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제19대 숙종대왕 과 계비 인현왕후 2계비 인원왕후
◎ 산행장소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지축로 서오릉.
◎ 산행일자 : 2012년 03월 31일 [토요일]

○ 조선 제19대 숙종[肅宗]
19대 숙종[肅宗, 1661년~1720년, 재위 1674년~1720년]
숙종은 1661년 8월 15일 경덕궁 회상전에서 현종과 명성왕후의 원자로 태어났다.
1667년(현종 8) 세자로 책봉되었고, 현종이 승하한 1674년(현종 15)에 즉위하였다.
재위 기간은 46년이었다. 숙종 시대에는 당파 간의 정쟁이 극에 달하여, 붕당정치가
파경을 맞을 위기에 처했다. 숙종 즉위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남인은
1680년(숙종 6) 경신환국을 통해 대거 실각하였고, 남인을 물리치고 실세를 얻은
서인은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이 때 숙종과 중전인 인현왕후 사이에는 아들이 없었는데, 숙종의 총애를 받던
소의 장씨가 아들을 낳았다. 남인은 이를 기회로 삼고자 소의 장씨의 아들을 원자로
추대하였고, 이에 반대하는 노론의 무리들을 처결,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으니
이것이 기사환국이다. 숙종은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대동법을 전국에 확대
실시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덜고, 상평통보를 주조하였으며,
군사제도를 정비하는 등의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1720년(숙종 46) 6월 8일 경덕궁의 융복전에서 60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 일화
사료가 밝히는 사실과는 거리가 있지만, 숙종과 인원왕후의 능이 이곳으로 정해진
연유와 관련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숙종이 하루는 평상복을 입고 민심을 살피기
위해 궐을 벗어나 어느 냇가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 때 냇가에서 한 젊은이가 울고
있는 것이 보여 연유를 물으니, 갈처사라는 유명한 지관이 이곳에 무덤을 쓰면 좋다고
해서 땅을 파는데, 아무리 파도 물이 고이니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숙종은 그 지관이 장난을 쳤다고 여기고, 젊은이를 불쌍히 여겨 관청에 가서
쌀 300석을 받아올 수 있도록 적은 서신을 쥐어주었다.
그리고는 지관이 살고 있는 허름한 오두막집을 찾아가 청년의 일을 따져 물었다.
그러자 지관은 “모르면 잠자코 계시오. 저 땅은 무덤자리로 들어가기도 전에
쌀 300석을 받고 명당자리로 들어가는 자리라오!”라며 따져 묻는 숙종에게 오히려
핀잔을 주었다. 그의 신통함에 놀라 자신이 국왕인 것을 밝히고,
훗날 숙종이 묻힐 묘자리를 골라달라고 부탁하였다.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지금의 명릉 자리가 바로 신통한 지관 갈처사가 택한 입지라고 한다.
○ 제1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
인현왕후[仁顯王后, 1667년 ~ 1701년]
인현왕후는 1667년(현종 8) 4월 23일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딸로 태어났으며,
숙종의 원비인 인경왕후가 일찍 승하함에 따라 1681년(숙종 7) 가례를 올리고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 당시 조정은 당파간의 분쟁이 한참이었는데, 왕의 여인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세력을 키우려는 암투마저 벌어졌고,
인현왕후는 한 때 이러한 싸움의 희생양이 되었다.
인현왕후와 숙종 사이에 아이가 없던 차에 숙종의 총애를 받던 소의 장씨[희빈 장씨]가
득남을 하였고, 당시 열세였던 남인 세력은 장희빈의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이에 반대하는 서인 세력들을 숙청하였다. 인현왕후는 이 때 함께
폐위당하여 궐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갑술환국을 통해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음과 동시에 복위되어 궐로 돌아왔다.
1700년(숙종 26) 원인 모를 병에 걸려 35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는데, 승하 후 희빈 장씨의
거처 부근에서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한 신당이 발견되었다. 숙종은 이에 분노하여
총애하던 희빈 장씨에게 사약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 일화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는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소설가인 김만중이 그의 말년에
유배지에서 쓴 한글 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 사씨는 성품이 곱고 후덕한 인물이지만,
남편 유연수의 교활한 첩 교씨의 모함을 받아 결국 내쫓김을 당하게 된다. 유연수의 첩
교씨가 아들을 낳은 후 정실부인이 되기 위해 갖은 계략을 꾸미며 그녀를 몰아낸 것이다.
소설은 한림학사 유연수의 처 사씨의 바른 품행과 그녀를 시기하는 악한 첩 교씨가
그녀를 음해하기 위해 꾸미는 악행들, 그리고 소설 끝에 가서는 누명을 썼던 사씨가
귀양지에서 돌아오고 악행이 들통난 교씨는 처형당하는
권선징악 구조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는 숙종의 인현왕후 폐출 사건을 모델로 당대의 현실을 소설화한 것이다.
서인이었던 김만중은 이 소설로서 인현왕후를 폐비하는 것이 부당함을 밝히고,
스스로의 영화 역시 되찾길 바라던 것으로 여겨지나, 그는 끝내 인현왕후가
복위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유배지에서 세상과 하직하였다.
○ 제2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 김씨
인원왕후[仁元王后,1687년 ~ 1757년]
숙종의 두 번째 계비 인원왕후는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딸로 1687년(숙종 13) 태어났으며,
첫 번째 계비 인현왕후가 승하함에 따라 1702년(숙종 28)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남편인 숙종이 먼저 승하한 후 1720년(경종 즉위)에 대비가 되었고, 1724년[영조 즉위]에
대왕대비 되었다.1757년(영조 33) 71세의 나이로 승하하여 명릉 오른쪽 언덕에 예장되었다.
♠ 일화
2007년 2월 숙종의 세 번째 부인이었던 인원왕후가 당시 궁중 생활을 기록하여 엮은
『선군유사(先君遺事)』와 『선비유사(先?遺事)』가 세간에 소개되었다. 선군유사는
아버지에 관한 회상, 『선비유사』는 어머니에 관한 회상을 말한다. 『선비유사』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궁 안에 머무르시면 새벽에 일어나시어 문 밖에 오셔서 내가 잠에서 깨기를 기다리시고
내가 청하여 “누운 자리에 들어오소서.” 하면 “황송 하노라.” 사양하시고, 내가 청하여
자리를 한 가지로 하고자 하면 반드시 머뭇거려 사양하셨다.
이 두 권의 기록에서 인원왕후는 궁에 들어와 부모님을 그리는 마음과, 중전으로서
부모님과 사사로운 정을 나눌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선군유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보인다. 15세에 이르되 항상 무릎에 두시고
이마를 어루만져 잠깐도 버려두지 않으시더니 내가 이 지위에 오르자 …… 내가 그
좌석이 너무 멂이 민망하여 가까이 옮겨가고자 하면 아버지께서는 종종걸음으로
물러나 사양하셔서 내가 감히 사사로운 정을 펴지 못했다.훗날 인원왕후는 이 기록을
친정으로 보내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도록 하였다. 이 두 권의 문집과 더불어
발견된 세 권의 문집은 인원왕후가 노년에 썼을 가능성이 높으며, 단아하고도
기품있는 글솜씨가 당시 그녀의 학문과 독서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출처 : 문화재청 서오릉 관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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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릉을 홍살문과 참도.정자각 각 봉분[능침]을 바라본다.
능침 사이로 보이는 골짜기를 두고 사이에 언덕이 있다 하여 동원이강 형식의 왕릉이라고 한다
"동원이강[同原異岡]" 이란
같은[同] 능원[原] 안에 나란한 다른[異] 두 줄기의 언덕[岡]에 왕과 왕비의 두 봉분[封墳]과 상설[常設]을 별도로 설치하는 형식입니다.
이 때 능원 아래쪽에 정자각[丁字閣]을 보통 두 언덕의 가운데에 하나만 설치해야 동원이강릉의 형식으로 분류합니다.
만약 정자각이 각 언덕 봉분 아래에 별도로 설치되어 있으면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별도의 단릉[單陵] 형식으로 분류되는 것입니다.
실제 조성시기로 볼 때 7대 세조의 광릉[光陵]이 조선의 첫 동원이강의 형식으로 만들어진 능인데,
조성할 때 왕후인 정희왕후릉을 우여곡절 끝에 세조의 능 옆 언덕에 모시고
본래 세조의 능 앞에 있던 정자각을 두 언덕의 가운데로 옮겨 다시 세워 동원이강의 형식을 이루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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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복방터와 비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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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추돌로 보이는 터가 있는대 아마도 이곳은 수복장들이 묵었던 수복방터 인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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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의롭고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듯한 정자각 오르는 참도가 잘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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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자각으로 오르는 참도인 신도와 어도.신을 숭배 하는 정신을 엿볼수있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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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각 내부에는 비문을 있으나 오늘은 비문을 공개 하지 않는가 문이 닫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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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각 내부를 드려다 봅니다.
"조선국 [朝鮮國]
숙종대왕 명릉 [肅宗大王 明陵]
인현왕후 부좌 [仁顯王后 祔左]"
이라고 새겨[刻]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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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제19대 숙종왕[좌축]와,계비 인현왕후[우축] 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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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제19대 숙종왕[肅宗王] 능
1661년[현종 2]∼1720년[숙종 46].
조선 제19대왕. 재위 1675년∼1720년.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돈[李焞], 자는 명보[明普].
현종의 외아들이며, 어머니는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딸인 명성왕후[明聖王后]이다.
초비[初妃]는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 김만기[金萬基]의 딸인 인경왕후[仁敬王后],
제1계비[繼妃]는 영돈령부사 민유중[閔維重]의 딸인 인현왕후[仁顯王后],
제2계비는 경은부원[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의 딸인 인원왕후[仁元王后]이다.
1661년 8월 15일 경덕궁 회상전[會祥殿]에서 태어나 1667년[현종 8] 정월 왕세자에 책봉되고,
1674년 8월에 즉위하여 재위 46년 되던 해 6월 8일 경덕궁 융복전[隆福殿]에서 승하하였다.
왕의 치세기간은 조선 중기 이래 계속되어온 붕당정치[朋黨政治]가 절정에 이르면서 한편으로는
그 파행적 운영으로 말미암아 당폐[黨弊]가 심화되고 붕당정치 자체의 파탄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이때의 정국형세를 살펴보면, 왕의 즉위초는 앞서 현종 말년 예론[禮論]에서의 승리로 남인이 득세하고 있었으나
1680년 허견[許堅]의 역모와 관련되어 남인이 실각[庚申大黜陟]하고 서인이 집권하였으며,
다시 1689년[숙종 15] 희빈장씨[禧嬪張氏]가 낳은 왕자(후일의 경종)에 대한 세자책봉문제가 빌미가 되어
남인정권이 들어섰다가[己巳換局], 1694년 남옥[濫獄]이 문제되고 폐출되었던 민비[閔妃]를
복위시킴을 계기로 남인이 정계에서 완전히 거세되며, 그대신 이미
노론‧소론으로 분열되어 있던 서인이 재집권하는[甲戌換局] 연속적인 변화가 있었다.
그뒤에도 노론‧소론 사이의 불안한 연정[聯政]형태가 지속되다가 다시
1716년 노론 일색의 정권이 갖추어지면서 소론에 대한 정치적 박해가 나타나게 된다.
※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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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 능
1667년(현종 8)∼1701년[숙종 27]. 숙종의 계비. 성은 민씨[閔氏]. 본관은 여흥[驪興].
아버지는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이며, 어머니는 은진송씨[恩津宋氏]로 송준길[宋浚吉]의 딸이다.
1681년[숙종 7] 가례[嘉禮]를 올리고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 예의가 바르고 덕성이 높아 국모로서 만백성의 추앙을 받았으나,
왕자를 낳지 못하여 왕의 총애를 잃게 되었다.
특히, 장소의[張昭儀]에게서 왕자 균[昒: 경종]이 출생하자, 숙종의 총애는 장소의에게 쏠리게 되었다.
1689년에 숙종이 왕자 균을 원자로 봉하고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송시열[宋時烈] 등 노론파 인사들이 소를 올려 이에 반대함으로써 숙종과 심하게 대립하였다.
숙종은 이들을 면직, 사사시키고, 이현기[李玄紀]‧남치훈[南致薰] 등 남인들을 등용하는 이른바 기사환국이 일어났으며,
지위가 오른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간계로 폐서인이 되어 안국동 본댁[本宅: 感古堂]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뒤 숙종이 폐비에 대한 처사를 후회하고 있던 중에 1694년 소론파의 김춘택[金春澤]‧한중혁[韓重爀] 등이 폐비 복위운동을 일으키자,
이를 저해하려는 남인 민암[閔黯]‧김덕원[金德遠]‧권대운[權大運] 등을 유배, 사사시키는 갑술옥사를 거쳐 다시 복위되었다.
그뒤 덕을 베풀고 희빈 장씨와 화기[和氣]를 도모하면서 살았으나, 원인모를 질병으로 1701년에 35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존호는 효경숙성장순[孝敬淑聖莊純], 휘호는 의열정목[懿烈貞穆], 능호는 명릉[明陵]이다.
한 궁녀가 그를 주인공으로 하여 쓴 소설 《인현왕후전》이 전한다.
※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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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장묘 이다 보니 지대석을 설치 하는곳도 정밀하고 새심한 노력을 였볼수있는 이음부분
물이 흘러 나올수있도록 구멍까지 설치 하였으며 다른 왕릉보다 병풍석도 없어 보였으며
재위 당시 하명 하였던 왕릉 관리에 화려함을 없도록 한것이 본인묘에서도 볼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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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명등
이색적인 것은 능역의 중앙에 세워진 장명등이다.
왕을 모신 조선시대의 왕릉에는 태조 건원릉이래 약 300년 동안 8각 장명등을 설치했는데,
이런 전통이 숙종에 의해서 바뀐 것이다.
숙종은 단종을 복위하고 장릉[莊陵]을 후릉[厚陵·2대 정종의 능]의
예에 따라 간소하게 조성하도록 했는데, 이때 4각형 장명등이 왕릉 역사상 처음으로 채택됐고
자신의 능에도 4각 장명등을 세운 것이다. 이후에도 4각 장명등은 경종의 의릉,
영조의 원릉, 정성왕후의 홍릉, 헌종의 경릉 등에도 설치돼 그 전통이 계승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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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인석.과 무인석. 제2계비 인원왕후묘의 문인석. 무인석.과의 인상은 대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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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종대왕 능침공간 부근에서 바라본 정자각 전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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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종대왕.인현왕후 능침공간을 돌아 뒷면에서 담은 사진 명당 자리로 볼수있을까.... ?
명당에 관한 공부가 많이 필요함을 느끼게 하는군요...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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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 단릉

△. 인원왕후 능상부근에서 바라본 명릉 전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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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각 내부에 있는 인원왕후 비석이다.
"조선국 [朝鮮國]
인원왕후 부우강 [仁元王后 祔右岡]"
이라고 새겨[刻]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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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 능
1687년[숙종 13]∼1757년[영조 33]. 조선 숙종의 둘째 계비.
경주김씨[慶州金氏]로 이조판서 김남중[金南重]의 3대손이며,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의 딸이다.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가 죽자, 간택되어 궁중에 들어가 다음해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1711년 천연두를 앓았으나 소생했고, 2년 뒤에 혜순[惠順]이라는 호를 받았다.
숙종이 죽은 뒤 왕대비로 있으면서 1722년[경종 2] 자경[慈敬], 1726년[영조 2] 헌열[獻烈], 1740년 광선현익[光宣顯翼],
1747년 강성[康聖], 1751년 정덕[貞德], 1752년 수창[壽昌], 1753년 영복[永福], 1756년 융화[隆化] 등의 존호[尊號]가 올려졌다.
사후에 휘호[徽號] 정의장목[定懿章穆]이 올려졌다. 소생은 없고 능은 경기도 고양의 명릉[明陵]이다.
※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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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명등
숙종대왕때 부터 사각형 모양을 갖춘 장명등을 사용하였는대 이곳에도 설치 되어있다.
그러나 이곳에 장명등은 약간 기울어져있어 보기가 않좋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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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풍석이라고 보다는 병풍석없이 지대석으로만 이루어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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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왕릉과는 달리 보이지는 않았으며 여기에 있는 문인석이 인상에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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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인석.무인석.을 보시면 얼굴에는 미소를 잔뜩 머금은 표정이 인상 깊어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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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원왕후 능침공간을 지나 뒷면에서 바라본 곡장등 앞으로는 시원함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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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뒷면에서 바라본 명릉 전경 이색적으로 보이는 동원이강 형식이 오늘 해석이 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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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왕릉이던 흔이 볼수있는 동물상 이곳에도 양.호가 엄호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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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는 명릉을 돌아서면서 좌측으로 보이던 "인원왕후" 능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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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은 우축으로 보이는 숙종왕능과 합장능인 인현왕후능입니다.
시간이 늦은 시간이며 관람 퇴장 시간이되어 퇴장중에 관리인이 점검하기위해 정자각으로
올라가 점검 하는 모습이 관리의 중요성을 다시한번더 느끼게 하여 주는군요..
또한 서오릉에서도 특이한것은 능침공간까지 올라갈수 있도록 다른곳과는 달리 울타리가 없어
쉽게 올라 갈수있었으며 다른곳에서는 눈치 보며 올라 사진을 담을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어서 경릉. 창릉. 홍릉. 익릉. 포스팅 하도록 하겠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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