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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6】지형지물을 잘 이용한 군사적인 요충지 남한산성은 선조들의 지혜가...②

순도리(칠이) 2014. 12. 2. 06:00


▣ 남한산성 연주봉 옹성[連珠峰 甕城]



 

    ○ 남한산성 [南漢山城] 역사적 변천 남한산성이 백제 온조왕 때 도성이었다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발굴조사 결과 백제 주거지 2곳과 저장 구덩이 8곳 등이 확인되었을 뿐 성곽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오히려『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한산주[漢山州]에 주장성[혹은 日長城]을 쌓았는데, 성의 둘레는 3,460보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장성은 곧 남한산성이고, 당시 돌로 쌓은 최대 규모의 산성이었다. 2005년에 북문과 동장대 사이의 제4암문과 수구[水口]터 주변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조선시대 성벽 안쪽에서 주장성 성벽으로 추정되는 성벽이 확인되어, 조선시대 남한산성이 신라 주장성의 옛터를 따라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행궁터 발굴 조사에서는 대규모 건물터가 확인되어, 주장성 당시 성 안에 무기고[武器庫] 등 중요한 건물들이 자리하였음도 밝혀졌다. 남한산성에 대한 고려시대 기록은 광주부사를 지낸 이세화묘지명[李世華墓誌銘]이나『고려사[高麗史]』에 몽고군이 침입하였을 때 “광주성[廣州城]”으로 피하여 항전하였다는 것 등이 전한다. 산성 안에서 고려시대 건물터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광주성은 바로 남한산성으로 추정된다. 한편『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일장산성이라고 기록되었는데, 둘레가 3,993보이고 성 안에는 군자고[軍資庫]가 있으며 우물 7곳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며, 성 안의 논밭이 124결[結]이나 된다고 하였다. 이 기록 역시 신라 때 축성된 주장성, 일장성이 그대로 이어져 온 것으로 보인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서 후금[後金]의 위협을 받고 이괄[李适]의 난을 겪은 뒤 인조 2년[1624]에 지금처럼 다시 고쳐 쌓았다. 곧 인조는 총융사 이서[李曙, 1580∼1637]에게 산성의 축성을 명령하였고, 2년 뒤에 둘레 6,297보, 여장[女墻] 1,897개, 옹성[甕城] 3개, 성랑[城廊] 115개, 문 4곳, 암문[暗門] 16곳, 우물 80곳, 샘 45곳 등을 설치하고서 광주읍의 치소[治所]를 산성 안으로 옮겼다. 축성 공사에는 각성[覺性]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아 전국 8도의 승군을 동원하였는데, 승군의 사역과 보호를 위하여 현재 남아 있는 장경사[長慶寺]를 비롯한 7곳의 사찰을 새로 건립하기도 하였다.『남한지[南漢志]』에는 원성 성벽의 안쪽 둘레는 6,290보로 17리 반이고, 바깥 둘레는 7,295보로 20리 95보이며, 성가퀴는 1940타, 5곳의 옹성과 16곳의 암문, 125곳의 군포, 4곳의 장대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뒤 순조 때까지 여러 시설이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가장 시설이 잘 완비된 산성으로 손꼽힌다. ※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수어장대지나 서문[우익문]을 향하는 길에는 소나무들이 무성한 내리막길로

여유를 부릴수잇는 길로써 피톤치드를 그윽한 향을 느길수 있기도합니다..아마도 이런 길들이 많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접근성도 좋아 찾는것 같습니다.. 

 

 

 

 

. 지나던길에 성고가을 넘어 조망을 하게 됩니다.

이곳은 남한산성 중에 우익문[서문] 즉 서쪽에 위치한 문으로서 멀리 희미하게 남산이 보이지만

가까이는 잠실에 위치하 제2롯대월드 건물이 유난히 눈에 띤다.

 

다음으로 지나던 길에 우축 성안으로 보이는 휴식처 잠시 올라 병암남선신수비 를 살펴본다. 

 

 

 

 

. 병암남성 신수비[屛岩南城新修碑]

병암남성 신수비는 정조3년 6월 18일부터 약 50여 일간에 걸쳐 수어사 서명웅이 짓고,

광주부윤 이명중이 쓴 것이다. 산성리 산 18번지에 병암의 표석이 남아 있다.

 

 

 

 

 

. 병암남성 신수비[屛岩南城 新修碑]

 

정조3년[1779] 6월 18일부터 약 50여 일간에 걸쳐 수어사 서명응의 지휘아래 남한산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한 사실을 전해주고 있는 금석문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산성을 증, 개측하는데 돈1만냥과 쌀 900석의 재정을 투입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당시 감독관인 광주부윤 이명중의 지휘아래 벽돌, 석회 등을 구어 운반하는 관리와 보수할 곳을 18구역으로 나누어

담당한 18패장의 이름을 적어 놓은 것으로 보아 선조들의 건축실명제의 한단면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금석문입니다.

정조는 즉위 후 영릉을 참배하는 길에 자주 남한산성에 행차하여 산성의 관리실태와 주민들의 생활상 등 민의를 살핀

개혁군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동문밖에 있는 기해주필이 그 사실을 잘 반증해 주고 있습니다.

이 비문은 당시 수어사였던 서명응이 짓고, 광주부윤 이명중이 쓴 것입니다.

 

위 탁본은 사진에 나타나진 않았으나 좌축으로 또 하나 있습니다.

 

 

 

 

 

. 병암[屛岩]

수어장대에서 서문방향으로 약 200m 길 우측에 두 개의 돌에 새겨져 있다.

여기에 정조3년 남성신수기비문이 있어 특히 유명하다.

이 바위 우측에병암 이민하 십세기미서[屛岩 李民夏 十歲己未書]라는 글귀가 있는 것으로 보아

“병암[屛岩]”의 글씨는 이민하가 10세 때에 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이렇게 내림길을 지나면서 앞으로 보이는 성문이 우익문으로서

이쪽 방향으로 올라오는 사람들도 많으나 우리는 내려가면서 사진 남긴다.. 오늘은 유난히 사진 담기가 어려워 좀 아쉽다. 

 

 

 

 

. 우익문(서문)[右翼門, 西門] 사적 제57호

서문은 산성의 북동쪽 모서리 부분의 해발 450m 지점에 위치하며 개구부와 문루로 구성 되어있다,

개구부는 내외면이 반원형의 홍예식이다. 외면 홍예 안쪽에는 2짝의 목재판문을 설치하였다.

판문의 문짝에는 방형 철엽을 서로 겹치도록 부착하였다. 대문을 지탱하는 문지두리는 석재로 위, 아레에서

지탱하도록 되어있고, 양측벽에는 장군목을 끼워 빗장을 지를 수 있도록 장방형 홈을 파놓았다.

서쪽 사면의 경사가 급해 이 곳에서 물자를 이송하기는 어렵지만 관나루나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길이다.

 

서문은 산성의 초축시기 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정조3년 개축하여 우익문[右翼門]이라 칭하였다.

 

 

 

 

 

. 이정표 잘 되있으나 일괄성이 떨어지는것 같아 보이기도 하다.

이정표상은 수어장대 0.6km 지점이며 북문인 전승문까지는 1km 지점입니다..

이정표 확인하고 서문을 빠져 나가 봅니다. 왜냐하면 전망대가 설치 되어 있습니다. 

 

 

 

 

 

. 서문[우익문]을 빠져 나와 이정표를 인증 합니다.

이쪽 방향으로 내려가면 위례 신도시로 내려 가는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축으로 약100m쯤 올라가면 전망대 잇으나 워낙의 사람들이 많아 사진 남기지 못하고

돌아서 다시 서문을 빠져 나갑니다. 

 

 

 

 

 

. 전망대 가던길에 박주가리 씨방이 있어 체취하여

홀씨를 날려 봅니다. 오늘의 하이라이트가 되었지요 많은 사람들이 날아가는 홀씨를 바라보고는

사진들 담는다고들 인기 얻었습니다.. 

 

 

 

 

 

. 전망대에서는 서울 남산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관악산과 청계산,

오른쪽으로 아차산과 도봉산이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삼전도 앞 들판은 아파트를 비롯한 고층빌딩들이 메우고 있다.

서울 송파구를 중심으로 강남 일대와 멀리 하남시가 아득하게 내려다보이는 전망대는 야경이 아름다운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잠시 들러보고는 다시 뒤돌아 서문을 나온다.

 

 

 

 

. 전망대에서 다시 서문으로 들어와 성곽을 따라 300m쯤 걸으면

남한산성의 옹성중 가장 아름다운 연주봉옹성으로 갈수있는 제5암문을 만난다.

 

 

 

 

. 제5암문[暗門] 연주봉옹성 암문

암문은 적의 판촉이 어려운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통로 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수 있는

시설도 설치 하지않았다. 이 암문은 연주봉옹성으로 연결되는 통로로 서쪽에서 성벽에서 2m 정도 돌출된 치가 있고

북쪽으로는 직선길이 150m 정도의 연주봉옹성이 연결된다.

개구부 외부는 홍예식이고 내부는 평거식 이다. 통로의 길이는 5m 정도로 천장은 장대석 5매로 덮여 있다.

 

 

 

 

. 연주봉옹성은 최근에 복원된것으로 보여져 깔끔함을 느끼지만

약간의 의구심을 같어본다. 옹성이라고하면 성밖으로 나가는 것을 말하며 본성에 붙어 뛰어나온 것이라고 알고있는데

낮은 성벽에 전쟁을 치룬것이 의아함을 생각하게 한다. 

 

 

 

 

. 이재 부터는 선조들의 혼을 느끼며 연주봉옹성길을 따라 가본다. 

 

 

 

 

. 멀리 희미하게 보이지만 높은곳이 옹성의 최고높은 부분으로

저곳에는 대포 포구도 있더군요.. 

 

 

 

 

. 본성과 연결된 부분을 뒤돌아 사진 남깁니다.

누구나 남한산성을 찾게 되면 이곳은 한번 가보는 것도 아주 좋은듯 합니다.

옹성의 의미랄가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도 되는것 같습니다. 

 

 

 

 

. 이젠 높은곳에 도착 하게 됩니다..

앞에 보이는 전망 할수있는 전망대 설치된 부분이 옹성의 최고봉입니다. 

 

 

 

 

. 높은곳에 올라바라보면 북쪽 방향으로 바라보게 되는데

남한산성은 역사를 살펴보면 청나라 이야기가 많이 나오게 된다. 그런것을 보게되면

북쪽에 위차한 청나라와의 전쟁 당시라는 것을 느낄수 있게 하는 연주봉옹성 입니다. 

 

 

 

 

 

. 연주봉 옹성[連珠峰 甕城]

옹성은 일반적으로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밖으로 한 겹의 성벽을 더 둘러쌓은 이중의 성벽을 말한다.

그러나 남한산성의 옹성은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하고,

요충지에 대한 거점 확보를 위해 성벽에 덧대어 설치한 시설물로 다른성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남한산성에는 모두5개의 옹성이 있는데, 이옹성은 북서쪽의 요충지인 연주봉을 확보하기 위하여 설치 하였다.

연주봉에서 바라보면 아차산 북쪽과 남양주 일대의 한강이 조망되고, 이성산성과 하남시 춘궁동 일대가 특히 잘 보이며,

성내부의 지역도 관축되는 중요한 요충지이다. 근래의 발굴조사 결과 웅성 끝에서 포대로 추정되는 유구가 확인되어

고증을 통하여 포대를 복원하였다. 연주봉 옹성의 돌레는 315m 이고 전투 시에 성내로 출입할 수 있도록

옹성과 본성 성벽이 만나는 위치에 암문을 설치 하였다.

안내문에서 발취하였습니다 물론 하남시, 남양주 일대 한강이 잘보이면서 적의동태 살피기는 아주좋은 곳이다. 

 

 

 

 

. 연주봉옹성에 오르면 아차산 북쪽과 남양주 일대의 한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특히나 저는 산행을 하다보니 보이는것들 중에 높은 부분 가까이 눈으로 확인이 되는 봉우리는 

“검단산, 예봉산”이보며 덕소도 잘 보이더군요 죄축으로는 미사리도... 

 

 

 

 

. 연주봉옹성에서 뒤돌아 바라본 사진으로써 좌축으로 길게 늘어진 성벽이

북문 방향이며 중앙 좌축으로 잘록한 부분이 동문 있는 방향입니다. 앞으로 저곳까지 이어 갈려 합니다. 

 

 

 

 

. 연주봉옹성 에서는 동장대터와 벌봉으로 향하는 성곽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으로

곡선과 직선을 그리는 성벽은 능선과 하늘의 경계를 따라 멀리 동장대터를 향하다 소나무 숲 속으로 사라진다.

산객들이나 찾는 사람들은 피톤치드를 만끽할수 있는 곳이기도한 남한산성입니다. 

 

 

 

 

. 이젠 옹성을 돌아보고는 소나무 무성한 북문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겨 봅니다.

이쪽 방향으로 내려가면 북문으로 가는 방향이다. 

 

 

 

 

. 제5암문에서 내려온곳으로 이재부터는 북장대터로 가면된다.

한참을 걷다보면 우축으로 안내문 하나 발견 하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북장대터 지금은 터만 남아있으나

설명이 함께 자리하여 알수있는 곳이다. 

 

 

 

 

 

. 이곳 주변으로 북장대터[北將臺址]가 있어 안내문 읽어본다.

장대란 지휘와 관측을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 건물로 남한산성에는 5게의 장대가 있었다.

그중 한곳으로 이곳이 북장대가 있던곳으로 성의 북쪽에 있다 하여 북장대라 불린다.

인조 2년[1924] 남한산성 수축시에 단층누각으로 지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수어청에 소속된 5영 중 중영장을 지휘하던 곳이다. 남한산성의 장대는 18세기 초에 붕괴되었고,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남장대와 서장대는 다시 수축하였으나 북장대와 동장대는 다시 수축하지 않았다.

한봉성과 연주봉웅성의 축성으로 동장대나 북장대는 상징적인 의미만 있을뿐 군사적인 실효성이 없어졌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장대는 남한산성 성안에는 4곳이 있지만 수어장대 많큼이나 가치성이 없어서 그런가

복원이 않되어 있지만 터 자체도 아주 작게 보인다.

 

 

 

 

. 산성 자체는 지형에 맞추어 쌓다보니 그 곡선 자체도

위엄 만큼이나 자테를 뽐내고있내요.

세월이 흘러 소나무와 함께 무성함을 만들어졌겠지만 소나무와 숲을 이룬 성벽도아름답기만 합니다. 

 

 

 

 

. 소나무 숲으로 이루어진 성벽길을 걷다보면

앞에 보이는 고개만 내려서면 전승문[북문]에 도착 하게 된다. 

 

 

 

 

.이잰 북문에 도착 합니다.

전승문이라는 이름을 지었지만 옛날 병자호란 당시의 전패 기록이 남아 있기도한 성문이다.

 

 

 

 

. 북문[北門] 전승문[戰勝門]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북문은 병자호란 당시 성문을 열고나가 기습공격을 감행했던 문이다.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에서“전승문[戰勝門]”이라고 하였다.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의해 군사 300여 명이 북문을 열고 나가 청나라 군을 공격하였으나, 적의 계략에 빠져 전멸하고 말았다.

이를“법화골 전투”라 하는데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였다.

정조3년[1779] 성곽을 개보수할때 성문을 개축하고 이름을 붙여 “전승문[戰勝門]”이라 한 것은 그때의 패전을 잊지 말자는

뜻이였을 것이다. 선조때의 기록을 보면 산성 내에 동문, 남문, 수구문 총3의 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잇는 것으로 보아

북문은 인조2년[1624]에 신축된 성문이라고 생각된다.

 

 

 

 

 

. 이곳에 이정표도 한번 살펴본다.

산성 로타리가 나오는데 오늘 출발로써 관리소 주차장에서는 300m 밖에 않되는 지점이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관리소 부근에서 많이 올라오며 내려가기도 한다.

 

 

 

 

. 여기에는 안내문, 지도, 탐방코그 안내도 잘 되어있습니다.. 

 

 

 

 

. 여기서 다시 지도를 보면서 가야할 탐방코스 정검 합니다.

※ 탐방코스 : 관리소[1.1] → 수어장대[1.1] → 서문[1.6] → 북문[1.1] → 동장대터[0.6]

→ 동문[1.7] → 남문[1.1] → 관리소, 총 8.3km

지도와 함께 이렇게 보면 쉽게 이해 할수 있을것이다.

 

 

 

 

. 이 사진을 남긴것은 설명된 탐방코스 자신의 체력에 맞추어 선택 한다면

남한산성의 역사적인 가치성과 상곽을 이해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것 같아 올렸습니다..

 

남한산성 포스팅 준비 하다보니 물론 다른때와 같지만 많은 사진과 널리 흐트러진 자료들이 너무 많내요.

특히나 이번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아쉬운 부분이 너무 많이 보이기도 합니다.

좀더 관심을 갖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며 부분별로 나름 일기방식 정리하게 됩니다.

암튼 참고만 하시면 좋겠다는 생각해 봅니다..

틀린 부분이있다면 연락 주시면 참고로 고칠것이며 공부를 하게 되는 계기로 삼을 것입니다..

부디 지루함을 느끼게 하였다면 죄송함을 함께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젠 완연한 겨울이 오는것 같습니다. 건강 조심 하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