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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0】제21대 영조왕은 없고 원비만 있는 홍릉[弘陵]을 찾아서...

◈ Travelog/⊙ 고찰 문화재

by 순도리(칠이) 2012. 4. 20.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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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의 능



 

 



    ◎ 산행장소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92. ◎ 산행일자 : 2012년 03월 31일 [토요일]

    ○ 정성왕후 서씨 [貞聖王后 徐氏]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 1692년~1757년] 21대 임금 영조의 원비인 정성왕후는 1692년(숙종 18) 12월 7일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딸로 태어났으며, 1704년(숙종 30) 숙종의 둘째 아들인 연잉군과 가례를 올려 달성군부인에 봉해졌다. 1721년(경종 1) 왕위에 오른 연잉군의 형 경종이 병약하고 후사가 없자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되는데, 이와 동시에 정성왕후도 세제빈으로 봉해졌다. 1724년(경종 4) 경종이 승하함에 따라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 숙종과 경종의 부인을 극진히 모시며 내명부를 지켰다. 1757년(영조 33) 2월 15일 소생 없이 66세로 승하하였다. ○ 일화 영조는 정성왕후의 행장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왕궁 생활 43년 동안 항상 웃는 얼굴로 맞아주고, 양전을 극진히 모시고, 게으른 빛이 없었으며,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의 신주를 모신 육상궁 제전에 기울였던 정성을 고맙게 여겨 기록한다. 영조는 정성왕후 승하 2년 후 66세의 나이에 15세의 소녀였던 정순왕후를 다시 맞아들였으나, 한 평생을 함께 했던 정성왕후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위의 행장에 잘 드러나 있다. 출처 : 문화재청 서오릉 관리소

 

 


 

. 홍릉은 조선 제21대 영조[英朝]의 왕비[王妃] 정성왕후[貞聖王后] 서씨[徐氏,1692~1757]의 능이다.

왕후[王后]는 달성부원군[達城府院君] 서종제[徐宗悌]의 딸로 경종[景宗] 원년[1721]에 세제빈[世第嬪]이 되었고,

1724년 영조[英朝]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王妃]가 되었다.

 

왕후[王后]는 자손이 없이 영조[英朝] 33년[1757]에 66세로 창덕궁[昌德宮]에서 돌아가셨다.

 


 

. 홍살문을 에서 바라보면 한눈에 들어오는 홍릉 저가 일반적 으로 생각하는 릉 입니다..

정자각 뒤로 릉이 있고 우축으로는 비각 이런것 들이 모두가 흔이 볼수 있는것 입니다...

 


 

. 홍살문.정자각 지붕 넘어로 보이는 "정성왕후 릉" 이다.

 


 

. 조금 옆으로 돌아서 담아 본다.

 


 

. 참도.정자각.배위터.수복방터.비각.등 다른 왕릉과 달리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올라가 보면 다른곳이 한곳이 있다. 궁금하지만 뒤로 보일것이다.

또한

아무리 중앙을 맞춰 볼려고 해도 홍살문과 참도 정자가 능침과는 맞지 않는다. 왜그랬을까....??

 


 

. 참도를 바라보면서 아주 작게 보이는 주춧돌로 보이는 터가 보인다.

그곳이 능을 지키던 수복장들이 기거 하였던곳 [감시 초소] 쉽게 알수 있을것이다.

 


 

. 능상을 바라보면 이상한부분이 보인다. 그러나 뒤로 올라갈것이다 그때 알아 보도록 하고.

정자각을 자세히 들여다 본다.

 


 

. 참도 중에 신도와 어더가 있지만 정자각으로 올라가는곳은

제관 과 임금이 오르는길 "동계"라고 한다. 오른발 부터 내딛는다고 한다.

동계의 모양세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병풍에서 볼수있는 모양

 


 

. 비각 내부에 있는 비석 비문을 살펴본다.

 

"조선국 [朝鮮國]

정성왕후 홍릉 [貞聖王后 弘陵]"

라고 누각 되있으며 뒷면을 보면 시호와 칭호는 한참 긴것이 특이하다.

 


 

. 능상으로 올라가며 제향공간을 내려다 본다. 좌축에 비각이다.

 


 

. 능상을 돌아 뒷면[잉]으로 올라가 본다. 다른 왕릉과 다른곳을 불수 있었으며

영조는 정성왕후 죽자 묘지로 이곳에 정하고 "홍릉"이라 하였고

왕비의 유택[幽宅]을 정하면서 장차 함께 묻히고자 하여 허우[虛右]의 제도를 쓸 것을 명하여,

왕비는 바른쪽 정혈[正穴]에 돌을 ‘十’자형으로 새겨 묻도록 하였으며, 능의 석문은 쌍릉[雙陵]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조가 죽자 후대왕인 정조가 서오릉에 홍릉 자리를 버려두고 동구릉[東九陵] 내 원릉[元陵]으로

영조의 능지를 정함으로써 오른쪽 공간은 빈 터로 남게 되었고.

원릉[元陵]에는 계비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金氏]와 함께 쌍릉[雙陵]으로 되있다. 

 


 

. 정성왕후[貞聖王后]에 대하여

 

1692년[숙종 18]∼1757년[영조 33]. 조선 제21대왕 영조의 원비[元妃].

본관은 대구[大丘]. 달성부원군[達城府院君] 서종제[徐宗悌]의 딸이다.

 

1704년[숙종 30] 숙종의 제4왕자인 연잉군[延礽君]과 가례를 올려 달성군부인에 봉해지고,

1721년[경종 1] 경종이 몸이 약하고 후사가 없어, 연잉군이 세제[世弟]로 책봉되자 동시에 세제빈에 봉해졌으며,

1724년 영조의 즉위에 따라 왕비에 진봉되었다.

 

1740년[영조 16] 혜경[惠敬]이라는 존호가 올려진 뒤 생전에 장신[莊愼]‧강선[康宣] 등이 덧붙여졌고,

죽은 뒤 1772년 공익[恭翼]이 추존되고, 인휘[仁徽]‧소헌[昭獻]이 추상되어 혜경장신강선공익인휘소헌이라는 존호를 가지게 되었으며,

1778년[정조 2] 휘호로 단목장화[端穆章和]가 올려졌다.

 

※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장명등.혼유석 을 보면 정갈하게 잘 다듬어져 깔금함을 주는 느낌이다.

 


 

. 능상을 보하기 위해 지대석. 난간석. 병풍석. 들도 그 모양을 갖추고 있다. 

특이 한것중 지대석에 글씨가 있다. 능주위를 따라 돌아가면서 보니 12 지간 인듯하다.  

 


 

. 혼유석[魂遊石] 받치고 있는 고석[鼓石]을 보면 손잡이 모양을 한것 또한 특이한점이다.

다른 왕릉에서는 볼수 없었다.

 


 

. 장명등[長明燈]

 

사각형 모양을 갖추고 있다. 그렇다면

숙종왕 보다 늦은 시대의 능이라는 것을 알수 있을것이다.

[칠이의 나름 연대 구별법]

 


 

. 명릉 만큼이나 문인석. 무인석의 표정은 밝아 보이지는 않으나 엄습해 보이기는 하다. 

 


 

. 홍릉 정면에서 정자각을 내려다 본다 앞이 확트인것이 특색이 있다.

 


 

. 지대석 모양은 다른곳보다 또렷하게 보인다.

 


 

. 능 을 이곳으로 올라갔으며 돌아보고 다시 내려 온다.

내려 오면서 전경을 담아 보았습니다

 


 

. 비각 뒤로 내려오면서 다시 릉을 올려다 본다. 비각 뒷면입니다..

 


 

. 산신석[山神石] 정자각 오른쪽편에 있으며.

왕릉 조성 이전 산을 지키던 산신에게 왕릉으로 산을 해친 미안한 마음을 제사지낸 곳.

산신 사상 이라는 우리 고유의 민간 신앙까지 조선 왕릉에 어우려져 있다.

조선 왕릉은 선조를 기리는 유교의 효 사상과 불교, 도교, 민간 신앙 등

수천 년 전통 사상과 철학이 한데 집적된 결정체인 것이다.

 


 

. 정자각 뒤면 신도가 조금 보이며.. 저 앞쪽으로 산신석도 있다. 

 


 

. 망료위[望燎位]

능에서 임금이 제사(祭祀)를 지내고 축문[祝文]을 태우던 곳

 

관세위[盥洗位]

제향[祭享] 때 여러 제관[祭官,집사관]이 손을 씻도록 마련한 곳

또한 반대편 으로는 이런곳도 있었다는대 어디든 찾아 볼수가 없으며 아마도 정자각 내부에 놓았던것 같다..

 


 

. 정자각 앞에서 참도와 홍살문을 바라 본다.

 


 

. 다시 돌아 정자각을 바라 본다.신도와 어도가 확실히 불리되 있다.

 


 

. 돌아서 나와 다시 본사진 여러 관람객 들이 많이들 들려 관람후 돌아 간다..

왕릉을 들러 보면 어떤 설명 안내문 외에는 없어 아쉬운 부분이 많은것을 정리 하면서 느낄수 있었다.

지금 다시 방문 한다면 이런 중요성 이라든가 특이한것 들을 집중 포스팅 할수 있을것 같다.. 

다시 한번더 가야 할것 같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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