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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6.27] 최영 장군 묘『崔瑩 將軍 墓』(1316∼1388)

순도리(칠이) 2010. 6. 28. 15:08

 


◎ 최영장군 묘『崔瑩將軍墓』




          종 목 : 경기도 기념물 제23호 [고양시] 명 칭 : 최영장군묘[崔瑩將軍墓] 분 류 : 유적건조물. 무덤. 봉토묘. 지정일 : 1975.09.05 소재지 : 경기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70-2 시 대 : 조선시대 고려 후기의 명장이며 충신으로 고려를 끝까지 받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끝내 처형된 최영(1316∼1388) 장군의 묘소이다. 부인 문화 유씨와의 합장묘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있다. 그는 공민왕 1년(1352) 조일신의 난과 공민왕 3년(1354) 장사성의 난을 평정한 것을 비롯하여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을 격퇴하는 큰 공을 세웠다. 전국 각처에서 일어난 반란을 평정하고 수십 차례에 걸친 왜구의 침입을 막아내는 등 흔들리는 고려의 국운을 바로 잡는 역할을 했다. 명나라가 철령 이북의 영토를 빼앗으려 하자 요동정벌 계획을 세워 우왕과 함께 압록강까지 진군하였다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우왕 14년(1388) 이성계 등의 신진세력에 의해 처형되어 선친인 최원직의 묘소 앞에 안장되었다. 이성계는 왕조를 세우고 나서 6년 만에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려 넋을 위로하였는데, 그의 무덤에는 풀이 돋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무민공[武愍公] 최영 장군 충혼비 1970년 대한민국 국방대학원과 문화공보처에서 세운 것이다. 최영은 1316년(충숙왕 3)에 태어나 호군, 대호군을 거쳐 후에 문하시중에 올라... 고려 말 공민왕과 우왕 때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을 수차례 물리치고 1388년 요동 정벌을 계획하였으나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좌절된 후 이성계에 의해 참형 유명한 그의 좌우명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 는 부친의 유언이라고. 이거 잘 지키기 어렵다는 건 너도 나도 잘 알지

              최영장군[崔瑩將軍] 부친 최원직[崔元直]의 묘비 贈推忠雅亮兼儉輔世翊贊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判門下 증추충아양겸검보세익찬공신벽상삼한삼중대광판문하 府事上護軍兼判藝文 春秋館 事東原府院君崔公墓 부사상호군겸판예문 춘추관 사동원부원군최공묘

 

          최영장군[崔瑩將軍] 부친 최원직[崔元直]의 묘[墓] "여견금여석 [汝見金如石] 너는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 혹간엔 장군의 말씀인 줄 아시는 분들도 있으시지만, 장군의 부친의 말씀이라 합니다. 견금여석 [見金如石] 항상 이 네 글자를 띠에 써 가지고 일생동안 가슴에 새겨 잊지 않았다. 비록 나라의 정권을 한 손에 잡고 위엄이 중외에 떨칠 때에도 털끝만큼이라도 남의 것을 취한 일이 없었다고한다. 부친으로부터 유혼[遺訓]을 받은 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실천하였던 최영장군은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풍채가 늠름했으며 용력이 출중하여 문신 가문에 태어났으면서도 병서를 읽고 무술을 익히어 무장의 길을 걸었고, 공민왕 원년(1352)에 조일신[趙日新]의 역모를 진압하여 무명[武名]을 떨치기 시작했다. 최영장군은 살아생전 명장으로서 그가 지닌 애국심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으로 백성들 사이에서 높이 존경되는 인물이었으며 그의 이름 석자는 세상에 널리 알려졌었다. 고려 왕조를 수호할려다 결국 이성계에 죽음을 당하자. 그의 죽음을 접한 많은 백성들이 나라 곳곳에서애통해 하며 눈물을 흘렸다한다. 이성계는 비록 최영장군과 정적관계에서 죽였지만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생각하고 새 왕조를 세운 후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려 최영장군의 넋을 위로하였다.

              최영장군 묘[崔瑩將軍 墓] 오래된 충혼비 전면에 다음과 같은 묘비명이 새겨져 있다. 高麗盡忠奮佐命安社功臣判密直事大將軍門下侍中 고려진충분좌명안사공신판밀직사대장군문하시중 贊成事六道都巡察使鐵元府院君謚武愍東州崔公諱 瑩之墓 찬성사육도도순찰사철원부원군익무민동주최공휘 영지묘 三韓國大夫人文化柳氏祔左 삼한국대부인문화유씨부좌

 

 

          최영장군 묘[崔瑩將軍 墓] 부인 문화유씨와 합장하여 1기의 묘로 만들었다.2단 호석을 두른 사각형 묘로서 곡장[曲墻]을 설치하였다. 묘 앞에는 좌우에 묘비와 충혼비가 있으며 상석, 혼유석, 향로석이 있고 망주석과 문석인각 한 쌍이 좌우에 배열되어 있다. 그의 묘는 구파발에서 통일로를 따라 북으로 올라가면 대자리 마을이 있고 산 기슭 대자산 중턱에 최영장군의 묘가 있다. 이북에도 그의 묘소가 있는데 개풍군[開豊郡] 덕물산[德物山] 최영장군이 묻혀 있는 적분[赤墳]이 있으며 적분 위에는 장군당[將軍堂]이 있어 최영장군을 모셔놓고 있다한다. 14세기후반 고려말, 압록강 건너 요동[遼東]지역을 우리땅에 편입시키려 대망을 꿈꾸던 우국 노장 최영 장군. 뜻하지 않게 이성계의 정권찬탈의 희생양이 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었다.(1388) 최영장군이 형장에서 마지막으로 읊은 詩 올려봅니다. "북소리 두리둥둥 내목숨 앗아간다. 충신의 죽는길이 이다지도 어려우냐? 천하를 호령하던 초패왕의 기개세가 황구유아[黃口幼兒]한테 꺾일줄을 어찌알리."

      최영장군 묘[崔瑩將軍 墓] 고려[高麗] 말기[末期]의 명장[名將이며 충신인 최영[崔瑩, 1316∼1388] 본관[本貫]은 동주[鐵原,]이고 시호[諡號]는 무민[武愍]이다. 장군은 충숙왕[忠肅王 3년, 1316]에 사헌규정 원직[元直]의 아들로 동주[鐵原, 철원]에서 태어나 호궁[護軍], 대호군[大護軍]을 거쳐 찬성사, 팔도도통사, 문화시중[門下侍中]등을 역임하였다. 홍산대첩[鴻山大捷]에서 왜구를 섬멸한 것을 비롯하여 수십차에 걸쳐 왜구를 무찌르고 국내의 대소 반란 토벌 등 80여 회나 출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공민왕[恭愍王 4년, 1355]에는 원[元]나라에 속했던 압록강 서쪽의 8참[八站]을 수복하기도 하였다. 원나라의 횡포와 국내의 혼란으로 흔들리는 고려의 국운을 바로 잡았고, 신흥 명[明]나라가 철령[鐵嶺]이북 지방에 철영위[鐵嶺衛]를 설치하여 영토를 빼앗으려 하자 요동 정벌을 계획하여 압록강까지 진군하였다가 이겅계[李成桂]의 위화도 회군으로 실패하였다. 우왕[禑王] 14년, 1388) 이성계등 신진세력에 의해 처형되어 선친의 묘소 앞 이곳에 안장되었다. 자신의 첩 딸이 우왕에게 시집가 영비[寧妃]가 되었고 부원군자리에오르면서 모든 권력이 그의 수중에 있을 때였으며, 고려 말 우왕 당시 문하시중과 팔도도통사로 권력의 최정상에 있을 때 골라 쓴 좋은 자리라 한다. 홍건적이 쳐들어와 1359년 서경이 함락되자 이를 쳐 수복하였고, 1361년에는 개경까지 함락되었으나 역시 이를 격퇴하여 수도를 수복하였다. 고려 말기의 명장으로 고려를 끝까지 받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끝내 죽임을 당한 최영[崔瑩]의 묘이다. 최영은 동주 최씨로 철원에서 태어났으며 고려 공민왕 1년(1352) 조일신의 난을 평정한 이후 100여 회의 전투에서 매번 승리한 명장으로 특히 공민왕 5년 공민왕의 반원정책을 도와 원나라에 속했던 압록강 서쪽지역을 공격하여 되찾았다. 또한 요동정벌을 단행하여 팔도도통사로서 전쟁을 지휘하였으나 출병한 이성계의 위하도회군을 막지 못하고 이성계에 의해 체포되어 유배되었다가 1389년 개경에서 73세를 일기로 처형되었다.많은 사람들의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고양지역을 중심으로 무속신앙의 숭배대상으로 섬기기도 한다. ※ 무속신앙의 숭배대상이라 그런지 좌.우 문인석[文人石]과 망주석[望柱石] 에 손상이 되 있는것을 보았습니다. 좌측에 문인석[文人石] 코를 때어 가져갔구요 우측 문인석[文人石]은 한쪽귀를 때어 가져간것으로 보여 집니다. 일종에 한 종가의 위인일것이지만 우리들의 문화재로써 손상된것을 보았을때는 가슴이 뭉쿨해졌습니다.