는 추[秋]대목의 묘안을 받아
북쪽에서 오르는 계단 방식으로 만들어 계관[桂觀]으로 오를수 있도록 만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춘향사당으로 자리를 옮겨 봅니다.

△. 춘향사당[春香祠堂]
열녀 춘향의 굳은 절개를 영원히 흠모하기 위해서 건립된[1931] 사당이며,
입구대문은 "단심문" [님을 향한 일편단심] 이라는 의미로 칭한다.
사당 중앙에는 "열녀 춘향사" 라는 현판이 있고 안에는 춘향의영정이 안치되어 있으나
이 사당에서 축원을 빌면 백년가약이 이루어 진다고 하여 참배객이 늘고 있다.
이러한 춘향사는 1931년 일제강점기에 남원의 유지들이 주축이 되어 권번의 기생들과 힘을 합하여
민족의식 고취와 춘향의 절개를 이어받고자 설립하고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 춘향영정[春香影禎]
최초 영정은 진주사람 강주수가 그려 기증하고
1939년 가을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가 그린 영정을 나란히 봉안 하였으나
6.25 중에 훼손되어 1961년 기증받은 이당 김은호 화백이
그린 춘향의 영정이 현재까지 봉안되고 있다.

△. 부사 성안의 선정비
성안의 [成安義, 1561~1629]는 조선시대의 문신으로 자는 정보[精甫], 호는 부용당[芙容堂]이다.
선조 24년[1591]에 3년에 한번씩 시행되는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예조좌랑[정3품]과 남원부사를 거쳐
광주목사등을 지냈다. 죽은후, 인조 26년[1648]에 이조판서, 양관대제학[정2품]으로 증직[贈職] 되었다.
이 비석은 성안의가 선조 40년[1607]에 만원부사로 부임 후 4년연 동안 베푼 선정[善政]을 기리기 위해
광해군 3년[1611]8월에 세워졌다.

△. 널병바위 에서 광한루를 바라봅니다.
흰목련도 얼굴을 살포시 내밀고 있군요,,,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바라본다

△. 목련도 하늘을 수놓으며 봄소식을 알리고 있습니다...

△. 널병바위 [넓은바위]
널병바위 또는 광암[廣巖]이라고 부르는 이바위는 본래 남원성 동문 앞에 있었던것을
1950년 말에 주변이 많은 비석들과 함께 이곳으로 옮겼다.
옛날 장수가 남원성 동문 앞 개울가에 짊어져서 놓았다는 전설이 있는
이 바위 에는 알터 라고 부르는 30여개의 성혈[性穴]이있다.

△. 선조 15년[1582] 전라감사 정철[鄭澈]이
호수를 조성하여 석축을 쌓아 3개의 섬[삼신산]을 만들었다.
동쪽은 영주산, 가운대 봉래산, 서쪽은 방장산, 이라 이름을 붙였다.
그 섬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 영주산의 영주각[瀛洲閣]
삼신산 중 광한루 앞에 호수를 만들고 그 호수 안에 섬을 3개의 섬을 만들어
동쪽에는 영주산[瀛洲山]을 의미로 만들어 영주각[瀛洲閣]을 세워 놓았습니다..
영주산은 바다영[瀛], 섬주[洲], 뫼산[山]으로 바다의 섬으로 제주도 한라산을 뜻한다.
현재의 영주각은 정조 19년[1795] 부사 이만길[李萬吉]이 재건하고 영주각[瀛洲閣]으로 손수써서 편액하였다 한다.

△. 삼신산 중에 봉래산[蓬萊山]
신선이 살고 있다는 전설속의 삼신산을
광한루 앞에 호수를 만들고 그 호수 안에 섬을 3개의 섬을 만들어 조성하였다.
가운대에는 봉래산[蓬萊山]을 의미로 만들어 놓아 대나무를 심었으며
아담한 구름다리로 동쪽 영주산 서쪽 방장산이 이어져 있다...
봉래산은 쑥봉[蓬], 명아주래[萊], 뫼산[山]으로 금강산을 뜻한다.

△. 봉래섬에서 바라본 방장정[方丈亭] 가는길
삼신산 중 광한루 앞에 호수를 만들고 그 호수 안에 섬을 3개의 섬을 만들어
서쪽에는 방장산[方丈山]을 의미로 만들어 방장정[方丈亭]이 소담하게 지어져 있다...
방장산은 모방[方], 어른장[丈], 뫼산[山]으로 지리산을 뜻한다.

△. 봉래산의 봉래섬에서 구름다리 만들어 놓아 연결이 되어 있었습니다.

△. 구름다리에서 바라본 광한루 호수가에 튀어 나온 부분은
거북바위가 근방 이라도 호수로 뒤어 들어갈 기세로 호수를 바라 보고 있습니다..

△. 방장정 으로 들어가기전에 구름다리는
지나는 사람들의 사진을 담을 명소로 그냥 지나는 사람이 없더군요..
올마 몇일만 있으면 저곳에서 춘향제가 열린것이며
주중에도 특별한 프로그램으로 남원에서 음악회를 개최 하는것 같더군요...
잔잔한 반영으로 오늘은 이곳가지 다음 방장정과 영주각으로 이어집니다..
감사합니다.. 모든 불친님들 건강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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