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limbing[2014]/├ ④ 경상도 권역

▣【2014.08.24】35-6 금오산 도선굴 옆으로 세류폭포 비온뒤에 불수있는 숨은 명소입니다..

순도리(칠이) 2014. 9. 9. 05:30


▣ 구미 금오산 도선굴



 

        ○ 도선굴 [道詵窟] 이 굴은 천연동굴이며 암벽에 뚫린 큰구멍이기에 대혈[大穴]이라고도 했으나, 신라말 풍수의 대가인 도선선사가 득도[得道]했다해서 도선굴이라 한다. 고려 충신 야은[冶隱] 길재[吉再] 선생이 대혈사[大穴寺]와 이 굴아래를 소요[逍遙]하며 도학[道學]에 전념하기도 했으며, 임진왜란 때는 인근 향인[鄕人]들이 난[亂]을 피해 암벽의 틈에 기어 오르는 칡덩굴을 부여잡고 이 굴에 들어와 세류폭포[細流爆布]의 물을 긴막대로 받아 먹으며 피난했으니, 그 연 인원이 100여명에 달 했다고 하며, 현재의 통로는 1937년경 선산군 구미면에서 개통한 것이며 굴 내부는 길이 7.2m, 높이 4.5m, 너비 4.8m 정도 된다. ※ 도선국사[道詵國師, 827 - 898] 통일신라시대 말의 승려로 혜철[惠徹]에게서 무설설무법법[無說說無法法]을 배웠다. 그의 음양지리설, 풍수상지법(風水相地法)은 조선에 이르기까지 민족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끼쳤다. 호는 옥룡자[玉龍子], 요공국사[了空國師], 선각국사[先覺國師], 전남 영암[靈岩] 출생. 15세에 지리산 서봉인 월류봉[月留峰] 화엄사[華嚴寺]에 들어가 승려가 되어 불경을 공부하고, 4년 만인 846년[문성왕 8] 대의[大義]를 통달, 신승[神僧]으로 추앙 받았다. 저서 【도선비기[道詵秘記],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 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등이 전한다.

 

. 금오산 대혜폭포 관람을 마치고는

옆으로 암벽에 자리하고 있는 도선굴을 찾아 갑니다..

 

 

 

 

. 도선굴 오름길 앞에 이런 안내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설명 내용은 도선선사가 득도 하였다는 굴로서 고려 충신 야은 선생도 이곳에 은둔생활을 하였다고 합니다..

 

 

 

 

 

 

 

. 올라가는 길은 아주 위험한 장소에 있다보니

이런 철제 난간을 설치 하여 그곳으로 오를수 있게 만들어 놓았더군요...

 

 

 

 

. 이곳은 1차 올라와서 2차구간으로 도선굴 앞에까지 가는 길목으로

밑으로는 천길 낭떨어지기로 고소공포증을 보여주는 구간이다.

 

 

 

 

. 사진상 우축으로 보이는 높은 봉우리가 금오산 칼다봉입니다. 

 

 

 

 

. 사진상 정면으로 보이는 움푹한 부분은

도선굴이 아니고 도선굴에 운둔생활을 하면서 음료수를 구해 먹었다는

세류폭포로 보여집니다..

지금도 바람에 날리정도로 물이 흐르고 있더군요..

 

 

 

 

. 도선굴 에서 바라본 금오산 관리소 방향으로 멀리는 금오지가 보이며

바로 앞 밑으로는 지붕만이 보이는 도선국사 창건 하였다는 해운사

 

해운사[海雲寺]

 신라 말기에 도선[道詵 827∼898]이 창건하였으며, 창건 당시에는 대혈사[大穴寺]라고 하였다.

고려 말에 길재[吉再 1353∼1419]가 이 절과 절 뒤에 있는 도선굴[道詵窟]에 은거하며 도학[道學]을 익혔다고 한다.

 

 

 

 

. 도선굴에서는 참선을 하던 장소로도 이용되었지만

임진왜란 당시 향민들 500~600명이 피난처로도 사용했었으며 바위틈에 쇠못을 박아 칡넝굴이나 등나무넝굴을 이용하여

오르내렸으며 사진으로보이는 곳이 세류폭포[細流爆布]라 하며 물이 떨어지는 것을 긴막대로 받아 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도 수량이 많이 잇지는 않앗지만 바람에 날리는 정도의 물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 올아오던 방향 철제 난간이 설치 되어있어

누구나 올라올수 있으나 멀리 보이는 효자봉바라보니 아름다운 산아들이 한눈에 들어 오기도 한다.

 

 

 

 

. 금오산은 남숭산으로 불리기도 했다.

고려 때 산의 아름다움과 수백개의 절이 들어선 고귀함으로 중국의 오악[五嶽] 중

으뜸인 숭산에 버금간다 해서 이름 붙여졌다.

 

 

 

 

. 금오산 자락에는 중국 명나라의 건국 시조 주원장이 태어난 전설도 있다.

땡땡이 떠돌이 중 출신인 주원장의 출생지를 확인할 길 없지만 아무튼

금오산의 유명세가 낳은 전설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 고려말 충신 야은 길재 선생의 고향이자 수도처 도선굴은

이미 조선 초 풍수지리의 대가인 무학대사는 금오산의 형국을 보고 임금이 날 산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금오산 남동쪽 기슭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가 있다.

 

 

 

 

. 도선굴 통로 기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천석통로[穿石通路]라는 내용의 도선굴 통로 왼쪽 수직 암벽에 새긴 암각문이고,

다른 하나는 도선굴 내부 돌출된 벽 위에 고정시킨 금오산 굴 통로기[金烏山窟通路記]라는 제목의 직사각형 판석[板石]의 명문[銘文]이다.

도선굴 통로 기문 암각[南通洞 道詵窟 通路 記文 岩刻]은 도선굴 입구 통로 암벽에 새겨져 있고,

금오산 굴 통로기[金烏山窟通路記]는 도선굴 내부의 오른쪽 돌출된 벽 상부에 판석으로 박혀 있다.

 

구미면장 김승동[金昇東]이 1937년 봄 금오산 중턱 절벽 한가운데 위치한 도선굴로 올라가는 통로를 만들고자 뜻을 내니,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찬성하였다. 이에 암벽의 돌을 깎고 쇠줄을 연결해서 굴에 이르는 통로를 만들고,

이 과정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도선굴 통로 기문과 금오산 굴 통로기를 새기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금오산 굴 통로기[金烏山窟通路記]” 인것으로 보여진다.

 

 

 

 

.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라는 시조로 고려 왕조 망국의 한을 노래했던 야은 길재 선생은 

조선 왕조를 오롯이 거부하고 고향 금오산 기슭에서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바로 이곳이 도선굴이였다. 

 

 

 

 

. 야은 길재 선생은 금오산의 도선굴과 대혈사 등지에서

오로지 학문에 매진했으며, 훗날 김숙자, 김종직, 정여창, 김굉필, 조광조로 이어지는 영남학파 사림을 배출했다.

 

 

 

 

. 수직절벽에 자리한 도선굴. 도선선사가 득도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그러나 특별한 종교나 민간신앙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곳에 들면 영험한 기운이 깃들어 있을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된다.

 

 

 

 

. 탁트인 전망에 마음까지 편안함을 느낄수 있는곳에

자리하고 잇는 도선굴은 우름길부터가 어려운 곳이 였으며 다시 내려 갈려 할때도

어려움에 한번 오르면 공부만 할수 밖에 없어 보이는 장소로 보였습니다

 

 

 

 

. 지금이야 이런 설치물로 쉽게 오르며 완래가 쉽게 보였지만

아래로는 낭떨어지기 이런길을 어찌 올랐을까를 생각하게 한다.

 

 

 

 

. 이렇게 난산을 잡고 천천히 오르면 쉽게 오를수 있답니다..

지금 이분들은 케이불카 타고 올라온 관광객들 입니다.

 

 

 

 

.이방향은 대혜폭포 있는 장소를 바라본다.

도선굴을 올라갈려면 폭포 하단부에서 우축으로 암벽 아래로 돌아서면 오름길이 보입니다..

이잰 관람을 마치곤 다시 폭포 하단부로 내려 갑니다,..

 

 

 

 

. 도선굴 올라갈때 보았던 폭포를 다시 보면서

도선굴의 마지막 사진으로 마무리 합니다.. 다시한번 찾아 올때면 도선굴 오르기전에 좌축 암벽에

도선굴 톨로기 암각이 되있다고하며 주변으로는 남순동자상과 관음보살상도 있다고 합니다.,

그곳을 관람 하지 못하고 온것을 후회 하고 있습니다..

다음번에 찾을 때면 꼭 찾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이어질 귀경길 안전 운전 하시며 졸음 운전 피해 주시길 바래 봅니다..

 

 

 

 

9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