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소요산역"이 요즘 많이 늘어난 등산객으로 인해 많이 이용하는 역으로 변한듯해 보입니다..
전철 도착 하면 등산복 차림에 가방매고 나오는 사람들이 약80%가 넘어 보이며 지역 발전에 기여 하는듯해 보입니다.

△. 드물게 보이는 역사 한켠에는 소요산 등산로 안내표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터군요 오늘일정 점검하기 위해서....... [쇠둔치 마을이 있습니다]

△. "홍덕문 선생 추모비" 옆으로 바로 올라가는 코스가 있으며 이곳을 올라가면 입장료 없으며
산림욕 길이라는 안내 표지도 있습니다. 산행 입장.. [10:30]
○ 홍덕문 선생 추모비
홍병준은 구한말의 애국지사로 자는 덕문(德文),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복영(福永)의 아들로 고종 1년(1864) 10월 1일 걸산동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1919년 음력 2월 25일 동두천 장날 정오에 1천여명의 군중을 인솔하고,
선두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지휘하다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갖은 고문과 악형을 당하였다.
그러나 감옥에서도 만세를 연창하며 백절불굴의 의지를 보였으나 형기를 마치고
돌아온 후 결국 고문과 형독(刑毒)으로 1923년 5월 17일 걸산동 자택에서 타계하였다.
이후 선생의 빛난 얼을 되새겨 의열(義烈)의 감(感)을 후세에 지표로 삼기 위하여
1975년 동두천노인회 주관으로 독립유공자추모회(위원장 김석경)를 결성하여
시민의 성금을 모아 추모비를 세웠다.
또한 1991년 6월 1일 선생의 고귀한 순국 이념과 숭고한 애국 정신을 기리는 뜻으로
김석경이 기탁한 성금으로 동두천 애향동지회 주관으로 비각(碑閣)이 건립되었다.

△. 이곳으로 올라가시면 일주문으로 올라 가는길 입니다.

△. 오늘 들머리 입구에서 역방향으로 내려 보면 먹걸이 골목입죠.

△. 일주문 입구로 조금더 올라 단풍을 담아 봅니다.

△. 들머리 올라서 오르는 모습 숲속길 이랍니다.
이런길을 하백운대 까지 이어져 있으며 중간 부근에는 팔각정도 있습니다.

△. 팔각정 지나 이정표 입니다. 야외 무대 방향은 하산길이다..
정상 방향으로 올라 갑니다..

△. 건너 봉우리는 나한대.의상대.가 한눈에 들어 오며 그곳을 지나 공주봉까지 일주 할것입니다.

△. 하백운대 정상 부근 자재암에서 올라오는 길도이곳에서 합류하여 중백운대로 올라 갑니다. [11:58]

△. 어느 정상이던 이런 안애 표지로 산행의 의미를 더해 줍니다.
시인이 된듯한 느낌으로.....

△. 중백운대 오르기전 하산로가 있다 이정표르 참조 하시면 됩니다.

△. 이정표다 선녀탕이 하산길이며 선녀탕이 자재암 부근입니다.

△.중백운대 지나 나한대로 향하면서 잘루막이 부근 오늘따라 스산한 분위기바람까지 거세게 불어 옵니다

△. 칼바위 능선 여기는 바위조각들이 뽀족한 모습으로 서있어 아마도 그리 불려온듯 합니다. [13:33]

△. 이런 바위들 모습들로 인해 칼바위능선 이란 이름이 붙여진듯해 보입니다.

△. 나한대 오르는 등로 음지이며 오늘따라 바람이 차게만 느껴지는것이
힘들게만 하며.... 아마도 첫 추위라서 그럴것입니다.

△. 희미하게 보이는 산이 명성산 인듯합니다.

△. 가운대 희마하게 보이는산 고대산 가깝게 느겨진다.

△. 나한대 안내 표시판
고승들이 많이 들러 수행 하여 다는 봉우리 랍니다.

△. 나한대 정상 부근에서 동료들....

△. 의상대에서 멀리 전곡 시내를 조망권이 너무 좋습니다

△. 의상대 정상의 모습입죠..
많은 등산객들 때문에 조금 복잡해 인증사진만 남기고 바로 공주봉으로 향합니다. [14:21]

△. 공주봉 정상의 모습 소요산에서의 조망권이 제일 좋은곳이며..
소요산 에서는 이곳을 올라야 동두천을 조망 할수 있는 좋은 코스 입니다.

△. 공주봉 전망대 휴식을 취하는 함께한 동료들.... 잠시 휴식 하며 인원 파악..

△. 공주봉 전망대에서 동두천 시내를 내려다 봅니다...
오늘따라 햇볕이 포근하게만 느껴지는 것이 아마도 첫추위 라서 그리 느껴집니다

△. 공주봉의 안내표지
요석공주의 사랑 이야기가 있어서 인가 포근함을 더합니다.

△. 공주봉 전망대
저 멀리 보이는 왕방산도 마루금이 아름답게 그자테가 한눈에 보입니다. [14:55]

△. 공주봉에 돌탑입니다... 뒤로는 전망대..
이잰 소요산도 뒤로 하며 하산 합니다.여기서는 "구절터"라는 이정표 보고 하산 하면 됩니다.

△. 함께한 동료들이다.....
이쪽 하산로는 돌덩이들이 산재해 있어 조심 조심 하셔야 하며 옆ㅇ로 만들어져 있는 안내줄도
소용이 없는듯해 보입니다. 너무 위험한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 이런 돌탑은 지나는 산객들이 정성을 모아 놓은 돌탑들...
"기도터"라는 안내표지 있는곳에는 마음의 안식을 위해 이렇게 작은 돌탑들로
마음속 기도를 한듯해 보입니다. 많이 있습니다.

△. 조금더 하산 하여 "구절터"라는 곳에 도착 하면 누군가가 아주 높은 돌탑이 정성스럽게
쌓여있으며 그앞에 놓여진 동자승 아릅답습니다......

△. 옛 절터 부근에는 누구의 정성인듯 지금도 작업하고 있는 돌탑도 있고
주위에 많이도 쌓아 놓았더군요..

△. 구절터 여상치 않은 자리로 보였으며 이곳에 있던 절이?????
아마도 위치를 알수 없다던 요석공주 궁터 인듯해 보이기도 하며 많은 의문이 들게 하는 절터
궁금해 지기만 합니다. [15:30]

△. 샘터골에서 내려 오는길...
여기는 의상대지나 공주봉 오르기전에 샘터라는 이정표를 따라 하산 하시면
이곳을 내려와 "구절터"에서 합류 합니다. 참고 하시길...

△. 원효대사가 수행 하였다는 굴 "원효굴"
소요산 관광지 입구에서 계곡을 따라 800m쯤 올라가면 좌측에 층암절벽 사이로 힘차게 내려뿜는
물기둥이 벽공을 찌르는 듯 우뚝한데 폭포아래에서 피어나는 물보라는 환상적인 전경을 자아낸다..
옛날 원효대사가 폭포 우측 원효대에 앉아 고행수도 했다는 전설이 있어 예부터 이 폭포를 원효폭포라고 부른다.
이 폭포 옆으로 원효굴이라는 작은 굴이 있는데 굴 안에는 석조약사여래불상을 조성하여 모셨다.

△. 원효폭포와 원효굴
아마도 이곳에 "원효굴"이 있으며 그곳옆에서
흐르는 폭포라 이름이 "원효폭포"라 이름이 지어진듯해 보입니다. [15:37]

△. 자재암 일주문 다른때와 달리 바람에 날려 딩굴러 다니는 단풍잎....
많이도 쌓여있더군요 그색갈 또한 아깝 더군요..

△. 이곳은 소요산에서 자랑하는 단풍터널 지대입니다.
초겨울 같은 날씨에 그래도 보기 좋은색으로 만추.....를 보여 줍니다.

△. 만추.. 이런말이 잘 어울어지는지는 모르겠으나
아직 까지도 남아 있으면서 붉은색을 내며 남아 있는 단풍 저녁했살에 그자테는 아름답더 이다..

△. 요석공주 공원길.... 오늘 산행은즐거웠던것 같습니다..
좌측으로 보이는 "요석공주 별궁지" 란 표지석이 있으나 별궁지는
이곳에서도 정확한 위치를 알수 없다고 하였다 궁금해 지기만 합니다. [13:50]
○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 와 요석공주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617-686)의 부인이었던 요석공주(瑤石公主),
요석공주는 신라 제 29대 왕, 무열왕의 딸로서 일찌기 홀로된 몸으로 요석궁에 머물러 있었다.
이 때 약 30대 나이의 원효라는 스님이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아 다니면서
"그 누가 자루없는 도끼를 내게 빌려쥈는가? 나는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라"
는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당신 임금이었던 태종 무열왕이 이 노래를 듣고는 '이 스님이 필경 귀부인을 얻어서 귀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하면서 요석궁에 홀로
있는 요석공주와 짝을 이루게 하여 훗 날~~ 대유학자가 된 설총을 낳았다는 것이다.
○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원효대사의 속세의 성은 설씨로, 압량군 남쪽 불지촌의 율곡 사라수 밑에서 태어났다.
불지촌이란 마을 이름으로서 살지촌이라고도 하며, 사라수(娑羅樹)라는 나무에는 이런 유래가 있다.
원래 원효의 집은 율곡의 서남쪽에 있었는데, 그 어머니가 만삭의 몸으로 마침 율곡의 밤나무 아래
를 지나던 길에 갑자기 진통이 와서 해산을 하게 됐다. 너무 급해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게 되자
할 수 없이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어좋고 거기서 해산 구완을 했다.
그래서 그 밤나무를 사라수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 나무는 열매가 보통 것과 달리 아주 특이해서
지금도 그것을 사라율이라 부른다.
옛날 옛적에 어떤 절의 주지가 그 절의 노비들에게 하루 저녁 끼니로 한 사람 앞에 밤 두 톨씩을
나눠주곤 했다. 노비들은 불만이 쌓여서 마침내 관가에 주지를 고발했다.
관리는 이 말을 듣고, 주지스님이 그렇게 야박스럽게 굴 수가 있나 하고 밤을 가져다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밤하나가 그릇 하나에 꽉 찰 만큼 엄청나게 컸다. 관리는 이것을 보고 앞으로는 노비
한사람에게 밤 한 톨씩만 주라고 판결은 내렸다. 그때부터 그 밤나무가 있는 골짜기를 율곡이라
부르게 되었다.
원효는 출가하고 나서 자기 집을 절로 만들고 이름을 초개사라 했다. 또 자신이 태어난 그 밤나무
옆에도 절을 지어 사라사라 일컬었다.
원효의 어렸을 때 이름은 서당인데 집에서는 보통 신당이라고 불렀다.
그 어머니가 원효를 밸 때 별똥별이 품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으며,
해산할 때는 오색구름이 땅을 뒤덮었다. 그때가 바로 진평왕 39년(617)이었다.
그는 날 때부터 남달리 영리해서 스승이 없이 혼자서 독학으로 공부했다. 그의 행적은 당나라
『승전』과『전기』에 자세히 실려 있으므로 여기서는 우리나라 전기에 실린 한 특이한 일만
기록하기로 한다.
원효의 이름이 이미 신라에 널리 알려졌을 때의 일이다. 어느날, 원효가 아침부터 미친 사람처럼
거리를 쏘다니며 큰 소리로 이런 노래를 불러댔다.
누가 내게 자루빠진 도끼를 빌려주려나.
내가 하늘 받칠 기둥을 찍어내리라.
사람들은 원체 이상한 행동을 잘 하는 원효대사가 이번엔 또 무슨 바람이 불어 이러나 하면서도
그 노래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런데 태종 무열왕이 대궐에서 이 노래를 듣고는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스님이 쉬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고 싶은 모양이구나. 그런 분의 자식이라면 영특할 것은
틀림없고, 나라에 훌륭한 인재가 생기면 그보다 좋은 일이 없지."
마땅한 여자가 없을까 궁리하던 무열왕은 마침 요석궁에서 혼자 살고 있는 공주를 떠올렸다.
무열왕은 됐다 싶어서, 즉시 원효를 찾아 요석궁으로 안내하게 했다.
관리들이 원효를 찾아나섰을 때, 원효는 이미 일이 그렇게 될 줄 알고 먼저 문천교 다리로 나가
기다렸다.
저 편에서 관리들의 모습이 보이자 원효는 모르는 척하고 다리를 건너오다가 일부러 발을 헛딛고
물에 빠졌다. 관리들은 허겁지겁 원효를 건져내서 요석궁으로 데려갔다. 원효는 젖은 옷을 말린다는
핑계를 대고 옷을 벗고 궁에서 머물렀다. 요석공주는 처음엔 어이가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스님답지
않은 자유분방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하여 둘은 함께 밤을 보냈다.
열 달 만에 요석공주가 아이를 낳으니 그가 바로 설총(薛聰)이다. 설총은 나면서부터 어찌나
총명하던지 어릴 때 이미 유학과 역사에 통달했다. 그는 이두문자(吏讀文字)를 만들어서 그때까지
중국어로만 통하던 중국과 우리나라의 문물을 우리 식으로 표현할수 있게끔 했다. 이런 공적 때문에
설총은 흔히 신라를 대표하는 열 사람의 현인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원효대사는 파계해서 설총을 낳은 후로는 가사장삼을 벗고 속세 사람들이 입는 옷을 입고 다니며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 했다.
어느 날 우연히 그는 광대들이 춤출 때 쓰는 커다란 뒤웅박을 얻었다. 이리저리 살펴보던 그는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그 모양을 본따서 기구를 만들고 화엄경의 '일체 막힌 데가 없는 사람은 한 길로 생사의 길에서
벗어난다.'는 구절을 따라 그 악기의 이름을 '무애(無碍)'라고 지었다. 그리고 거기에 해당하는
「무애가」라는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원효는 이 기구를 들고 방방곡곡 수많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노래와 춤으로 사람들을 교화했다.
쉬운 노래와 춤으로 어려운 교리를 설명하는 원효의 독특한 방법 때문에 승려들 가운데는 눈살을
찌푸리는 이도 많았다. 하지만, 실상 산골 오두막의 목동들까지도 부처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된 것은 그가 아니었으면 될 수 없는 일이었다.
스스로가 붙인 원효(元曉)라는 법명은 부처님의 세상을 처음으로 빛나게 한다는 뜻으로,
원래 우리 말의 '해가 돋는다'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원효가 이룬 업적을 생각할 때 참으로
그 이름대로 임을 알 수 있다.
원효는 이처럼 대중들에게 널리 부처의 가르침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화엄경』과『금강삼매경』
에 대한 해설을 써서 후세에 길이 도움이 되게 했다.
원효대사가 입적하자 아들 설총은 유해를 화장한 뒤 그 가루로 살아계실 때의 모습을 조각하여
분황사에 모셔 놓고 일생 동안 아버지에 대한 존경의 뜻을 표했다.
그런데 하루는 설총이 아버지의 소상(塑像)옆에서 절을 하는데 그 상이 갑자기 돌아다보았다.
그때부터 소상은 돌아본 채로 있다고 한다.

△. 산행 종료후에 뒷풀이로 빈대떡과 막걸리로 피로 풀고는 삶의 이야기 나누고 나니 취기에 즐거워 하는
친구들 하루의 해넘이 그냥 보내기 아쉬워하며 소요산 에서의 금년 마지막 만추를 느끼기 위해
만세 삼창으로 하루를 마무리 합니다... [소요산 주차장에서...]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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