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마당에서본 생가 대문 잘 정비되어 있었다.
이건창[李建昌, 1852년~1898년]은 조선의 문장가이며 양명학자이다.
강화학파로 분류된다. 자는 봉조이며 호는 영재이다.
어려서부터 사서오경에 정통하였으며 15세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1874년 서장관으로 청에 가서 그 곳의 문장가인 황각 등과 교제하며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이듬해 충청우도의 암행어사·해주 감찰사 등을 지냈다.
곧은 성격으로 유배를 세 번이나 간 뒤, 강화도로 낙향했다.
그가 지은 《당의통략》에는 당쟁이 일어난 원인과 그 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당쟁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에서 자결한 할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철저하게 서양인들을 미워하였다.
그로 인하여 크게 영달하지 못하였다. 저서로 《명미당집》이 있다.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에 이건창생가가 있다

△. 이건창 생가 안내문 [기념물 제30호]
○ 소재지 : 인천 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167-3
이건창[李建昌, 1852년~1898년]은
조선시대 문신이자 대문장가로 충청우도 암행어사 해주 감찰사 등을 지내면서
관리들의 비행을 단속하고 백성들의 구휼에 힘썼다.
저서로는 당의통략[黨議通略]이 있는대 이는 파당과 족친을 초월하여
공정한 입장에서 당쟁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기술한 명서이다.
생가는 자연석 담장으로 둘러진 "ㄱ"자형 평면을 가진
전형적인 중부지방의 안가 형태로1996년 정비되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명미당[明美堂] 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묘소는 양도면 건평리에 소재한다.


△. 대청 마루에 보면 명미당[明美堂] 현판이 있다.
현판 글씨는 이건창 친우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의 쓴 글씨다.
또한 이건창의 호는 영재 또는 명미당 으로 불린다.

△. 앞 뜰에 향나무 우물 "ㄱ"자형 서남향 전형적인 중부지방의 가옥형태가 고향집에 온듯해 보인다.

△. 마당 한컨에서 우물과 함께 안방 부엌과 건너방 아궁이가
이응으로 지붕을 개량해 놓은것이 보기 좋습니다.

△. 건너방 뒤로 돌아 아궁이도 보이며 뒤 뜰에는 굴뚝이
안방것과 2개 만들어진 모습 고향에서 옛모습이 생각이납니다.

△. 추녀 밑을 바라 보니 옛날 고향 생각이 나게 하는군요..

△. 건너방 을 봅니다.문화재 보호를 위해 소화기 비치
또항 이곳은 CCTV설치하여 시시각각 녹화를 하고 있습니다.
서로 문화재 보존을 위해 노력 했으면 합니다.

△. 울타리[담장] 넘어로본 주의 풍경 좌축에도 우축에도 묘지가 있다.
좌축 산 오를목에는 정승묘가 있으며 우축에도 최근에 다시 모신 흔적이 있는 명가집들의 정승묘들이다.

△. 뒤뜰 밖으로 나가 고가의 위치를 한번 봅니다.
좌측에 보시면 검정색 비 있는곳에는 해수면 지적도 표지석도 있다.

△. 울타리 [담장] 넘어로 들어다 보며 우축에는 대문칸인 사랑방이 있고
안반.건너방. 아늑한 가옥 고향 같은 느낌이 들었으며
이곳을 찾게된것은 마니산 산행을 하기 위해 매번 지나면서 이정표만 보고 지나던 곳을
이번엔 마음먹고 찾게 되었으며 이곳을 들어오는 사기리 같은마을 입구에 있는 탱자나무 천연기념물도 함께
보기 위해 들러 본것입니다. ... 다음에는 탱자 나무도......[2012.01.22...다녀옴]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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