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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23】수많은 수난을 격으면서도 후손들의 노력으로 다시 태어난 숭의전

◈ Travelog/⊙ 고찰 문화재

by 순도리(칠이) 2012. 9. 29.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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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4왕과 공신 16인의 위패가 모셔진 숭의전



 

 




    ○ 숭의전 [崇義殿] 조선 시대 고려 태조와 혜종(惠宗)•정종(定宗)•광종(光宗)•경종(景宗)•성종(成宗)• 목종(穆宗)•현종(顯宗) 및 정몽주(鄭夢周) 등 15인의 공신을 제사지내도록 한 사당으로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에 있음. 태조 6년(1397)에 태조의 명으로 묘(廟)를 세우고 정종 원년(1399)에 고려 7왕을 제사지내도록 하였으며, 세종 5년(1423)과 문종 2년(1452)에 중건하였는데 문종 때에 숭의전(崇義殿)이란 전호(殿號)를 내려 고려 왕씨의 후손들로 부사(副使) 혹은 사(使)로 삼아 봄•가을로 제사하고 관리하도록 하였음. 제전(祭田)으로 숭의전전(崇義殿田) 12결이 지급되었고, 매년 1차례씩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로 하여금 봉심(奉審)토록 하는 한편, 승지(承旨) 등을 보내 제사를 올리기도 하였음. 그 소속 관원으로는 종3품의 사, 종4품의 수(守), 종5품의 영(令), 종6품의 감(監), 종9품의 여릉 참봉(麗陵參奉) 1원(員)이 있었음. 용례 ㉠숭의전. 숭의전 부사 왕순례도 부름을 받아 잔치에 입시하였다. 왕순례에게 어탁을 내려주고 신숙주에게 명하여 전교하기를, “내가 사사로이 네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다. 네가 선대의 후손이라 하여 세종께서 왕씨의 뒤를 세우고자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고, 문종께서 비로소 숭의전을 세워 그 제사를 잇게 하였으니, 지금 내가 선왕의 뜻을 이어받든 것일 따름이다.” 하였다. "崇義殿副使王循禮亦承召侍宴 賜循禮御卓 命叔舟 傳曰 非予私恩于汝 以汝爲先代之後 世宗欲立王氏之後而未就 文宗始建崇義殿 以續其祀 今我丕承先志耳 [세조실록 권제38, 2장 뒤쪽, 세조 12년 1월 3일(병오)] ㉡숭의전. 재군 서쪽 5리에 있는데, 본조 태조 원년에 예조에 명하여 마전현에 사당을 짓고, 고려 태조,혜종,성종,현종,문종,원종,충렬왕,공민왕,을 제사하게 하고 제전을 주었다. 세종 7년이 되어 유사가 말하기를, “나라의 종묘에도 다만 5실을 제사하는데, 전조의 사당은 8위를 제사하니, 예에 맞지 않습니다.” 하므로, 이에 태조•현종•문종•원종만 남겨 놓고, 봄•가을 이중삭으로 향축을 보내어 제사했다. 문종 2년에 고려의 후손 왕순례를 찾아서 그 제사를 맡아 지내게 하고, 그 사당 이름을 숭의전이라 하여, 왕순례를 부사로 삼았다. 복지겸,홍유,신숭겸,유금필,배현경,서희,강감찬,윤관,김부식,김취려,조충,김방경,안우, 이방실,김득배,정몽주 등을 배향했다.> "崇義殿 <在郡西五里 本朝太祖元年 命禮曹立廟於麻田縣 祭高麗太祖惠宗成宗顯宗文 宗元宗忠烈王恭愍王 給祭田 至世宗七年 有司言 國家宗廟只祭五室 而前朝之 廟乃祭八位 未合於禮 於是 只留太祖顯宗文宗元宗 以春秋二仲朔傳香祝致祭 文宗二年 求高麗後王循禮 俾主其祀 仍名 其廟爲崇義殿 以循禮爲副使 以卜 智謙洪儒申崇謙庾黔弼裴玄慶徐熙姜邯贊尹瓘金富 軾金就礪趙冲金方慶安祐 李芳實金得培鄭夢周配享> [신증동국여지승람 권제13, 16장 앞쪽~뒤쪽, 경기 마전군 사묘]" 출처 :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3.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초기 건물은 1950년 6.25 전쟁으로 인하여 전소되었고 1972년부터 1973년까지 현재의 규모로 복원 건립되고 1971년12월28일에는 국가 사적 제223호로 지정되었다.

 

 


 

. 연천 미산면 아미리 주변에 있는 당포성 "평화 누리길'에 함께 있었다.

 


 

. 연천군에서 설치해놓은 관광안내도

어딜가나 명소에는 같은 모양으로 설치 해놓았습니다.

 


 

. 그중에 오늘 찾은곳은 고려시대의 태조의 위패를 모셔진 숭의전 찾아 보겠습니다.

 


 

. 이곳은 "연천 평화누리길" 로 안보체험 누리길로도

많이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기도 합니다..

 


 

. 입구에는 어수정[御水井] 수량이 많이있어 넘어가는 물이 아깝기도 합니다.. 

 


 

. 어수정 옆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숭의전 전경 안내도..

 


 

. 하마비[下馬碑]도 서있습니다..

[신분의 고하[高下]를 막론하고 누구나 타고 가던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새긴 석비[石碑]]

 


 

. 숭의전 오름길 응지 부분이면서 주변에 아마도 습기 많은 모양이다..  

 


 

. 오름길에서 입구 홍살문과 어수정 우물이 보인다.

 


 

. 가을철인듯 오길엣도 꽃을피워 꼬칠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 아슬아슬한 모습으로 보이지도 않는 줄기에 매달려 있다...

 


 

. 숭으전 오르명서 우축으로 보이는 사잇길 밑에 보이는 건물은 예전 화장실..

지금은 패쇄 수순을 밞는중 곳 패쇄 한다는 문구와 함께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이곳으로 내려가면 임진강의 멋진 장면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선 숭의전 부터 다녀 오겠습니다.

 


 

. 숭의전 입구 바로앞에 도착 하니 범상치 않아 보이는

상석 설치해 놓은 나무 한그루가 있었다..

느티나무는 고려태조 왕건시대  완건이 직접 심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나무

지금도 대접을 받고 있더군요..

 


 

. 드디어 보이는 숭의전 전경입니다..

무작정 숭의전 안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우축으로 사진과 설명을해 놓은곳이 있더군요..

잠시들러 보기로 하였습니다.

 


 

. 숭의전 국보제223호

조선시대에 고려의 왕을 봉사[奉祀]하던 종묘[宗廟]로

고려태조. 현종. 문종. 원종등 4왕과 고려조 충신 16명의 위패를 모신 묘전이다.

 


 

. 묘전이 성립되는 과정

조선태조 이성계는 즉위교서 두번째 항목에 전왕조에 대한 예우를 천명하며

고려 마지막왕인 공양왕의 아우 왕우와 두아들 조와 관에게 경기도의

마전을 주고 귀의군에 봉하여 왕씨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 태조 왕건의 동상[銅賞]

본래 고려의 도읍지 개경[개성]에 있었으나 조선이 개국하고 개경의 종묘를 헐고

연천의 앙암사에서 전조의 제사를 모시게 되면서 이곳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그러나 세종 대에 이르자 재례법의 개혁으로 충청도 문의현으로 옮겼다가.

세종11년에 개성 현능 곁에 매장하게 되었으나 

최근에 북한에서 정비공사때 발견 하게되어 북한 학자들은 금동불상으로 착각하여

개성박물관에 보관 최근에 방문한 서울대 노명호 교수가 왕건의 동상임을

알아내어 현재는 평양 중앙역사박물관에 옮겨 전시되고 있다.      

 


 

. 왜 연천 마전에 숭의전을 세웠을까?

당대 뛰어난 시인 정희량[鄭希良 1469~1502]의 남긴시에서 나오며 [중략]

현재 숭의전터에 앙암사 사찰이 있었으며 고려태조 왕건이 자주 들러 기도처[원찰]

왕건의 휘화에 있던 개경과 철원 궁성으로 가는길 180리 뱃길에 임진강을 거슬러

마전에서 쉬어 가던곳으로 강변에 잠두봉 중턱에 자리잡은 앙암사에 경치가

수려하고 한적한 기도처로서 좋은 환경이 였던곳 이자리에 위패를 보시게 된것이다.

 


 

. 고려 왕족인 왕씨들에게 불어닥친 수난사.

조선 개국하면서 개경에서 쫓겨나 거재도. 강화도로 보내지며 1392년10월13일

개경에 있던 종묘를 헐고 그자리에 조선종묘를 건립 왕우의 아들 조와 관은

왕씨성을 뺏기고 모찬 성인 노[盧]씨를 따르게 하였다.

1394년 1월 "맹인 이흥무의 점괘사건'으로 전국으로 있던 왕씨 들을

참수형에 처하였다고 한다.. 

 


 

. 숭의전 초대 부사 왕순례

왕순례[본명:왕우지]는 고려 제8대 현종의 후손으로 1394년

대참사이후 성을 제씨로 계명하여 숨어살던 20대 초반의 떠꺼머리 총각.

이웃 주민과 땅경계 싸움을 하다 제씨가 아니라 왕씨라고 관하에 고발하면서

왕씨 후손임을 알게되어 조정에서 곧바로 제우지는 왕순례로 계명하여

종삼품 숭의전 부사[副使]로 임명되었다.

 


 

. 숭의전의 전례의 특징

국가의 길흉에 관한 일정한 의식으로 조선시대 국가 전례는

대사. 중사. 소사.중에 숭의전은 중사에 속하며.

역대 시조제의 구분을 보면

숭령전[崇靈展]단군.고구려시조 동명성왕. 승렬전[崇烈展]백제시조 은조왕.

승덕전[崇德展]신라시조 박혁거세왕. 숭선전[崇善展]가락국시조 수로왕.

숭인전[崇仁展]기자[箕子]. 숭의전[崇義展]고려4왕.고려조16공신.

등으로 수시로 국왕을 대신하여 향축[香祝]. 제물[祭物]. 치제[致祭]

하게 한 국가의 중요 행사였다.

 


 

. 숭의전 대제 지내는 모습.

일제강점기와 한국동란을 거치며 그 형식과 규격이 펌하 되었으나 관계문중의

노력으로 지금까지 그 명맥이 이어져 매년 음력 3월3일. 음력 9월9일

대제가 봉행되고 있다.

 


 

. 숭의전 건물의 배치.

조선시대 1605년[선조38]. 1727년[영조3]. 1789년[정조13].

1868년[고종5]. 1908년[순종2]등 5차레의 개수[改修].중수[重修]를 반복하였으며

한국 전쟁당시 전소되어 1971년 그터에 사적제223호로 지정하고

1972년부터 북원 건립히야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하였다.

[각자의 위치는 다음 게시글어 나옵니다..]

 


 

. 사진으로 보는 숭의전 복원 과정.

1972년 관계문중의 노력으로 왕의 위패를 모시는 정전인 숭의전이 복원되었고

부속건물들인 배신청. 이안청. 전사청. 앙암재. 삼문. 홍살문.등이 연차적으로 북원

1985년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 북원후 숭의전의 사진들을 전시되있다.

 


 

. 숭의전 잠두봉 암각문.

강건너 삼화리에서 보았을때 누애 머리처럼 생겼다하여 "잠두봉"이라

불리게 되었다. 잠두봉 수직절벽에 한수의 칠언절구가 남아있다.

 

重作 崇義殿[중작 숭의전] 숭의전을 중수하고

 

麗朝祀宮四百秋 [여조사궁사백추]

숭의전을 지은지 4백년이 되었는데

誰敎木石更新修 [수교목석경신수]

누구로 하여금 나무와 돌로 새로 짓게 하는고

江山豈識興亡恨 [강산개식흥망한]

강산이 어찌 흥망의 한을 알리오

依舊蠶頭出碧流 [의구잠두출벽류]

의구한 잠두봉은 푸른 강물위에 떠 있구나

往勢傷心滿月秋 [왕세상심만월추]

지나간 세월 만월추에 마음 슬퍼하였거늘

如今爲郡廟宮修 [여금위군묘궁수]

지금 이고을 군수가 되어 묘궁을 중수하였네

聖朝更乞麗牲石 [성조경걸여생석]

성조는 생석을 갖추어 고려왕들을 제사토록 하였으니

留與澄坡萬古流 [유여징파만고류]

아마도 숭의전은 징파강[임진가의 별호]과 더불어 길이 이어지리라.

 

今上 十三 季 己酉 仲秋 郡守 韓文洪 題

[금상 십삼 계 기유 중추 군수 한문홍 제]

 


 

. 숭의전 전경입니다.. 지금 부터는 숭의전 내부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 우선 맨좌축에 있는 문으로 들어갈렵니다.

앞에는 문있는곳으로 들어가면 앙암재[재실]이며 비석이 하나 보인다.

 


 

. 사적 제223호 숭의전[崇義殿]

 


 

. 문을 들어서면서 먼저 보이는 앙암재[仰巖齋] 현판부터 눈에 들어 옵니다.

해설사님의 구성진 목소리로 열변을 토하고 있었습니다.. 

 


 

. 설명을 경청하는 관람객들 이곳은 재례때 서용하는 향.축.폐 등이 있으며

특히나 왕건의 동상사진이 전시되있다.

 


 

. 의관실[獻官室]

앙암재 좌축에 있는방으로 왕건동상 사진과 소사가 있는방이다.

 


 

. 왕건동상에 관해 설명을 들의면서 방송에 방영된 사연을 다시 한번더 알려준다.

 


 

. 또한 내부에는 고려태조 왕건 자필이라는 해서체 이해 할수는 없지만....?

지금은 경북 군의군 부계면 대율리와 남산리에 거주하는 부림 홍씨[氏] 집안에서 1926년 취득하여 보관해 오고있다. 

[두문동 72현으로 꼽히는 문사 14명중 한분인 홍노[洪魯.1366~1392]의 후손들이다.]

쉽게 알아 볼수있도록 다시 작성하여 아래 사진처럼 전시해 놓았더군요...

 


 

. 고려태조 왕건의 소사

高麗太祖 白猿帖

[고려태조 백원첩]

所思 [소사] 그리워하는 바

東林送客處 [동림송백처] 동림은 손님을 배웅하는 곳이라
月出白猿啼 [월출백원제] 달이 뜨니 흰 원숭이도 슬피 우네
笑別吳山遠 [소별오산원] 웃으며 이별하나 오산은 멀고머니
何煩過虎溪 [하번과호계] 호계를 넘어가는 것을 어찌 번거롭다 하랴

고려태조 왕건이 중국의 유장군이라는 분을 환송하며 직접 쓴 시로
원본은 狂草에 가까운 호방한 草書로 쓰여져 있습니다.
이 시를 몇백년 지난 고려말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 포은 정몽주가
되돌려 받아 왔으니 그 기쁨이 오죽했겠습니까.
그래서 그의 동료, 문인들과 1387년 한가위에 대구 동화사에서 만나
회포를 풀며 즐겼답니다.

 


 

. 집사실[執事室]

앙암재 우축으로 있는 방이다.

 


 

. 미산면 아미리[峨嵋里] 임진강변에 있는 썩은소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여 왕위에 등극하면서 고

려왕족인 왕씨[王氏]를 멸족시키려 하였다. 왕씨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갖가지 인연에 따라 변성[變姓] 이라도 하여

생명을 보존하고자, 전씨[田氏, 全氏], 김씨[金氏], 옥씨[玉氏], 금씨[琴氏], 박씨[朴氏] 등으로 변성을 하고 피신을 하였다.

 

그 중에 뜻 있는 왕씨 몇 사람이 모여 의논하기를,

“우리들이 모두 이렇게 변성을 하더라도 우리 조상님은 한 분이니, 왕건태조[王建太祖] 할아버지의 신주는

우리들이 안전한 곳에 편안히 머무시도록 해 드립시다.”하여, 

돌로 배를 만들어 송도에 안치된 왕건의 신위를 그 돌배에 모신 후 송도 앞 예성강에 띄우며 신위를 향하여 말하기를,

“이곳 송도 땅에서 모진 고난을 당하시느니 차라리 이 돌배를 타시고 안전한 곳을 찾아피신하소서.”하였다.

 

그 돌배는 임진강과 합류 지점에 도달하여 임진강을 역류하여 강원도 철원과 경계인 황해도 안악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강을 따라 내려오기 시작하여, 지금의 미산면 동이리 임진강 어느 벼랑 밑에 멈추어 움직이지 아니하였다.

신위를 모신 돌배를 차마 홀로 떠나 보낼 수 없어 이 돌배에 같이 타고 있던 왕씨 몇 사람들은,

“이 곳을 피신 장소로 태조 할아버지께서 정하신 듯하니, 이 곳에 모시도록 합시다.”하고

최종 결정을 내렸다. 배에서 내리면서 쇠로 만든 닷줄을 매어 놓고,

근처에 사당을 지을 명소를 물색하여 정한 후 강가에 나가 보니, 하룻밤 사이에 쇠닷줄이 썩어 끊어지고

돌배는 어디로 갔는지 흔적이 없었다. 급히 하류 쪽으로 가서 찾아보니 그 곳에서 4㎞쯤 떨어진 곳의

‘누에머리[蠶頭]’라는 절벽에 붙어서 움직이지 아니하였다.

 

이에 그곳 절벽 위에다 사당을 지어 태조 왕건의 신위를 모시고 ‘숭의전[崇義殿]’이라고 이름하기로 하였다.

그 곳이 지금의 미산면 아미리에 있는 숭의전 자리라고 한다. 지금도 청명한 날에는 누에머리 절벽 밑에

가라앉은 돌배가 보인다고 전하여지고 있으며, 썩은소의 유래는 하룻밤 사이에 쇠닷줄이 썩었다고 하여

‘썩은쇠’라고 불리던 것이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말소리가 변하여, 오늘날에는 ‘썩은소‘로 불리어지고 있다고 한다.

출처 : 연천군청

=== 이어서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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