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ravelog/⊙ 출사 여행지 ◎【2012.07.29】3.1운동 정신과 반공투쟁 정신이 살아있는 철원 제일감리교회에서... 순도리(칠이) 2012. 8. 4. 01:08 ▣ 철원 제일감리교회 ○ 철원 제일감리교회 북한을 바라보고 한가로운 가운데 늘 긴장감이 감돌았던 철원땅. 그곳엔 근대의 역사유적이 곳곳에 위치하고 있다. 철원 노동당사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는 철원제일감리교회도 그중 한 곳으로 근대문화유산 23호로 지정되어 있다. 철원제일교회는 장로교 선교사인 웰번에 의해 설립되었고 이후 1907년 감리교로 편입된 교회로 현재의 흔적이 남아있는 이곳은 1936년 보리스라는 설계사가 설계한 건물로 3층 러시아풍의 석조건물로 준공되었다. 1년여에 걸쳐 1937년 교회의 봉헌식을 갖게된 교회로 철원지역의 신앙중심지가 된다. 철원애국단을 조직한 박연서목사. 교회가 세워질 당시는 일제강점기의 기간으로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펼쳐지고 있었던시기다. 강원도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으며 가장 먼저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지역이 이곳 철원땅이었다. 대표적으로 1919년 3월의 철원읍 만세운동으로 철원읍교회 박연서목사를 중심으로 교회의 청년들이 가담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항일단체인 "철원애국단"을 조직하기도 한 곳이다. 1939년 철원제일교회로 부임한 강종근목사. 강종근목사는 인근지역의 주민들에게도 존경과 신임을 받고 있어 일본경찰의 요주대상으로 지목되고 있었다. 1940년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사상법 예비 검속령"에 의해 일본경찰에 구속되었고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을 받게 된다. 하지만 모진고문으로 인해 1942년 6월 3일 세브란스 병원에서 눈을 감고만다. △. 1937년 완공당시 모습 사진 한국전쟁으로 피로 물든 철원제일감리교회. 광복후 한국전쟁이 벌어졌다. 철원지방의 기독청년들은 철원제일교회를 중심으로 반공투쟁을 벌였던 장소이기도 하다. 전쟁이 치열하게 진행되던 때엔 인민군들은 교회를 병원처럼 사용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교회의 지하실에서는 철원지역의 양민들을 학살하는 만행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철원제일감리교회는 2002년 근대문화유산 23호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다. 무너져버린 교회가 문화유산으로 보존되고 있는 이유는 이곳이 신앙의 터였기 때문보다는 3.1운동의 역사성을 지니고 한국전쟁당시 기독청년들의 반공투쟁의 산실이기 때문이다. 그 형체는 이미 폐허가 되었으나 오늘도 잊혀져가는 역사를 간직한채 기독인들에게 무언의 의미를 전하고 있는 곳이다. △. 사진상으로 옛 건물을 보면 이계단은 그대 모습처럼 보입니다. 이계단을 올라서면 건물이 보인다. △. 계단을 올라서면서 앞에 나타나는것이 철조망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놓으듯하였다.. 철조망을 넘어 들어가봅니다.. 엣사진을 보면서 기억을해두면 참고 될듯합니다... △. 허물어진 흔적들을 자세히 살펴 보니 일제 강점기대 보다는 6.25사변 당시 충격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여지는 충탄흔적들 여기저기 너져분하다... △. 현관문을 들어서면서 입구로 보이는공간 지금도 타일 같은 모양들이 지금도 남아 있다... △. 건물 뒷부분 기등 부분 인듯하나 아직도 특튼하게 잘 견디고 있군요.,, △. 지금은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철원제일교회는 장로교 선교사인 웰번에 의해 설립되었고 이후 1907년 감리교로 편입된 교회로써 지금의 모습은 이후 건설된 건물이다. △. 1907년에 감리교로 편입된후 현제의 모습으로 남아있는것은 1936보 리스라는 설계사가 설계한 건물로 3층 러시아풍의 석조건물로 준공되었다. △. 1년여에 걸쳐 1937년 교회의 봉헌식을 갖게된 교회로 철원지역의 신앙중심지가 된다. △. 1939년 철원제일교회로 부임한 강종근목사는 인근지역 주민들에게도 존경과 신임을 받고있어 일본경찰의 요주대상으로 지목받게 된다. △. 건물에 어떤 부분 인지는 모르나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조각품이 한쪽에 나둥굴고 있었다. △. 강종근 목사는 1940년 신사참배 거부로하여 사상법 예비 검속령에 의해 일본경찰에 구속되었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고문을 받게된다. △. 강종근 목사는 모진 고문으로 인해 1942년 6월3일 세브란스 병원에서 순직 하셨다고 한다.. △. 일제시대대도 굳건히 지켜낼수있었던것은 담임목사와 지역주민들의 합심으로 감리교에 의한 뜻을 한곳으로 모아진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후로는 6.25사변을 격으면서 철원제이료회를 중심으로 방공투쟁을 벌였던 장소이기도 하다. △. 치열한 전쟁중에는 교회 건물을 병원처럼 사용하기도 하였고. 교회 지하실에서는 철원지역의 양민들을 학살하는 만행이 벌어지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 지금에 철원제일감리교회는 2002년 근대문화유산 제23호로 지정되면서 관리는 물론이고 무너져버린 교회가 문화유산으로 보전되고 있는 이유는 신앙의 터였기 때문보다는 지금까지 알아본 대로.. 3.1운동의 역사성을 지닌 가치성과 한국전애당시 반공투쟁의 산실이였기 때문일것입니다.. △. 그런 지금에 와서는 "철원제일감리교회터"라는 표지를 복원한다는 구실로 이렇게 보관중인 안내표지석 관리되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 표지석뿐이 아니라.. 안내사진 안내판조차도 보이지 않았으며 제가 보기에는 교회터 올라가는 좌축에 풀속에 나둥굴고 있는것 같이 보였습니다.. △. 그렇타고 지금 공사중도 아니였으며 보기에는 기반 기초 공사만 마친 상태로 그대로 방치된것 같이 보였으며 더이상은 공사 진행을 할것 같이 보이지않았습니다... △. 도로변 입구 현판입니다.. 읽어 보겠습니다... 최축으로는 1937년 완공후 청년회 회원들이 교회 현관앞에서 담은 사진이라고 합니다.. 철원 감리교회 소재지 :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 철원 감리교회는 철원지역의 대표적인 기독교화로서 1936년 지하1층, 지상3층으로 건립되었으며, 신도수는 500여명에 달했다. 6.25사변ㅇ로 파괴되어 현재는 그 유지만 남아 있지만 8.15 해방전까지는 선교활동과 육영사업을 계속했고 해방 후 공산치하에서는 이 교회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천년학생들의 반공투쟁이 활발했다 6.25사변 당시는 북한군이 막사로 쓰면서 교회 지하실을 양민과 반공투사들을 고문, 학살하는 만행장소로 사용한 곳이기도 한 이 교회는 2002년 5월 31일 등록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었다. 이런 뼈아픈 흔적들이 많이 있는곳을 지금 공사중인 북원사업 빠른 시일내로 이루어져 다시금 지역주민은 물론이며 투쟁 정신을 이어 받았으면 합니다... 저작자표시 비영리 변경금지 (새창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