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 서출지 [慶州 書出池]
신라 소지왕 10년[488]에 왕이 남산 기슭에 있던 "천천정" 이라는 정자로 가고 있을 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쫓아 가보라’
하니 괴이하게 여겨 신하를 시켜 따라 가보게 하였다. 그러나 신하는 이 못에 와서
두 마리의 돼지가 싸우는 것에 정신이 팔려 까마귀가 간 곳을 잃어버리고 헤매던 중
못 가운데서 한 노인이 나타나 봉투를 건네줘 왕에게 그것을 올렸다.
왕은 봉투 속에 있는 내용에 따라 궁에 돌아와 화살로 거문고집을 쏘게 하니,
왕실에서 향을 올리던 중과 궁주가 흉계를 꾸미고 있다가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 못에서 글이 나와 계략을 막았다 하여 이름을 서출지[書出池]라 하고,
정월 보름날은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을 준비해 까마귀에게 제사지내는
풍속이 생겨났다.
조선 현종 5년[1664]에 임적 이라는 사람이 못가에 건물을 지어 글을 읽고 경치를
즐겼다고 한다. 지금 이 건물은 연못 서북쪽에 소박하면서 우아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사적 제138호
※[서출지 → 경주 서출지]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출처 : 문화재청 에서
사금갑설화 [射琴匣說話]
신라 소지왕 또는 비처왕이 못 속에서 나온 노인의 편지 때문에 죽을 위기를 넘겼다는
내용의 설화. 신이담(神異譚)에 속하며, 소지왕에 관한 인물전설이면서,
경주시 남산동에 있는 서출지(書出池)라는 못의 지명전설이기도 하다.
≪삼국유사≫ 기이(紀異) 제1 사금갑조에 실려 있다.
‘서출지"·"둘 죽이고 하나 살리기"·"오곡밥 먹는 유래’라는 제목이 붙기도 한다.
현재 경주시 일대에서 구전되고 있으나, 보고된 자료는 많지 않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소지왕 10년(488) 정월 보름에 왕이 천천정(天泉亭)으로 행차하였다가 쥐가 사람의
말로 까마귀를 따라가라 하여, 기사(騎士)를 시켜 까마귀를 따라가게 하였다.
기사는 도중에서 돼지 싸움을 구경하다가 까마귀의 행방을 놓쳐 버렸다.
이 때 못 가운데에서 한 노인이 나와 글을 쓴 봉투를 주기에 받아 보니, 겉봉에
“열어 보면 두 사람이 죽고 안 열어 보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기사가 이상히 여겨 그 봉투를 왕에게 바쳤더니, 왕은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서 열어 보지 않으려 하였으나, 일관(日官 : 길일을 가리는 일을 맡아보는
벼슬아치)이 “두 사람은 보통 사람이고 한 사람은 임금을 가리키는 것이니 열어
보셔야 합니다.” 하고 아뢰므로 왕이 봉투를 열어 보니
“거문고갑[琴匣]을 쏘라.”고 쓰여 있었다.
이에 왕이 활로 거문고갑을 쏘았는데 그 안에는 왕비와 정을 통하던 중이 있었다.
그 중은 장차 왕을 해치려고 숨어 있던 차였다. 왕은 중과 왕비를 함께 처형하였다.
이러한 일로 하여 매년 정월 상해일(上亥日)·상자일(上子日)·상오일(上午日)에는
모든 일을 삼가고 행동을 조심하며, 정월 보름을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으로
까마귀에게 공양하는 풍속이 생겼으며, 그 못을 서출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구전설화에서는 소지왕 대신 중국의 왕이나 막연한 왕이 등장하는데,
이 경우에는 못에서 나온 노인이나 간통하던 중이 없거나 그 구실이 희미하게 된다.
그래서 종교적 사상 간의 갈등이라는 의미가 약화되고 까마귀를 기리기 위하여
오곡밥을 먹게 되었다는 유래담의 성격이 강화되었다.
한편, 점쟁이가 보통 사람에게 닥친 비슷한 위기를 해결해 주었다는 이야기는
개인의 행운과 불운에 국한되어, 나라의 운수를 다룬 ≪삼국유사≫의 설화에 비하여,
그 의미의 폭이 좁아졌다.
이 설화에서 중요한 요소인 수수께끼는 그 해결과는 상관없이 사람이 죽게 되어 있는
‘목수수께끼’의 일종이며, 일관이 풀었다는 것은 그 수수께끼가 사회적·국가적 문제를
해결하는 제의적 기능(祭儀的機能)을 지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소지왕이 두 명을 죽이기까지의 과정에 관한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으며, 풍속과 지명의 유래를 설명한 뒷부분은 나중에 덧붙여진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설화에 나타난 왕은 초월적 존재로부터 보호되는 신성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자기에게 닥친 위기를 모를 뿐만 아니라 노옹의 계시가 뜻하는 바를 알지 못하는
존재여서 양면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신이(神異)한 능력을 갖추고 건국신화에 등장하던 왕의 모습이 약화되어,
신의 능력과 인간의 능력을 분리시켜 인식하는 역사적 단계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528년(법흥왕 15) 이전에 일어난 토착 신앙과
외래 신앙 사이의 갈등 양상이 나타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러므로 이 설화는 당시 왕실과 불승(佛僧)의 관계, 왕에 대한 백성의 인식,
민속적 사실 등을 연구하는 데 있어 참고가 될 만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三國遺事
新增東國輿地勝覽
韓國民間傳說集(崔常壽, 通文館, 1958)
新羅의 傳說集(尹京烈, 慶州市, 1980)
韓國口碑文學大系(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0∼1988)
삼국시대설화의 문학적 해석(조동일, 傳統과 思想 Ⅰ,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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